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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77) - 하나님 편에 서는 자

출애굽기 32:15-35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6-22

말씀내용
<하나님 편에 서는 자> 출 32:15~35



1.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성경을 읽을 때 종종 잘못 읽을 수 있는 실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세와 아론과 백성들입니다. 모세는 십계명 돌판을 깨뜨리고 죄를 심문하고 무서운 징벌을 행합니다. 범죄한 아론과 백성들은 모세를 대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본문을 헛되이 읽는 것입니다. 모세가 좀 지나치다고 읽으면 이 본문에서 일어나는 일이 상대적인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놓치고 사람들의 이야기로 잃게 되면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절대적인 의, 절대적 기준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모세가 산에서 십계명 두 돌판을 손에 들고 내려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백성들과 지도자 아론은 모세를 대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본문이 가르쳐주는 것은 그들이 대면해야 했던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손에 들고 내려온 십계명 돌판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성경은 그 돌판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한 설명을 해줍니다. 그것은 판 양면에 글자가 써있고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돌판이며 글자도 하나님이 써서 판에 새겨주신 것이었습니다(15~16). 이 말을 자세히 쓰는 것은 지금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는 기준은 모세의 기분이나 원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에 직접 써서 새겨주신 십계명 즉 하나님의 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그들은 대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산에 올라간 40일 동안 산 중턱에서 모세를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모세가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여호수아는 다시 모세를 수행했습니다. 여호수아라는 인물을 이해하는데 이런 대목은 참 중요합니다. 그는 범죄하던 백성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는 모세를 40일 동안 산중턱에서 기다리는 신실함과 충성스러움을 지나가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자신은 지금 산 아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아래로 내려오면서 백성들의 소리를 듣게 되는데, 여호수아는 ‘싸우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이것은 그들끼리 싸우는 소리가 아니라 전쟁하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뛰어난 군사적 지도자였던 여호수아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틀린 판단이었습니다. 모세는 승전가도 패전가도 아니라 노래하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광란의 파티를 하는 소리였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진에 가까이 이르러 눈 앞에 일어나는 광경을 본 모세가 한 행동을 성경은 분명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노했고, 손에 들고 있던 십계명의 두 돌판을 던져 깨뜨렸습니다! 적잖은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당황하기 쉽습니다. 모세의 큰 격노, 그래서 손에 들고 있던 것이 다른 것도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써서 주신 십계명 돌판인데 그것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린 이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합니다. 일단 화내는 것은 모든 잘잘못을 떠나 매우 죄질이 나쁜 악덕으로 해석되는 오늘날의 시대 정신으로 이 본문을 읽으면 모세는 인내심이 부족한 지도자, 리더십 자질이 부재한 지도자입니다. 모세가 화를 낸 것도 그렇지만, 그가 돌판을 던져 깨뜨린 것은 합당하고 정당한 행동입니까? 모세가 므리바에서 백성들에게 분노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책망하시고 그 일로 인하여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대목에서 하나님은 그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게다가 여기 모세가 대노했다고 한 단어는 하나님께서 앞서 모세에게 “내가 그들에게 진노”했다고 말씀하실 때 쓰신 것과 동일한 단어입니다(10).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하신대로 준행하겠다고 말씀드림으로써 언약을 맺었었습니다. 그런데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김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린 것입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깨뜨린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한 짓이 어떤 일이었는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가질만한 존재가 못됨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동인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면하고 있는 것은 모세가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을 대면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다루고 계시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우리의 범죄와 우상 숭배 특별히 개인적 차원을 넘어 교회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사건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여줍니다.

