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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76) - 중보자 모세

출애굽기 32:7-14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6-15

말씀내용
<중보자 모세> 출 32:7~14



1. 심판하시는 하나님
본문은 오해해서 읽히는 대표적인 본문 중 하나입니다. 그 오해는 하나님은 벌하시려고 하는 모진 하나님이고, 모세는 자비가 넘치는 중보자다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때, 이것처럼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는 처사도 없습니다. 특히 이것을 모세가 썼다고 할 때, 그런 의도로 모세가 썼다면 이것은 모세교이지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후일에 "봐라. 너희가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내 덕인 줄 알아라"하는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이 대화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무력한 뒷방 할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도신경에서 모든 기독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심판주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요 5:22). 그러나 주님의 심판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시는 의로운 심판입니다(요 5:30). 교회사를 보면 자유주의 신학이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시작되고 이후 현대 신학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어떤 경향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개념을 성경에서 지우려는 시도였습니다. 작년에 나온 랍 벨(Rob Bell)의 "사랑이 이긴다"는 책은 오늘날 복음주의에 그 영향이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참 읽기 힘든 본문이 되거나 설교되지 않는 본문입니다. 하나님을 변호해 드려야 되는데, 이 본문에서는 참 쉽지가 않은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는 것일까요?

2. ‘이 백성’: 목이 곧은 백성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 중 걸리는 게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아시고 자기 장자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은 '네 백성'이라고 하시고 '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금송아지 숭배 사건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반역이었으며 그들 자신이 다른 신을, 혹 하나님을 자기 방식대로 섬기는 행위였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결코 섬김과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부르시는 것은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가리켜 '이 모세'라고 부른 것을 들으시고 당신의 종을 변호하시듯이 '이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들이 '속히' 하나님이 명하신 길을 떠났다고 하십니다(8). 참 이상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1절에서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뎌서' 뭔가를 해야한다고 말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계산과 사람의 시간계산이 이렇게도 다릅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은 것을 잊지말라고 베드로 사도가 권면한 것은 참 중요합니다(벧후 3:8).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늘 시간을 가지고 싸웁니다. 빠른 경우는 거의 없고 늘 느리다, 더디다고 말합니다. 이때 믿음이 필요하지요. 원하는 일이 생각보다 일찍 해결되면 우리는 다 감사하다고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건 쉽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 믿음을 써야 할 때는 더디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속히' 떠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은 이 백성이 부패했고 목이 곧다고 하십니다. 목이 곧다는 말은 구약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말인데, 여기서 처음 나옵니다. 그것은 선지자들의 입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온 표현입니다. 목이 곧다는 말을 우리도 종종 쓰기는 합니다마는, 참 무서운 표현인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목이 곧다는 것은 소에게 멍에를 씌울 때 목을 숙여서 멍에를 메야 하는데 목을 꼿꼿이 들고 있어서 멍에을 씌울 수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 순종의 멍에를 메려면(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고개를 숙여야 하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 없지요. 주님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멍에는 고개를 숙이고 철저한 순종을 견지하는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순종하는 사람, 순종을 배운 사람입니다. 순종의 덕목 처럼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치명적인 덕목도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순종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에 속합니다. 무엇에 대한 순종입니까?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절대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를 하나님은 불순종이라고 지적하고 계시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라고 하십니다(8). 목이 곧은 것은 배우지 않는 마음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안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모르지만 말입니다.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주는 바가 있음에도 말이지요. 그는 고집스러울만큼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는 영적 지도자와 경건한 사람들의 조언을 듣지 않습니다. 고침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배워도 참된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도, 성장하지도 않습니다(딤후 3:7). 그런데 자신은 그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기 뜻을 굽혀 완전한 복종을 배울 때까지 그것은 고쳐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옛 자아가 바로 곧은 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곧은 목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온전한 복종을 통해서만 이 곧은 목을 부드러워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볼 일입니다. 항상 배웁니다. 오래 배웠습니다. 그런데 내가 순종하고 있습니까?

