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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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78) - 하나님의 부재와 하나님의 임재

출애굽기 33:1-11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6-29

말씀내용
<하나님의 부재와 하나님의 임재> 출 33:1~11



1.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관점에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 가운데서 제일 무서운 상황을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필요한 돈이 없을 때입니까?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자신의 옆에 배우자가 없어 외로운 것입니까? 친구들이 많지 않은 것입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무서운 상황은 하나님의 부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섬긴 목이 곧은 백성들과 그들의 우상숭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사실상 그 우상숭배를 범한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죽이셔야 만족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32장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간단히 넘어갈 수 없는 문제며, 철저하게 다루어져야만 하는지를 조금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편에 서겠다고 나온 레위 사람들을 통하여 형제, 친구, 이웃을 가리지 않고 삼천명을 살륙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도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백성들의 죄를 속하려고 자신이 저주를 받는 것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32:35에는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의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명확하게 하나님이 백성을 치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한 번 더 하나님께서 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어쩐 재앙이나 전염병 같은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에게 주시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요지는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너희와 함께 가다가는 참지 못하고 너희를 다 전멸시킬 것 같으니 내가 너희를 데리고 가지 않고 천사 하나를 보내어 너희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안 간다”가 강조입니다. 그 대신 “한 천사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은 지키시겠다고 하십니다.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지키실 것입니다. 2절과 3절의 앞부분 만으로 보면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이제는 죄 문제가 다 해결되었는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요지는 3절 뒷부분과 5절이 보여줍니다. 목이 곧은 백성을 다 진멸시킬까봐 하나님은 함께 가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멈추어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아니 거의 알지 못한다고 말씀드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왜 하나님이 이렇게 까다롭고 거칠게 대하시는가 질문을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입니다. 그 거룩은 죄를 참아 보실 수 없는 거룩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때로는 되지도 않는 개념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관점에서 죄를 볼 때 사람은 회개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행하시는 은혜로운 역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개념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를 볼 때만 우리는 그 죄에 대해서 합당한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그 합당한 반응은 회개입니다.

2.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재앙이다.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하신 것, 하나님께서 “내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신 이 말씀의 의미를 좀 더 살펴봅시다. 이것은 사실상 백성들이 원했던 것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했던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를 인도할 신들”이 그들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냐, 모세냐 하는 문제는 사실상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서 속히 이 지긋지긋한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 땅에 이르는 것이 바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역사상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수도 없이 목격했고, 광야 호렙산에서 벌써 몇 달째를 보내면서 하나님의 친히 주시는 음성도 들었으며 그들 중 아론과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 올라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신 놀라운 경험까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은 바로 이 말,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아론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고 성공과 성취와 부 그리고 안락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약속을 했으니 그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주겠다고 하십니다. 모세의 기도에 대해서 약속하신대로 그 백성을 진멸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시고 그저 한 천사를 보내서 그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공, 성취, 부 그리고 안락함입니다.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의식하기까지는 결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쓰레기를 황금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진짜 쓰레기냐, 황금이냐 하는 문제는 하나님을 만날 때 확인이 됩니다. 거짓의 아비 마귀는 일평생 우리를 쓰레기를 얻기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다 허비하게 만듦으로써 개가를 부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하는 하나, 여전히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 밖에는 내가 구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내가 아직도 진정한 의미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거나 지금 내 믿음의 눈이 감겨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못 만났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누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왜 그들은 쓰레기를 주어담고 있는 것입니까? 사실, 이것이야말로 큰 싸움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만났다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삶의 싸움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느냐, 세상을 보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구약의 이 위대한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맛보고 누렸는데도 금송아지를 섬겼고,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추구했고, 결국 하나님의 부재 상황을 그들 스스로가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들 스스로가 쫓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굳이 같이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성공만 주십시오. 물질만 좀 넉넉히 누리게 해주십시오.”라고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말한 의도였다는 것을 하나님은 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문제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와 같이 가지 않겠다. 그러나 너희가 원하고 원하는 성공은 허락하마. 한 천사를 보내서 그것을 주마.”

보통 구약 성경에서 ‘사자’라고 할 때 천사를 일컫기도 하는데, 많은 경우에 성육신하기 전의 성자 하나님께서 현현하시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자’는 그냥 ‘한 사자’, ‘한 천사’로서 그 이름도 하나님은 지정하시지 않으시고 그냥 아무 천사나 보내시겠다는 뉘앙스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14:19과 이 구절을 비교해보십시다.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홍해를 가르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과 구별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사자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와 동일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사자가 바로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조심스레 확인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자와 당신 자신의 임재를 뚜렷하게 구별하고 계십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오해하지 않도록 충분히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가 얼마나 성경을 오해하고 자기 멋대로 읽는가 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설교자들과 교인들은 마치 이 성경,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모호해서 아무데나 자기 편한대로 갖다 붙여서 쓸 수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가시지 않습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성공을 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여전히 금송아지라는 우상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처럼 무서운게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경건하게, 그리고 어느 누구도 쫓아올 수 없는 열심으로 철야하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금송아지라는 우상을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도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처럼 먹고 사는 문제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다 아시고 구하지 않아도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을 구하는 것, 가령,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구해야만 주신다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이 모든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압니다라는 고백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매일 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그 기도가 몇번째에 있으며 그 앞에 있는 중요한 기도의 제목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주님은 이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의 우선순위는 무엇을 반영합니까?