2. 죄는 다루어져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에게 화를 내리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거두셨습니다(14).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죄는 반드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어물쩍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우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는 반드시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리고 주님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날 우리는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정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역시 우리에게 그것을 충분하게 가르쳐줍니다. 모세는 먼저 백성들을 다루는데, 금송아지를 불에 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든 후,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이 마시게 하였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했는지 우리는 정확하고 세세한 이유를 확정적 태도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가루로 만들었다는 것은 재생 불가능할 만큼 산산조각을 낸 것이고, 마시게 한 것은 아마도 우상 숭배의 쓴 결과를 너희가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제 지도자 아론에게 향합니다. 아론에게 모세가 하는 말은 아론 자신이 백성으로부터 받았던 위협과 압력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21)?” 사실, 이렇게 반말로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마는, 개역 성경을 번역하신 분들이 모세의 권위의 입장에서 번역을 한 것입니다. 모세의 이 말에는 아론이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죄를 범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며 백성들이 아론을 부추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백성들을 큰 죄에 빠지게 한 책임은 지도자인 아론에게 있음도 보여줍니다. 비록 아론이 그의 형이지만, 죄는 다루어져야 했습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다루어져야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존재에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3. 변명
아론의 대답은 참 놀랍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어떤 태도로 반응하는지를 잘 대변해줍니다.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시나이다”라고 아론은 먼저 말했습니다. 아론이 했어야 하는 대답은 “제가 범죄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인 저의 책임입니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모세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전형적으로 오늘날 우리 시대에 지배적인 정신을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매우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들을 들려줍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은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더 이상 무서울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냅니다. 주님 자신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격노하시면서 “화있을진저”라고 저주하셨고, 성전에 들어가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을 채찍을 들어 내어쫓으셨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화내는 것이 잘잘못을 넘어 악덕이 되어버린 시대에 이런 본문들을 대하기는 매우 어렵고, 어떻게든 예수님과 선지자, 사도들을 변호해야 한다고 느끼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아론은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는 모세의 화내는 것으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있는 일입니다. 또 아론은 아담이 범죄 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합니다. 자신은 그냥 주길래 먹은 것 밖에는 없다는 태도입니다. 죄에 대해서 인간이 취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의 전가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을 사건의 희생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론은 ‘백성이 악해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부모 때문에’, ‘사랑을 충분히 받지 않아서’, ‘남편이 못나서’, ‘목사가 안 가르쳐서’ 뭐, 할 수 있는 한 모든 핑계와 전가를 동원합니다. 지금 아론이 하고 있는 일이 이것입니다. 그는 백성의 악함에 호소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23절을 주의깊게 읽어보십시오. 아론이 무엇을 극대화하고 무엇을 최소화하고 있습니까? 그는 백성들이 한 일에 대해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만큼 하나님께서 보시고 모세에게 설명해 주신대로 설명합니다. 1절과 거의 흡사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고 완벽하게 축소시키고 생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32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산 아래서 일어난 일을 모세에게 설명하시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진실 그대로입니다. 1절은 백성이 아론에게 한 일이고, 2~6절은 모두 아론이 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론은 24절 한 줄에 자기가 한 일을 축소합니다. 여기에 자기 자신은 쏙 빠져있습니다. 자신은 백성에게 금을 가져오라고 한 것 그리고 그 금을 불에 던진 것 밖에 없습니다. 금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든 것은 말하자면 불입니다. 불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죄는 수동적으로 저질러 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짓고 범하는 것입니다. 죄는 불이 우상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저지르는 일입니다. 성경이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을 가르칩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자백하는 것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반응입니다. 여러분이 죄의 희생자라는 거짓된 의식 속에 자신을 속이는 일을 경계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억울하지 마십시오. 억울함이라는 핑계 속에 여러분의 죄성과 죄악을 숨기려는 태도를 경계하셔야 합니다.