3. 왜 "나대로 하게 하라"고 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10절에 "나대로 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심판을 행하시겠다는 것이지요. 다 죽이고 모세를 위해서 한 민족을 세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해석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나대로 하게 하라." 아니, 하나님이 하나님이신데 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의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모세와 의논하셔야 할 분이십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의논상대가 됩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이렇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치 모세의 허락을 구하는 것 처럼 보이는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것이었다면 여지가 있을 수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7). 심판을 하실 것이라면 왜 내려가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왜 '네 백성'이라고 처음에 운을 떼셨을까요(7)? 그리고 모세에게 큰 나라를 주시겠다는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10)? 이것은 모세에게는 하나의 시험이 아닙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이제 이 심판을 막을 자는 너 밖에 없다. 네가 어떻게 할 것이냐?"하는 부담입니다. "나는 네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무서운 심판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나와 백성 사이에 중재자는 너 밖에 없다"고 하시는 것이지요.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바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중보자로서 모세가 예수님을 잘 보여주는 부분은 없습니다. 길은 하나입니다. 모세가 길입니다. 이 본문에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자비를 모르는 하나님이고 중보자 모세는 자비로왔다는 식, 소위 자기의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최악의 결과를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곳곳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의 힌트를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 이제 네가 중보자가 되어라. 그것이 내가 지금 네게 원하는 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14절에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신"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심판하시려고 했다가 자비가 많은 모세의 간청에 설득되셔서 계획을 변경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생각하고 바라셨던대로 모세의 중보를 통해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바르게 읽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부패한 인간에게 "너희는 모세 말고, 진짜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4. 중보자 모세
정말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모세의 모습입니다. 이것처럼 한 인간이 우리의 중보자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잘 드러낼 수가 있을까요? 그는 제일 먼저 자기 야심을 추구할 것인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킬 것인지에 대한 유혹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큰 나라를 만들어주시겠다는 야심찬 제안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중보자는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모세가 중보자로서 제일 먼저 맞닥드려야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야심찬' 제안에 동의했다면, 그는 결코 중보자가 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을 이 백성들과 동일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보자로서 모세를 오해하게 되는 또 하나의 함정을 만나게 되는데, 모세가 자비가 많아서 자기에게는 이 백성이 저지른 죄악이 큰 문제가 되지 않거나 벌써 다 용서한 일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이 백성을 좀 봐달라고, 용서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백성이 괜찮은 면도 많습니다"라거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은 형평성에 맞지 않고 좀 심하신 것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죄를 축소시키지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제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백성의 죄의 현실을 인정합니다. 이 기초 위에서 중보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논쟁을 해서 하나님을 설득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변경시키는데 성공한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의 계획 속에 그 백성을 향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실 것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 일에는 반드시 중보자가 개입되어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모세를 그 계획 속에 집어넣으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중보자로서 먼저 "이 백성이 제 백성이 아니라 원래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까?"하는 논지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11). 전체 논지가 그러합니다. 모세는 이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장자'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출 4:22).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구원의 사건을 가지고 그는 나갑니다. 모세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그가 바르게 알고 있는 진리를 대변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끝마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을 능력이 없으시거나 변덕스러우셔서 중간에 미완성으로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을 완전하게 마치셨고 제칠일에 안식하셨습니다. 안식은 노동과 행위의 완성을 기념하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어떤 부족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 놀라운 이적과 기사로 출애굽시키셨는데, 이제 와서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며, 결국 완성의 자리에 인도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구원의 사건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멸하지 마셔야 할 이유로 하나님의 영예를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지금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세는 자기 마음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영예에 대한 마음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가 조정할(manipulate) 수 있는 분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가령,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도 별 수 없이 들어주신다"거나 하는 천박한 가르침들입니다. 기도가 그저 말입니까? 사람에게는 통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의 마음 중심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말로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습니까? 모세는 그런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영예가 그토록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야욕과 이기적 욕심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야심찬' 계획을 받아들이는 대신, 하나님의 영예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택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의도와 동기와 목적을 의심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이 오해를 받게 되고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성공도, 자신의 명예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영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이것이 중보자로 서는 자의 마음이고 목적이고 소원이고 모든 것입니다. 모세는 이 점에서 너무나도 놀랍게 그리스도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시면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리기를 구하셨습니다(요 17:1,4). 중보자이신 주님이 언제나 염두에 두신 것, 아니 십자가를 지기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아버지의 영화로운 이름이었습니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 타협할 수 없는 최우선의 신자의 기도제목이고 소원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모세는 중보자의 그림자로서 지금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런 마음을 주십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을 알고 살아오는 동안 그런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시는 것입니까? 마지막으로 모세가 중보자로 서서 하나님께 자비를 호소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언약입니다. 13절을 봅니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을 모세가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바로 이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알리셨습니다(출 3:6,15). 그리고 언제나 신실하셔서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다는 것을 모세는 압니다(딤후 2:13). 구약의 모든 뛰어난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자신들의 마땅한 자격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구원을 요청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예를 구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조금만 주의깊게 읽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자기 자신을 부패한 백성과 동일시하면서 중보자로 서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14절은 모세의 이 중보 사역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본래의 계획을 완전하게 이루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셨고, 중보자를 통해서 그리 하신 것입니다.

5. 모세와 우리 유일한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
모세에게 이 사건은 참 중요한 생애적 경험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광야교회의 이백만이 넘는 부패한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확립하게 하는 자기 정체성을 얻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부패한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놀라울 정도로 잘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광야 40년의 거의 막바지에 와서 중보자로서 실패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민수기 20장의 므리바 사건에서 보게 됩니다. 그는 탁월한 중보자로서 40년의 고역을 잘 감당했지만, 마지막에 실패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드러내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죄인과 동일시되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다 받으셨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아버지께서 당신께 주신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7:2,6). "네 백성이다"하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백성'이라고 하신 것이 마치 성자 하나님께 그 부패한 백성을 주신 것과 같이 모세가 중보자의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려는 의도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바로 부패한 백성이고, 우리가 바로 목이 곧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린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중보자가 없이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려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것이었다면 모세에게 내려가라고 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임을 우리는 이미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생자에게 내려가라고 하셨고 독생성자 예수님은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그 중보를 자처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놀랍게 그리스도를 드러내줍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본문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 특별히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모세가 했던 방식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의심치 않고 하나님의 이름과 영예를 알고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기도하는 어느 누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언약과 행하신 일과 이름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를 이런 자리에 서게 하십니다. 바울 사도도 자기 동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에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동족 유대인을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믿지 않는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의 불신 가족들을 위해서, 우리의 아는 불신 친구들을 위해서, 우리가 보지도 알지도 못한 사람들과 민족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고, 얼마나 중요하게 보시는지를 본문은 가르쳐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하신 일을 보십시오. 중보는 한 분이시니 유일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우리 구주께서 서셨던 자리에, 모세처럼, 바울처럼 부름을 받아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땅을 사는 동안 영광스러운 부르심임을 알고 여러분의 기도의 지경을 넓혀가시는 은혜를 입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