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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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73) -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

출애굽기 31:1-11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5-25

말씀내용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 출 31:1~11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대한 모든 지시를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누가 이 성막을 만들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 알려주었으니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이 일을 하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 일이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아주 자잘한 일까지도 세밀하게 지시하시고 간섭하신다는 결론을 얻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오히려 그보다는 성막을 세운다는 것,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를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이것은 결코 마이크로 매니지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을 세워서 일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는 중요한 성경적 교훈을 줍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예술에 대한 교훈도 부수적으로 얻게 됩니다.

1. 모세와 아론이 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할 첫번째 소극적 교훈은 성막을 만드는 일이 모세와 아론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와 아론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을 특별하게 구별하여 세우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이 십시일반 힘을 합하여 성막을 지어라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이 일에 적임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일은 특별한 일입니다. 이것은 상당한 수준의 기술과 지식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때로 믿음으로 열심히 성실히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준비된 사람들을 세워서 일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반은총의 영역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친히 두 사람을 지명하여 세우셨습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사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두 사람의 예술가들이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교회의 많은 활동들 가운데서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교회 벽의 페인트 색이나 카펫의 색까지도 그들이 자신들의 선호에 따라서 결정합니다. 아주 작은 일이지만, 교회의 전체적이고 세부적인 일들에 대한 결정을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성막을 만드는 특별한 일은 모세와 아론의 일이 아니라고 가르쳐줍니다. 교회의 예배처소 결정 혹은 교회당 건축과 같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인 골격과 정신, 성경적 원리들에 대해서는 영적 지도자들이 그 원리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이 일을 위하여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교회당 건축의 경우에 여러분이 아시겠지만, 현대식 교회당들이 앞에 두 개의 강단을 세우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성,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인도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희석된 것이 그대로 건축 디자인에 반영된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원칙적 문제들은 영적 지도자들이 결정해야 할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세부적인 부분들은 예술가들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라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그들은 목사도 장로도 아니었습니다.


2. 하나님은 은사와 재능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하여 임명하시는 이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에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라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이 표현이 성경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본문입니다. 이 표현이 여기 처음 등장한다는 것은 성막을 짓는 일이야말로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떤 인간의 행위 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문화적 활동을 하고 창작 활동을 하는 것에 이런 표현이 쓰이지 않았습니다. 성막, 하나님의 처소를 짓는 이 일에 처음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이것이 인간의 육적 노력의 소산일 수도, 자연적 능력만으로 가능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수면에 운행하시며 함께 계셨던 창조주이신 성령님께서 이제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성막을 만드는 일을 위하여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창조주이신 성령님께서 홀로 성막을 지어주시지 않으시고 사람을 통해서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많은 경우에, 이것이 사람들에게는 오해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내가 너를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을 복주시겠다 하실 때, 아브라함이 “왜 하필이면 저입니까? 저는 제 계획이 있는데요. 다른 사람을 쓰시지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쓰시겠다 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에게는 크나 큰 축복인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렇게 합당하게 반응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요나라는 선지자에게 오면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거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그냥 계속해서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쓰시겠다고 니느웨로 보내시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한 기분 나쁜 간섭이었고 방해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Do Not Disturb 라는 딱지를 방문 밖에 붙여놓고 살고 싶어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간섭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핵심에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늘 강조해 온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에게 최상의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그 반대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에게 최상의 것을 주신다”는 내용을 가지고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뢰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의 문에 노크하시면 그 소리는 이제 드디어 올 것이 왔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내 인생의 소음이 너무나 커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문을 두드리실 때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해서 자기 인생의 소음을 줄이고 살아가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사실 요나 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출애굽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모세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렇게 반응했었습니다. 그 역시 지금 제가 설명 드린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생 80을 살았는데,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 아니었습니까? 모세가 정말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애굽 제국의 왕자로 40년을 성장한 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지난 40년은 광야의 목자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제 딴에는 하나님을 섬겨 보겠다고 했던 것이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혀버린 꿈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상황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거나 반기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꼬여있는’ 불신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라고 부르실 때, “저는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세 자신이 그렇게 대답한 것을 압니다. 우리도 그렇게 말하곤 합니다. “제가 뭔데 이런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이 말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부인하고 모독하는 불신앙적인 태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겠다는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즉, 능력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질 수 없는 짐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3절에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로”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브살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라면 6절에는 오홀리압에 대해서 “내가 지혜를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다 지어 만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3절에 나온 단어들을 보십시오. 지혜(wisdom), 총명(understanding, discernment) 그리고 지식(knowledge, skill, ability)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서 주시는 은사들입니다. 이 세 개의 단어들의 각각의 의미를 구분하여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단어의 조합이 동일하게 나오는 성경 구절이 있는데 잠언 2:6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여기서는 ‘지혜, 지식, 명철’로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번역이 혼용될 만큼 이 단어들이 가지는 각각의 의미는 상호 유사합니다. 그러나 굳이 구별하여 설명한다면 저는 Philip Ryken 이 한 것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지시사항들을 이행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능력이고, 총명은 이런 복잡한 일을 감당하는데 발생하는 불가피한 문제들을 풀 수 있는 능력이며, 지식은 이 일을 하는데 필요한 숙련된 기술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단어들이 모두 어떤 기술적 능력들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불러 세우시고 그 사람에게 합당한 능력과 재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교훈들을 주의 깊게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의 숙련된 경험만을 의지해서 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해보지 않은 일을 하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이전에 성막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고대의 예술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막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 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릇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들에게 이미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 일에 합당한 영적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것을 기억해야 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이 교훈을 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셔서 무엇을 하라고 명하신다고 느낄 때, “저는 아닙니다. 저는 능력도 경험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순종이고 가장 위험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소명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저버릴 수 있는 세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이것은자기 능력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내가 이 부르심을 받들어 섬기게 될 때,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 내가 잃어버리게 될 것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살게 된다면 그것은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다 대가를 지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것은 장차 올 영광의 중한 것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고후 4:17).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무서워서 소명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고 인생 최대의 실수인 것입니다.

