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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74) -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출애굽기 31:12-18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6-03

말씀내용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출 31:12~18



1. 안식일 규정에 대한 이해 복습
우리는 이미 십계명을 공부할 때, 제4계명인 안식일 규정에 대해서만은 특별히 다섯 번에 걸쳐서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안식일 규정은 중요하고, 또 오늘날 그 해석에 있어서 의견이 많이 나뉘어 있는 이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막에 대한 말씀을 마치시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모세에게 하신 말씀도 안식일 규정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보면, 이 주제가 범상치 않은 주제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만나를 주실 때 언급하셨고(출 16:23), 십계명에서 한 번 더 그리고 시민법을 다루실 때(23:12)와 지금 이 본문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35장 초두에서(35:1~3) 다시 한 번 다루시는 것을 봅니다. 이런 반복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식일 규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대목에서 다시 등장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문제는 성막을 만드는 거룩한 일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안식일 규정에 대해서 공부한 내용을 잠시 간단하게 복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식일 규정은 신앙이 서고 넘어지는 중요한 명령이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언약 관계의 중심에 있는 규정입니다. 이것은 일주일 중 하루를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는 행위 규범을 넘어서는 명령이고 신자의 삶 전부에 영향을 미치는 계명이고 믿음으로만 지킬 수 있는 계명입니다.

A.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셨다!
하나님께서 6일의 창조사역을 마치고 제7일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사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완성된 피조세계에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공급받으면서 살게 되었고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하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안식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결정적 근거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 17절에서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B. 구원은 새 창조의 사역이다.
인간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창조와 안식만이 근거가 아닙니다. 신명기 5장의 십계명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안식일 계명의 근거는 출애굽기 20장에서와 달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신 5:15: 출 20:11).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말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사역을 하시고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심으로써 이제 당신의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안식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것은 구원이 왜 새 창조인가를 가르쳐주는 부분입니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시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 사역은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완벽하게 성취되었다는 의미입니다.

C. 안식일 준수는 종말론적인 안식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으로 말미암아 안식에 들어왔지만(히 4:3,10), 이 땅에서 그 안식을 완전하게 성취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시간적으로 완성되는 날, 우리가 영화로운 구원을 얻게 되는 날, 우리는 종말론적인 구원,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킬 때, 우리는 장차 들어갈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그것을 멀리서 소망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가 이것을 잘 표현해 줍니다.
(56장) 지난 이레 동안에
지난 이레 동안에 예수 인도했으니 주의 전에 모여서 크신 축복 빕니다
가장 복된 이날은 하늘 안식표로다 가장 복된 이날은 하늘 안식표로다
(57장) 즐겁게 안식할 날
이 안식 지킴으로 새 은혜 입어서 영원히 쉬는 곳에 다 올라 갑시다

“이 땅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안식도 누릴 수 없습니다.”

D.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으로 부름받았다.
좀 더 실제적인 적용도 있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로 부름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고작 먹고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살아가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 즉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과 그분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는 분명한 신앙과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살지 못합니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의 구원이 단지 애굽으로부터의 구원만이 아니라, 물질과 소유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또 하나의 의미입니다.

E. 안식을 누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정리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삶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혜와 선하심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대로 안식일을 지키고 살아가려면 절대적으로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아무리 율법적으로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2. 왜 또 안식일 규정이 나오는가: 언약의 표징
그러면 안식일 규정에 대해서 뭔가 더 할 말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물론 그러십니다. 그래서 여기 다시 한 번 안식일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어느 신학자가 한 말이기는 합니다마는, 안식일을 시간의 성소라고 합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가 있듯이, 거룩하게 구별된 시간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무엇과 관계가 있는가 하면, 예배, 하나님을 만나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두 개의 중심축을 중심으로 존재했는데, 그것은 장소로서의 성전과 시간으로서의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장소인 성막을 만드는 일이 거룩한 시간인 안식일을 범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의 표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으로서 표시를 지니라고 하시면서 주신 것이 할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남자는 자신의 몸에 할례를 받은 것을 크나큰 특권으로 여겼고, 이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것을 충분히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에게 율법 규정을 따라서 할례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 백성의 표시로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일이어야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인식할 때 (남자들은) 할례를 받은 사실과 안식일을 지키는 사실로써 그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6절에 안식일 준수를 대대로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시는데서도 이 사실이 거듭 강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안식일을 범한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사형에 해당될 만큼 중요한 규정이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14~15).

