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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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88) - 무엇으로 하나님을 섬기는가

출애굽기 39:1-31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9-28

말씀내용
<무엇으로 하나님을 섬기는가> 출 39:1~31



신앙생활을 하면서 좌절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좌절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부족하고 실패 투성이인 내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적어도 주님을 잘 섬기며 살고 싶어하는 성도들은 좌절하게 됩니다. 때로는 저 자신도 “과연 목사로 섬기는 일이 가능한 일인가? 계속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사도 그렇지만, 교회에서 자그마한 직분을 하나 맡아서 섬긴다고 해도 그렇고, 어떤 일로 하나님을 섬기든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는 매우 정상적인 일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합당치 않은 일일 것입니다. 아론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 세움을 입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대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막은 이제 다 완성되었습니다. 이 옷만 만들어지면 성막과 관련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모든 것이 마치게 되고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성별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아론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론이나 백성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론이 금송아지 숭배 사건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으로 섬겨야 할 아론의 입장에서 보면 큰 오점이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모든 백성을 대신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신다면 심히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이 대제사장 아론에게 여러분의 영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피차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옷, 대제사장의 의복입니다. 이미 그 상징으로 가득한 대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기록한 28장의 말씀을 세 차례에 걸쳐 비교적 상세히 상고하였으므로 오늘은 이 대제사장의 옷이 그의 섬김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구속사에서 가지는 의미 그리고 오늘날 신자들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가 하는 것을 상고할 것입니다.

1. 대제사장의 옷: 에봇, 흉패, 겉옷 그리고 관
오늘 본문은 대제사장의 옷을 설명하고 있는데, 먼저 에봇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오고(2~7), 흉패(8~21), 에봇 받침 긴 겉옷(22~26)에 관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사장의 옷 및 대제사장의 관과 금패를 만드는 이야기가(27~31)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옷을 보면 누구라도 단번에 그가 성막을 섬기는 사람임을 알 수 있을만큼 성막에 쓰인 재료를 썼을 뿐 아니라, 그 색깔에 있어서도 성막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그의 옷은 상징들로 가득합니다. 복습하는 심정으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에봇은 아마 대제사장을 구별해주는 가장 특징적인 복장이었습니다. 에봇은 소매가 없는 긴 앞치마 같이 생긴 옷이었습니다. 두 개의 어깨 끈으로 고정했고, 허리에는 같은 소재로 만든 띠를 하게 하였습니다. 에봇의 견대에는 호마노라는 보석에 각각 6 지파씩의 이름을 새겨서 금테에 물려 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자신의 직무를 행할 때 언제나 온 백성을 대신해서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양 어깨에는 언제나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올려져 있는 것입니다. 또 에봇 가슴에 흉패를 만들어 붙이라고 하셨습니다(8~14). 에봇, 특별히 그 가슴 쪽에 만들어 붙이게 되어 있는 흉패는 에봇을 짜는 동일한 방법으로 짜서 붙여놓은 두 겹의 주머니처럼 된 길이 넓이가 각각 한 뼘 정도(약 20cm)되는 정사각형의 천입니다. 이 안에는 판결을 하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돌을 넣어두었기 때문에 판결 흉패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출 28:15,30). 이 흉패에 특징적인 것은 각 지파의 이름을 쓴 열 두 개의 보석을 역시 금테에 물려 붙여놓은 것입니다(10~13). 어깨 뿐 아니라 가슴에도 이스라엘 각 지파의 이름을 새긴 보석을 붙여야 하는 것은 대제사장이 모든 백성을 자기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서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세사장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그가 가슴에 품고 있는 모든 백성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보실 것입니다. 이것이 출 28:29의 의미입니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 그리고 에봇 안에는 청색으로 되어 거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겉옷을 입게 되는데, 이것은 여러 개의 천을 붙이지 않고 하나의 통으로 짠 큰 천의 가운데 어깨 사이에 머리가 들어갈 구멍을 뚫은 옷입니다(22~26). 이 겉옷의 아래 가장자리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놓은 석류 모양 장식과 금방울을 번갈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씨가 가득한 석류는 아마 풍성함을 상징할 것이고, 금방울은 하나님께 들어올 때 소리를 나게 해서 죽음을 면하라고 하셨습니다(출 28:35). 27절에는 제사장들의 옷이 나오고 28~29절에는 머리에 쓰는 관과 속옷, 띠들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30~31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진 정금패를 만드는 기록인데 이것은 대제사장이 관 위 이마에 붙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관으로써 대제사장의 존재는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거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본인은 물론 그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옷은 상징들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 가운데서 대제사장을 세우신 것은 늘 범죄하고 불경건하여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도저히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할 중보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그 백성을 대신하여 그들을 어깨에 지고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약점과 결함을 가진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금송아지 숭배 사건의 주역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속죄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복종해야 할 사람이었고 실로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호르산에서 죽게 됩니다. 이런 연약한 사람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구별해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상세하게 지시해주신 대제사장의 의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자 모세는 그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민 20:28). 대제사장 아론은 옷에 의해서 구별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대제사장으로 섬기게 한 것은 그의 의복이었습니다.

