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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72) - 물두멍과 관유

출애굽기 30:17-33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4-13

말씀내용
<물두멍과 관유> 출 30:17~33


1. 물두멍(17~21)
하나님께서 성막의 기구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것이 물두멍입니다. 이 물두멍은 크기나 모양이 상세하게 지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상상에 의해서 이것을 그림이나 형태로 재현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보는 그림과 같이 매우 다양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물두멍을 만들 때, 대강 추측하고 상상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늘의 성소를 보여주셨고 모세는 그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출 25:9). 다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사항은 그 재료를 회막 밖 뜰에 있는 제단과 마찬가지로 놋으로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단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서 놋으로 싸라고 하셨지만, 물두멍은 그냥 놋으로 만들라고 하신 것이 다릅니다. 그리고 물두멍의 받침도 놋으로 만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A. 용도
물두멍은 제사장들이 그들의 손과 발을 씻는 곳이었습니다. 물두멍 안에 물을 담아놓고(18)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기서 손발을 씻습니다(19). 그들의 손은 언제나 희생 제물의 피로 물들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회막 안으로 들어가서 일을 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말하자면, 백성들의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해서 짐승을 잡고 그 피를 손에 묻혀야 했으며, 동시에 그들은 그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고 또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들에게는 금향단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대제사장의 경우에 속죄일에 지성소의 속죄소에서 행해지는 일이었습니다. 20절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은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그들이 만일 손과 발을 씻지 않고 하나님의 회막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했다면 그들은 죽을 것입니다. 절대로! 라는 말이 여기 물두멍에도 쓰여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회막으로 들어갈 때에만이 아니라 뜰에 있는 놋제단에서 화제를 드릴 때에도 제사장은 손과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뜰 가운데 있는 이 물두멍은 수시로 제사장들이 손과 발을 씻는 장소였습니다. 21절에서 다시 한 번 죽음을 면하라는 경고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행위는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께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B. 물두멍은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상징한다.
놋제단과 물두멍의 차이를 비교해보면 우리는 회막 뜰에 있는 이 두 기구가 얼마나 우리의 구원에 대한 놀라운 이미지를 전달하는지 알게 됩니다. 놋제단에서는 불이 사용되었고 물두멍에서는 물이 사용되었습니다. 불과 물은 성경에서 둘 다 정결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물두멍이 놓여져 있는 위치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뜰의 놋제단과 회막 안의 금향단 그러니까 성막 안에 있는 두 개의 제단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놋제단이 불로써 죄를 태워드리는 속죄가 일어나는 장소라면, 금향단은 구속함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이 사이에 물두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정결함이 요구되었습니다. 이 정결함은 단순히 죄용서를 받았다는 수준, 칭의를 얻었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놋제단이 속죄와 칭의에 관한 것이라면, 물두멍은 우리의 성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손과 발을 매일, 수시로 씻는 행위입니다. 왜 이것이 필요한가? 하나님과 사귀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밤에 제자들과 모이셔서 그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거부하자 씻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고 베드로가 온 몸을 씻겨달라고 하자 이미 다 씻은 자는 손과 발을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비슷합니다. 이미 놋제단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죄사함의 은총을 받습니다. 놋제단이 바로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고, 사람들(죄인들)은 성막 밖의 문을 통해서 뜰로 들어오게 되면 바로 놋제단을 마주 하게 된다는 것도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나아올 때 마주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십자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구속 곧 죄사함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이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매일 매순간 손과 발을 씻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심을 할 때 죄인은 처음으로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그리고 그의 성화의 삶은 이어지는 회개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고 성화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붙여놓은 95개 신앙선언문의 1번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신자의 전 생애는 회개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두멍이 없는 성막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물두멍이 없는 놋제단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성화가 없는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거룩함과 정결함이 결여된 구원은 없습니다.

