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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75) - 금 송아지

출애굽기 32:1-6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6-08

말씀내용
<금송아지> 출 32:1~6



우리가 오늘 상고하는 본문을 포함하여 32장부터 34장은 성막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와 성막을 세우는 일 사이에 사람들의 죄와 반역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32~34장의 본문은 출애굽기의 전체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본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세우라고 지시하셨고 35장 이후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하나님의 지시하신 대로 순종하여 잘 세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맺을 때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겠다고 말했습니다(출 24:3). 만일 이 32~34장의 본문이 없다면 우리는 그들이 정말 하나님께 순종해서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다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출애굽기의 메시지는 너희도 이렇게 잘 순종해라가 되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출애굽기가 보여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출애굽기가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런 것입니다. 이 성막이 도대체 왜 필요한지, 왜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적일 수 밖에 없는지, 왜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지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32~34장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잊혀질 수 없는 금송아지 숭배 사건입니다. 또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기본적인 교훈은 도대체 죄가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고 범죄 후의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가르쳐주는 죄의 해부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범죄의 시작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구원의 사건, 민족 해방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매일 매일 경험하고 살아온 이 백성이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을 배신하고 범죄에 빠져들게 되는가를 인간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홍해 사건, 만나 사건, 반석의 물 사건, 하나 하나 헤아릴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기적을 그들은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런 은혜를 받은 그들로 이 무서운 우상 숭배의 범죄에 빠져들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범죄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40일이 되어가는데 내려오지 않자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단지 모세에 대한 의심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었습니다. 의심은 불평이 되고 불평은 거센 항의가 되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때가 더디다고, 늦다고 판단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갔다는 사실을 그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모세에게 요청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못하게 하라고 부탁했습니다(출 20:18~19).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렇다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다 마치고 내려가라고 하실 때까지는 내려올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가 설령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고 칩시다.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안다면 어떻게 기다리지 않고 자신들의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까?

죄는 하나님 보다 자신들의 판단력을 더 신뢰할 때 일어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싸우는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시간입니다. 시간 때문에 우리는 초조해 하고 안달합니다. 세월을 살면 살수록 우리가 배우는 것은 신앙은 인내다 하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들이 그 시간을 결정하고 자기들의 방식으로 뭔가를 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행하는 행동은 근본적으로 불신앙으로 비롯된 것이기에 그 결과는 우상 숭배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들의 태도를 계속해서 보십시오. 두번째로 그들은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많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전제가 모세가 내려오는 것이 늦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때가 정확하지 않고 늦다는 결론을 가지고 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늦지도 않고 이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는 언제나 정확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때의 기준, 자기들의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일은 수없이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의 기준은 하나님, 그리고 그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느낌, 생각입니다. 이런 전제에서 그들이 모여서 회의를 해 보지만, 거기서 신앙적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론이 나올 리 만무합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모세도 하나님도 기다릴 수 없다. 우리를 인도할 신들, 우리를 위할 신들을 만들자.” 이것이 백성들이 모여서 아론 앞에 시위하면서 아론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2. 잘못된 기대
이것이 바로 죄가 발전하는 단계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의심이 불평이 되고, 불평이 여러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회의 끝에 결론을 내립니다. “조치를 취하자.” 물론 그 조치는 불신앙으로 시작된 우상 숭배입니다. 그들이 아론에게 와서 한 말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느니 알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에 대하여 가진 태도는 마땅히 주어야 할 존중과 존경은 최소화하고 부담과 책임을 최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고 기대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모세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불신앙이고 죄입니다. 그들은 인간을 잔뜩 높여놓고 그에게 지지 못할 짐을 지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반역을 행하지는 못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세운 사람에게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죄입니다.