2.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히 4:14~16; 7:27~28; 8:1,2; 9:24~26; 10:21)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이라고 소개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히 10:21).”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십니까? 우리를 위한 속죄제사를 드리시고 사람이 만들지 않은 하늘의 성소로 올라가 그 제사를 완수하셨습니다. 그냥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어깨에 지고 가슴에 품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입어야 했던 옷을 입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전하게 거룩하신 분이셨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처음의 대제사장인 아론보다 우월하신 분입니다. 이것은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더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론이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그림자였기에 그와 비교하여 설명을 하는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대제사장이 어떤 점에서 우월하다고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합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지은 성막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성막에서 섬기는 대제사장이시고(히 8:2; 9:24), 이미 하늘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분입니다(히 8:1). 아론은 앉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려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이유로 성막에는 제사장이 쉴 수 있는 의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그 제사를 단번에 완수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론보다 더 나은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모세 율법에서는 약점을 가진 인간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로서 대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으셨습니다(히 7:28). 대제사장은 언제나 자기 죄를 위한 속죄제사를 드리고 나서야 백성의 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반복하여 드릴 필요가 없으셨으니, 단번에 자기를 드려 제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히 7:27). 그러나 너무나 감사한 일이 더 있습니다. 이 완전하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시험 받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친히 사람이 되셔서 연약함을 아셨고,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이고 힘이 되는 사실인지 모릅니다. 아론은 죽었고 그 아들 엘르아살이 그 직분을 대신해야 했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기에 홀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십니다(히 7:23~25).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까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놀랍게도 십자가의 그 제사에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섬기셨을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을 영원한 흠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5~26).”

3.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우리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라고 말하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위대한 대제사장의 단번의 제사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첫째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주고, 둘째는 이 깨끗해진 양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을 섬기려면 더러운 양심으로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아론처럼 옷만 입혀준다고 해서 어떻게 제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이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는 신자를 위해서 해주신 일은 깨끗한 옷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전체적으로 구약 모세의 율법의 언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베드로만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인삿말에 이렇게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했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5~6).” 바로 교회가 제사장인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사제들이 여전히 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영단번의 제사를 이루시고 우리를 제사장 삼으신 그 사역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이루지 못하신 어떤 남은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제사장이라는 말이 물론 아닙니다.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에게 요구된 의복을 입고서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의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있었을 뿐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입니다. 신자는 기도로서 무시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감당하는 역할이 무엇입니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홀로 서는 자가 아니라 그는 남을 대신하여 서는 자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기도가 어떤 내용이어야 할 것을 지시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드리는 기도의 전부가 고작 우리 자신의 필요만이라면, 기껏해야 우리 가족들의 필요만이라면 우리는 제사장의 직무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여러분 옆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 우리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 그리고 민족과 국가, 나아가서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민족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Iris Cully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서 이 관계가 모든 인간적인 관계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 안에서 창조주의 형상을 본다는 것은 여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있어서 분명한 관점을 갖도록 하는 일이다. 영적인 삶이란 특히 기도하는 형식에 있어서 자기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듯한 배타적인 태도를 버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중보적인 성격의 기도야말로 진정한 영성의 표식이다.” 과연 여러분은 그러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누군가를 대신해서, 누군가를 어깨에 지고, 가슴에 품고 나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직무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 자신이 그러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했습니다(롬 12:1). 헌금만이 아닙니다. 주일의 한 시간이라는 약간의 시간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전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하면서도 지금 저 자신의 부족함과 거룩하지 못함을 인식합니다. 대제사장의 의복에 대한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성막에 대한 모든 말씀 아니 지금까지 우리가 상고한 출애굽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려면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넘어지고 실패하고 범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영단번의 제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아직 그 제사의 완전한 효력을 완전하게 경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구속사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단번의 제사의 완전한 효력을 영원토록 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그 구원의 완성을 보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입니다. 제가 오늘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는 근거는 제가 오늘 잘 살았기 때문이고 제가 오늘 거룩과 의를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하게 성공적으로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여전히 그런 거룩과 의를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로 하여금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은 저를 위해서 자기 몸을 버리시고 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거룩한 제물로 만드신 저의 위대한 대제사장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도 간절하게 그분의 거룩함과 그분의 의를 힘입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을 품고 나아갑니다. 이것은 비단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동일합니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범죄할 때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과 의가 준비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완전하시고 위대하신 대제사장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으로 옷입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아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일평생을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자는 결코 교만할 수 없으며, 이 믿음으로 사는 자는 결코 아주 넘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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