C. 복음적 회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은 교제를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교제는 정결함을 요구합니다. 놋제단에서 피로 정결함을 입었더라도 매일의 삶 가운데서 우리의 삶의 정결함을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물두멍은 무엇입니까? 도덕적 삶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사람이 이제 성화의 삶을 도덕적 삶으로 살아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실패할 수 밖에 없으며 잘못된 교리입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도 은혜가 필요하지만, 넘어질 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은혜입니다. 후자의 은혜는 회개의 은혜이고, 이 회개의 은혜는 우리를 날마다 거룩한 삶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회개가 없는 성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물두멍은 신약 성도들인 우리에게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을 여기 물두멍에서 그들의 손과 발을 씻어야 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회개를 행하고 있습니까? 회개가 여러분의 삶 전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결핍은 주로 죄라는 개념을 배제한 채,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죄라는 개념 자체를 떠나서 하나님을 알거나 이해하거나 만날 수 없습니다. 죄라는 개념이 결핍하면 사람은 하나님을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 묘사하고 알 수는 있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랑과 선하심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친밀한 분으로 묘사하고 노래부른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D. 물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가리킨다.
물이 가리키는 것은 사실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는 본문들이 많습니다. 시 119:9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깨끗케하는 수단은 주의 말씀입니다. 요 15:3에 주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5:25~26에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씀하심인데,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베드로전서 1:22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일관성을 가지고 성경은 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 물에 대한 상징성은 얼마나 물두멍의 신학적 기능인 회개와 잘 맞는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사람이 어떻게 회개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변함없는 기준이 우리의 삶 가운데 계속해서 말씀을 할 때, 우리는 그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우리의 회개의 기준이 아니고, 내가 세워놓은 도덕적 기준이 회개의 기준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우리의 회개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 거룩한 관유(the holy anointing oil, 22~33)
물두멍에 대한 지시에 이어서 관유를 만드는 것에 대한 지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유는 구별된 사람이나 구별된 물건에 뿌리거나 발라서 거룩하게 하는 기능을 가진 기름입니다. 이것을 만드는 방법이 22~25절에 있습니다. 주로 네 가지 재료로 만들게 되는데 액체 몰약, 향기로운 육계, 향기로운 창포, 계피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관유를 먼저 성막의 모든 기구들에 발라서 지극히 거룩한 물품으로 구별하라고 하셨습니다(27~29). 그리고 기구들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바르게 하시는데 그 대상은 일차적으로 아론과 그 아들들인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나중에 왕과 선지자에게도 사용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왕과 제사장, 선지자 이 구약의 세 직책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불리우는 직책이 됩니다. 히브리어로 그것이 메시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메시아로 오셨을 때 주님은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모든 직분을 다 가지셨을 뿐 아니라, 이 세 직책의 성취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외의 기능으로는 어떤 사람에게도 부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32). 다른 용도로 이 관유를 만들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하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32~33).

우리가 재료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이 관유는 매우 향기로운 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향유가 부어졌을 때, 향이 온 집을 가득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시편 45:8을 보면 왕에게서 나는 향취가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면서 찬양을 합니다.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여기서 시인 다윗이 노래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관유의 부음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133편은 대제사장 아론에게 부어진 관유를 그림같이 설명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론의 머리에 부어져서 그의 수염과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관유의 향이 있는 곳에서 즐거이 교제하는 모습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사 영생의 복을 주신다는 것을 그림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 기름을 붓는 행위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성령님의 부어지심을 가리키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됩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묘사한 부분을 사도행전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이란 표현이 그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오늘 본문의 기록대로 관유는 사람 가운데에서는 오직 제사장들에게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약 시대에 이 관유의 상징인 성령의 기름부으심은 목사나 선교사 같은 특정한 사역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리우는 모든 성도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두 구절을 봅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0,27).” 여기서 기름부음을 받은 대상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 여기서 바울 사도는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바로 성령을 마음에 주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신자는 다 제사장입니다. 사실 성막에 대한 가르침들은 제사장들에게 관계가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제사장들인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성막을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교훈이 가득하고 다 우리 모두에게 관계된 말씀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이 관유가 부어져서 흘러내리고 그 향기가 우리가 가는 곳마다 풍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4~16).” 그리스도의 향기를, 요즘말로 하면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향기를 지닌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모이면 그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향내를 맡으면서 즐거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관유가 발라지거나 부어진 자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는 지성물이 됩니다(29).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기 위해서 구별된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이것을 압니다. 이것은 헌신된 몇몇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그가 어린 신자이든지 성숙한 신자이든지 부인할 수 없는 그들의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3. 물두멍과 관유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물두멍에 대한 지시에 이어 관유에 대한 지시를 하신 것이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마치려고 합니다. 물두멍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더러움을 씻어버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조금은 소극적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유는 어떻습니까? 관유는 더러움을 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도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기름을 발라 주는 적극적인 성격을 지니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씻음만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이상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물두멍과 관유는 각각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공급하시겠다는 약속을 주는 것입니다.

물두멍을 통해서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회개하는 일이 우리의 성화의 삶에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날마다 그렇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관유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교제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덧입혀져야 함을 배웁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 사항을 주목해야 합니다. 관유에 대한 주의는 다른 용도로 이것을 만들어서 사용하면 죽는다는 경고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성령님의 행위, 성령님의 역사를 모방하는 것을 엄히 금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회심과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그것 조차도 인간이 기술적으로 만들어낼 뿐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고 조장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은사를 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력한 목사가 은사를 준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목사의 은사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다 금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물두멍을 만든 재료가 놋이었다고 했는데, 물두멍을 만들 때 사용한 놋은 특별히 여인들이 자신들의 손거울로 쓰던 놋거울을 자원하여 바친 것들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나중에 읽게 됩니다.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출 38:8).” 왜 성경이 이것을 중요하게 여겨 기록하여 놓았을까요? 거울은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을 보고 잘못된 것이나 흠이 있으면 고치는 것이라는 긍정적 기능이 있지만(약 1:23), 어떤 여인들에게는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기능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물었던 마녀는 사실상 수많은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렇게 쓰이던 기구가 성막의 물두멍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온전치 못한 모든 것들을 바꾸셔서 당신의 거룩하신 용도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거울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존재가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게 되고,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아 거룩한 성도가 되어 이후에 늘 반복적으로 물두멍의 회개로 그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된 인생들로 변한 것이 바로 기적 중의 기적인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