3. 받은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겨라.
사람은 저마다 나름의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 재능이란 전부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자신을 위해서 사용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벌어들이기 위해서 재능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성도에게는 새로운 삶의 목적이 생기고,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에게서 그리스도께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던 재능을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주어진 성막을 세우는 일은 그들이 전에 해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들이 하던 일은 크게 다른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명하신 일입니다. 성막을 세우는 일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는 주님 자신이 세워가십니다. 주님은 한 번도 어떤 인간에게 교회를 세워달라고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과 서로 사랑하라는 것과, 우리에게 주신 온갖 재능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재능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소질과 성향으로 볼 때, 여러분은 어떤 기술과 재능을 더 익혀서 주님의 교회에 합당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십니까? 과거에 한국 교회에 있던 날연보의 개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돈을 바치고 싶지만 바칠 돈이 없어서 가난한 성도들은 자신의 한 날을 선택해서 그날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렸습니다. 그들은 예배당을 짓는 일에 자신들의 노동력을 드렸고 교회의 온갖 허드렛일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을 마치 하나님의 대사로서 하는 일처럼 귀히 여겨 감당했습니다. 아무 것도 드릴 수 없는 성도는 없습니다. 단지 헌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어떤 재능이던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여러분을 지명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가 어떻게 어떤 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지 가르쳐주십시오. 주님은 제게 이런 재능을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성령을 충만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필요하면 제가 더 많은 것을 익혀서 주님의 교회를 잘 섬기기를 원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성도를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우리의 대표들입니다. 그들은 영광스럽게 성막을 짓는 일에 부름을 받아 쓰임을 받았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교회의 일은 목사와 장로의 일이다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이 쓰임을 받기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시간에 주를 섬기는 은혜와 특권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잠언 22:29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여러분의 있는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능력,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가지고 사십시오. 여러분의 일에 충성하십시오.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의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자기 인생의 어젠더를 가지고 살지 마십시오. Do Not Disturb라는 표를 문밖에서 떼어내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떤 이유로도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인생으로 살기를 소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