3. 성도를 거룩하게 하는 안식일
오늘 우리가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언급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13절에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동일한 원리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또한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 관계에 들어온 자기 백성에게 그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안식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막 2:27)”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 편에서 볼 때, 인간이 거룩해짐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안식일이 주어졌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안식일을 통해서 얻게 되는 영적 유익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 규정에서 분명히 이것을 의도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3절에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고 하신 뜻입니다. 안식일 규정과 같은 율법의 조항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늘 놓치기 쉬운 점이 무엇인가 하면, 언약 관계라는 측면 즉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하는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즉, 안식일이라는 규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지속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는 셈입니다. “하나님, 제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사귀며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서 이 날을 따로 떼어놓았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더 중요한 다른 일들이 많아요.” 이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매주일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께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십니까?

4.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신약 교회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
조금은 유치할지 모르지만 이런 질문을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구약처럼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까? 그리고 그날은 토요일입니까, 주일입니까?”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불리웁니다.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입니다(갈 6:16).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안식일 규정이 구약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구약 도덕법의 결정체인 십계명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십계명 안에서 안식일을 언급하실 때는 사형과 같은 처벌 규정은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형 처벌 규정은 시민법적 규정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또 안식일 규정이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의식법에 관련된다는 사실도 우리는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합니다. 주로 레위기에 기록된 절기로서의 안식일 개념이 거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제하더라도, 안식일 규정은 십계명 돌비에 쓰여진 도덕법적 차원을 유지합니다. 다만, 오늘날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인 교회는 그날을 토요일이 아닌 주일로 지킵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들이 그렇게 바꾸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결정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주일은 주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새로운 출애굽 즉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신 날입니다. 구약 백성들이 안식일을 통해서 멀리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았다면 이제 신약 백성들은 사건으로서 완성된 구원을 기념하고 종말에 시간적으로 완성될 구원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주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적 유대를 누리고 그 관계를 강화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주일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이 더 특별한 방식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킨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일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는 의미로 주일 성수라는 말을 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차는 원리에서 주일을 지킨다는 말은 아침 한 시간을 예배에 참석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관계도 그렇게 단 시간 만에 해치워지는 관계는 없습니다. 만일 이런 의미에서 주일 성수라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오히려 날이 아닌 시간의 성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저녁 예배가 전통적으로 서구 교회나 한국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가 산업화되고, 현대인들의 이동성이 증가하면서, 지역 교회의 개념은 사라지게 되었고 그 결과로 주일 저녁예배는 점차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녁 예배까지 드리면 주일을 온전히 지킨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아침 예배와 저녁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주일 하루를 온전하게 주님을 예배함으로 시작해서 예배로 마친다는 뜻인데, 이 두 차례의 예배는 마치 주일을 열고 닫는 의미있는 의식과 같은 것입니다. J.C.Penney 백화점을 세운 J.C.Penney가 한 말이 인상적입니다. “만일 주일 아침 예배와 저녁 예배 그리고 수요일 저녁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만큼 사업에 바쁘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통해서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사는 것도, 먹고 살자고 사는 것도 우리의 부르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헤와 공급하심으로 살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같은 거룩함을 입게 하시려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칠일 중에서 하루, 안식일을 구별하여 그날은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날로 정하셨습니다. 그날은 구별된 날이어야 합니다. 일상적으로 하던 일들을 계속해서 하거나, 하던 일에 사로잡혀서 월요일을 준비하는 날도 아닙니다. 물론 우리 시대에는 저녁 예배가 드물고 우리 교회도 저녁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날을 온전하게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되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섬기라고 하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들로 하루를 채우는 것입니다. 이 날은 사실 구약 백성들에게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징이 됩니다. 우리는 주일 아침에 옷을 잘 입고 차를 탐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주변에 증거합니다. 비록 이것이 소극적 증거라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이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을 온전하게 지키는 일을 힘쓰십시오. 그날을 구별하여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더욱 강화하고 누리는 날이 되게 하십시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이 끊어버려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끊어버리십시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여러분은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역사가 벤튼 존슨(Benton Johnson)은 19세기와 20세기에 미국 장로교인들의 주일 성수 관습의 변화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를 했는데, 그에 따르면, 1950년대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에 대한 그들의 역사적 헌신을 버렸습니다. 그 어간에 극장들은 주일 영업을 시작했고 상점들은 주일에 문을 여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미국에서 볼 수 없었던 사회적 변화들이었습니다. 50년대에 일어난 이 변화는 교회에 영적 활기의 상실과 멤버십의 쇠퇴를 가져왔다고 그는 관찰했습니다. 우리는 원튼 원치 않든 이런 역사적 흐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자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시류와 대세에 이끌리고 휩싸여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의 뜻은 명확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교회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다시 주님께 드리십시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