3. 백성들의 뒤틀린 요구, 지도자의 죄
그래서 이들은 모였고 소위 아론에게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고 인간의 죄의 성향이 얼마나 교묘한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비단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저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종종 들어볼 수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아론에게 이렇게 접근했습니다. 모세를 대신해서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아론은 그들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죄입니다. 지도자의 죄 가운데서 무서운 것은 그들이 옳은 것, 진리의 기준을 따르는 대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분명히 백성들은 모여서 아론에게 왔고 분명한 요구를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우리 말 성경에는 ‘신’이라고 단수로 표현되어있지만, 본래는 복수로 쓰여 있습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여럿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 속에는 이미 유일하신 하나님을 버렸을 때, 여러 신들, 어떤 신이든지 자기들을 위하는 신이라면 상관없다는 사고가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론은 옳은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주권적으로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주권적으로 교회를 다스리는게 되고, 이것이 교회의 타락입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의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아니라, 뒤틀린 하나님,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들, 우리를 위하는 신들”이 필요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그들이 만들어낸 금송아지가 보여주는 신의 형상이 그대로 투영됩니다. 스프로울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소는 율법도 주지 않고 순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진노도, 정의도, 경외할 거룩함도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귀머거리고, 벙어리며,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사람들의 재밋거리를 방해할 수도 없었고,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 인간이 고안하고 인간이 실행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무용한 종교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을 자기들의 개념과 기호에 맞추어 재구성했습니다. 이것이 교회 역사상 꾸준히 고개를 들고 일어난 행동이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언제나 기독교였습니다. 백성들과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서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백성들은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아론은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고 공포했습니다. 리차드 니버라는 신학자는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추구하는 하나님을 이렇게 간결하게 지적했습니다. "죄없는 인간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심판없는 하나님 나라로 이끄시는 진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했던 금송아지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조국 교회 전반을 물들게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민 교회는 물론 예외가 아닙니다. 자유주의다, 보수다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이런 하나님, 이런 복음을 원하고 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하나님이 좋은 겁니다. 간섭하지 않는 신, 요구하지 않는 신, 공의가 아니라 사랑만 많은 신을 원합니다. 랍 벨(Rob Bell)이 쓴 책 제목처럼, 사랑이 이기는 신을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인간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에게 유익한 신입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신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원했고 아론에게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죄란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반복되는 일입니다.

4.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
백성들의 압력에 못 이긴 아론은 그들의 요구를 수용했습니다. 그는 옳은 것을 선택하는 대신,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금 귀고리를 다 빼서 가져오라”고 말입니다. 남자 어른만 60만이라고 할 때, 여성들과 자녀들이 했던 귀고리의 금만 해도 큰 송아지 형상 하나를 만들고도 남을만큼 많았습니다. 이 금 장신구들이 어디서 생겼습니까? 노예 생활을 하던 이 백성이 금을 모을 수 있었고 금 장식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요구하여 받게 하신 것이었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동안 애굽에서 무임으로 노동한 대가를 한꺼번에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지으라고 하시는 성막을 위해서 쓰여져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중에, 자기들을 위한 신의 형상, 곧 우상을 만들려고 그것을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으로 우상을 만들고 범죄하는데 그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금 장신구만이 아닙니다. 그들 중에 기술을 가진 사람들, 예술가들이 나서서 이 금송아지를 가장 멋지고 아름답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4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명하신 성막을 지어야 할 재능을 지금 우상을 만드는 일에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여러분의 것이 어느 것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소유입니까? 그것이 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소유하도록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신 것들입니다. 즉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여러분의 노력과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처럼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가 원하는 종교적 추구와 성향을 위해서 쓰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청지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돈, 건강, 시간, 여유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이며 언젠가는 그 주인 앞에서 여러분이 그것들을 가지고 어디에서 무엇을 위하여 썼는지 밝히셔야 하는 것입니다.