시편 106:15을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시인은 광야교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구한 것을 주시는가 주시지 않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문제의 핵심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며,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성공 즉 얻고 싶은 것을 얻는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이 문제를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우리의 관심은 과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의중을 알고 제대로 반응을 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없더라도’ 자신들이 이룰 수 있는 성공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3. 백성들의 반응: 회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4절은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라고 백성들의 반응을 알려줍니다. 레위 사람들이 3000명을 죽일 때에도 이렇다 할 백성들의 반응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내란이 벌어질만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회개했다는 말은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구약 시대에 단장품을 제하는 것은 슬픔과 회개의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으니 잘 됐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슬퍼했고 단장품을 제하였습니다(4,6).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무서운 일인지를 드디어 백성들은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회개는 죄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일어나고 있는지를 제대로 깨닫기 시작할 때 일어납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회개를 인도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죄가 3000명을 죽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고, 사실상 그리스도인은 나의 죄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아 저주하시고 죄에 대한 진노를 다 발하시고 심판하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단초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단순히 세상에서 얻어 맞고 실패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에서 얻어 맞고 실패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멋대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성공하고 부를 얻으며 권세를 누리다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야말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은 사람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리고 그 백성의 죄를 반드시 다루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더딜지라도 이렇게 회개로 반응을 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할지를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본문은 5절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회개가 가짜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순종했습니다.

4. 모세의 반응
모세는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당연히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이미 한 번의 테스트를 경험한 모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진멸하고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이 테스트를 통과했었습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멸하지 않으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모세가 우려하였던 바 애굽 사람들로부터 얻게 될지도 모를 수욕을 제거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조치는 모세가 구한 것을 들어주셨고 모세가 우려하던 바도 해결하신 조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모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7~11절은 모세가 늘 하던 어떤 습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나와 시내산에 도착한 후부터 모세가 하던 일종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장막을 이스라엘 회중의 진영 밖에 치고는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곤 하였습니다. 그 장막의 이름을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 하여 ‘회막’이라고 붙였습니다. 물론 이 회막은 세워지게 될 성막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가 이 회막을 진 밖 먼 곳에 쳤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성막을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의 정중앙에 세울 것을 명하시고 거기에 임재하실 때까지,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회막을 진 밖에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들에 대한 어떤 오해나 착각도 불식시키는 행동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 이상을 본문은 말해줍니다. 말하자면, 7~11절은 이제 12절 이하에 모세가 회막에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 무엇을 구하는가 하는 그의 기도의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서 잠깐 나오는 배경설명이자, 또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회개와 모세의 기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7절 하반절에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라는 말씀을 봅니다. 이들은 성공을 원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들도 이 금송아지 숭배의 죄악에 가담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마는, 그랬다면 그들은 잠시 믿음의 눈이 감기워지고 어두워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세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앙모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이 본문은 설명합니다. 특히 모세가 기도하러 회막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 백성들은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까지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그 회막에 구름 기둥이 내리는 것을 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모세와 만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설명이 필요한 것은 모세는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십계명을 받고 성막에 대한 지침을 받은 것 뿐 아니라, 그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있던 백성들 역시 다 일어나 장막문에 서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모세는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11절 상반절은 모세가 하나님과 가졌던 친밀한 관계에 대해서 놀라운 진술을 합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붙여진 적이 없는 설명입니다. 모세는 친구가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은 있으나 이런 표현은 유독 모세에게만 주어진 표현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해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한 바는 있습니다(사 41:8; 약 2:23). 모세는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여호수아에 대해서 다시 잠깐 언급합니다.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호수아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앙모하는 사람이었다고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모세 뿐 아니라, 여호수아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앙모하는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맛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 백성을 인도하시지 않겠다고 하시는 상황을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님 없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모세는 이것이 저주임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없는 성공이 심판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 맛본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성공이 저주요, 심판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의 부재 보다 무서운 상황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압니다.

5. 하나님의 임재가 최상의 축복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5~26).” 여러분에게도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부자가 될 것이라고, 성공할 것이라고, 떵떵거리고 살 것이라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귀가 따갑도록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셔서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이고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게 한다고 약속하십니다. 심지어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신자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입니다.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부재는 저주요 심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친구가 친구와 말하듯 대면하여 말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친밀함을 하나님과 가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친구와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이 믿는 자 안에 거하신다는 이 약속 말입니다. 그리고 결코 하나님의 자녀의 어떠한 죄도, 심지어 금송아지를 백 마리를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 죄악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떠나게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 약속은 그만큼 신실하고 분명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는 회막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회막을 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성막도 우리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시고 임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그 영광,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봅니다.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충만한 은혜와 진리입니다. 인자와 공의입니다. 모세는 친구가 친구와 이야기하듯 하나님을 만났지만, 그리고 앞으로 보겠지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했고 그 영광을 힐끗 보았지만, 사도 요한은 성령의 영감으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말합니다(요 1:18). 그러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믿는 자 안에 거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가졌던 친밀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이상을 보장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것을 누리는 길은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하나님을 바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상을 섬기는 한, 여러분은 비록 거듭났을지라도, 비록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결코 누리거나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떠나시지 않으신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보다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복음 안에 계시하여 주신 그 모든 진리를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이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말할 수 없는 친밀함을 누리기에 행복하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얻고 싶은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시 105:3).” 이 복된 말씀을 기억하고 주께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