4.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된 교회
광야교회가 지금 처한 형편을 보여주는 말이 25절입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마치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처해있는 형편이 바로 이런 형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방자함이라는 말의 본 뜻은 부끄러움이 없이 벗어 제끼는 풀어진 도덕적 상태를 말합니다. 직접적으로 이 단어를 모세가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의 우상숭배 행위가 성적인 난잡함을 가졌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오늘날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때때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는 말과 행실을 보면 교회는 부끄러움이라는 감각을 상실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초래하는 결과는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방자하게 행하면, 경건하게 사는 일에 실패하면 언제나 찾아오는 결과는 원수에게 혹은 세상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면의 뉴스들에서 교회가 관련된 것들을 찾아 보십시오. 십중 팔구 교회가 원수에게 어떻게 조롱거리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방자함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5. 하나님 편에 서는 자
자, 이제 모세가 취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이런 상태로 붕괴된 교회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여러분, 죄는 용서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의 결과를 우리가 인생을 통해서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죄용서는 죄의 결과를 감당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심각한 죄의 문제를 다루셨습니다. 물론 모세에게 말씀하신대로 그 백성 전부를 멸해버리시지는 않으셨지만 말입니다. 모세가 진문에 서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말했습니다. 백성들이 범죄한 이 마당에 과연 하나님의 편에 설 자는 나오라는 이 말에 반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레위 자손이 다 모여서 모세에게 나아왔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가장 놀랍습니다. 과연 무엇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고 느끼게 만들었을지 궁금합니다. 모세가 던져 깨뜨린 십계명의 돌판을 보았고, 금송아지 가루를 마시는 것, 아론에 대한 모세의 무서운 책망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편에 선다는 것은 자신들의 죄악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죄하는 은혜를 바라며 이 죄악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늘 이 요구를 받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물으시고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이편도 저편도 아닌 평화주의자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도록 요구받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기를 결단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범죄의 자리에 여전히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용기와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어려운 문제로 들어가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편에 서기로 결단하고 자신에게 나아온 레위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문에서 저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요구를 할 줄 알았으면 나서지 않았을텐데라고 후회했을까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요구를 지금 모세는 하고 있습니다. 과거 70년대 후반 크메르의 킬링필드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을 폴 포트가 아닌 모세가 명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명령이 모세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하셨느니라.” 이 명령은 모세의 분노로 야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이 명령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판단하고 실행할 것인지 아닌지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순종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이 타당한지, 옳고 그른지의 여부 조차 우리 자신이 판단하려고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의 이성이 의와 불의를 결정하는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의의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옳고 그름,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하셔야 하는지 조차 자신들이 판단해서 요구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소위 복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려면 지옥은 없어야 한다. 죄인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용서하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창조주이고 그들이 심판주이며 그들이 메시야 자신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판 신성모독인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삼천 명의 동족을 칼로 죽였습니다. 생각 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성경에 기록되었고 하나님이 친히 명령하신 일이라는 것은 놀랍습니다. 죽임을 당한 이들은 레위 사람들의 형제, 친구, 이웃들이었습니다.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자세한 설명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마는, 죽임을 당한 이들은 십중 팔구 이 죄악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을 사람들이었고 여전히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거의 생각하지도 보지도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본래 이 백성이 저지른 일은 그들 자신이 다 한 순간에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누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진멸되었어야 하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성인 남자의 수만 60만명이었습니다. 죽은 삼천명은 그 수의 0.5%에 불과합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자비가 전체 백성들에게 베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수 있는 일을 이렇게 하나님의 편에 서기로 결단한 사람들의 손을 빌어 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런 일은 하나님이 직접 하셔야 할 일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 않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원하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맺는 그 어떤 관계에 우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여러분,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나가려면, 아니, 하나님의 편에 서려면 이것을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6. 중보자 모세의 한계: 우리의 유일한 중보 그리스도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모세는 이튿날 백성에게 죄를 속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다시 올라가노라 말합니다(30).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 됐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삼천 명이 죽었는데도 죄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겁니다. 죄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우리는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세는 죄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다시 올라갔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지우시더라도 백성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간청하고 간청합니다(32). 거의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중보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하나님이 이 모세의 기도에 감동을 받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33).” 이 대답이 너무나 저를 당황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우리를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은 결코 모세의 영웅적 헌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이 기도를 통해서 놀랍게도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대속의 개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문제였습니다. 모세는 그 백성을 위한 대속의 자리에 설 마땅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그 자신이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로 죽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를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는 합당한 제물이 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런 점에서 성경 역사와 교회 역사에 그 어떤 인물 보다도 놀랍게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대속의 조건을 채울 수 없는 부족한 중보자였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는 부족한 중보자로서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7. 하나님의 말씀의 칼과 교회의 거룩
우리는 지금 광야교회의 탄생 이야기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지나간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사건이나 개개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우상숭배의 사건에 대해서 모세 시대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새언약 아래서도 여전히 교회에 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말씀의 칼입니다. 이것은 칼빈은 교회가 가지는 권징의 영적 권리라고 설명했습니다. 교회는 우상숭배와 드러난 범죄에 대해서 그 칼을 써야 하고 죄를 다루어야 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죄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날에 다루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를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철저하게 다루시는지를 배우십시오. 삼천명의 죽은 사람이 아니라, 백성의 죄를 위해서 자기를 대신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기도하는 모세에게서가 아니라, 우리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손에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고 수치와 고통 속에서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으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죄의 무서움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시지 않으십니다. 죄는 회개하면 문제없다고 누가 가르치고 말합니까? 죄의 결과를 감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하신 것을 아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는 뜻을 아십시오. 여기에 우리의 뜻, 우리의 판단,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의 편에 서십시오. 하나님의 편에 설 분이 누구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편에 서시겠습니까? 사는 동안에 이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