5. 계명을 범하는 것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금하신 것을 행하는 불순종입니다. 이것이 에덴 동산에서 최초의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본문에서 행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과 얼마 전에 십계명을 그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씀대로 지키겠다고 언약을 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이 일로 그들은 십계명의 일계명과 이계명을 모두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구했고, 그들은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들이 소의 형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애굽에서 보았고 혹은 섬겼을 우상을 아직도 그들의 마음 속에서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형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행동으로써 그들 마음 중심에 있는 것을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고 있지 않으면 뭔가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상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노골적으로 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 본문의 어느 한 구석에서도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자거나 하나님께 반역을 하자고 한 말은 안 나옵니다. 우리의 죄악도 언제나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계명의 가장 근본이 되는 일계명과 이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이지요.

6. 혼합주의와 예배의 타락
이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죄의 해부학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것은 예배의 타락입니다. 죄는 언제나 예배를 무너뜨립니다. 오늘 본문 5절과 6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예배를 묘사해줍니다.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든 후, 그 앞에 예배를 위한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공포했습니다. “내일은 여호와의 절기다.” 백성들은 오랜만에 활기가 넘쳤습니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렸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금송아지 앞에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앉아서 먹고 마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을 부르셔서 함께 먹고 마시게 하신 일과 흡사합니다(출 24:11). 번제와 화목제 뿐 아니라, 예배의 거의 모든 형식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들을 담고 있거나 모방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론이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명명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백성들은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라고 했다면, 아론은 그 말을 받아서 “이는 여호와의 절기다”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의 말은 계속해서 신들이라고 복수로 사용함으로써 자기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도 저도 다 하나님인 것입니다. 편하지요. 어느 하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혼합주의입니다. 이름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형식과 내용도 거의 흡사합니다. 그러나 6절 뒤에 보십시오. “일어나서 뛰놀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이교적인 제사 형식이었습니다. 많은 성경 학자들이 이것이 집단 성적 행위들을 포함하는 것이라는데 동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이 원하는 신을 만드는 결과는 이런 수치스러운 부도덕으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경외할 하나님도, 그들에게 어떤 기준을 제시하시고 요구하시는 하나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도 “우린 지금 우상을 섬기는게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금송아지는 금송아지였고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아피스(Apis)에 불과했으며 그 백성의 죄성과 탐욕 그리고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심중에 없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 추구하는 것, 탐심의 만족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배가 타락하는 현상도 이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정하신 예배의 방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더 짜릿하게 느끼고 감정이 움직이고 하는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를 기준으로 예배를 조정합니다. 이것이 범죄이고 타락입니다.

7. 마음을 과대평가하지 말라.
종교개혁자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말한대로,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이것이 성경이 보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큰 은혜를 경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은혜는 실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살 수 없기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은 믿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언제라도 인간의 마음은 교묘하고 교활하고 거짓되게 여러분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고,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에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백성이 율법을 받았지만, 율법을 지킬 능력이 그들 안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들이 지키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했지만 말입니다. 이것이 딜레마입니다. 지극히 신령하고 선한 율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뜨릴 뿐,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딜레마를 성경은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8.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비난하고 정죄할 위치에 서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지르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들이 했던 그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지킬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을 온전하게 지켜주실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고 범죄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복음을 주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출애굽기의 흐름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들을 아셨기에 먼저 모세를 산으로 부르셔서 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성막은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 죄인들에게 찾아오시는 복음을 보여줍니다. 성막은 어떻게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임재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성막은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그들의 범죄가 일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이미 세우셨고 지시하셨습니다. 필립 라이큰은 이렇게 썼습니다. “은혜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다.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은혜로 우리는 우리 방식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할 수 있다. 은혜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에도 옳은 것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다. 그리고 은혜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행하신 일,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하시려고 살아나신 그 일을 결코 잊지 않는다.” 우리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받지만 넘어지고, 결심을 하지만 실패하는 우리들은 넘어지지 않으시고 실패하지 않으시며 완벽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신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하기 전에 모든 일을 완벽하게 준비하셨고 제공하셨습니다. 창세 전에,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범죄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복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