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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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79) -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출애굽기 33:7-11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7-06

말씀내용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출 33:7~11

[내려받기]


하나님을 섬기려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은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일하실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에 대한 매우 중요한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1. 캠페인이나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살고, 수많은 조직에 속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체질에 익숙해지고 습득하게 되는 원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하려고 하면, 어떤 아이디어가 있으면, 더구나 사람들을 움직여서 해야 하는 일이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캠페인을 벌이거나 어떤 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위기 상황 속에서는 어떻습니까? 탁월한 위기 관리 능력이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노하신 일이 벌어졌습니다. 위기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상황 속에서 갑자기 본문은 늘 모세가 하던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렸듯이 7~11절은 이제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되는 12절 이하의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서 도입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도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에 대해서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첫째로 그것은 캠페인이나 어떤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한 일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캠페인이나 운동을 조직화하고 벌이는데 매우 빠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잘 하는 사람이 어느 조직에서나 일반적으로 환영을 받는 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사람들이 일하는 세상의 방식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회에서 익숙하게 배운 방식을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사용할 때는 늘 성경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현재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잘 조직화하여 적소에 배치하고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에 대해서 본문은 전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 안에 백성들을 불러모아서 뭔가를 했던 경우들을 알고 있습니다. 가령, 여호사밧 때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공격을 했을 때 경건한 왕 여호사밧은 이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서 온 백성에게 금식할 것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도우심을 구했습니다(대하 20). 우리가 여기서 성경을 자세히 읽는다면 먼저 여호사밧이 이 위급한 상황에서 두려워서 하나님께 먼저 엎드려 기도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대하 20:3a). 그리고 하반절에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살던 곳을 떠나 예루살렘 성전 앞으로 와 금식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보십시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대하 20:4).” 모인 자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왕의 금식 공포가 있었지만, 거의 자발적인 수준으로 백성들이 참여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얻고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살펴볼 또 하나의 사건은 에스라 때의 일입니다. 7월 초하루 나팔절에 수문 앞 광장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율법책이 낭독되는 것을 들을 때 일어난 큰 부흥의 사건입니다(느 8). 이 사건이 어떻게 발단이 되었는지 보십시오. 느헤미야 8:1에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라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린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와서 말씀을 좀 먹여달라고 구했던 사건입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이 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학사 에스라에게 주셨던 영적 부담과 그의 결심을 우리는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에스라 7:10). 우리가 살펴 본대로 이 두 사건은 단순히 여호사밧이나 에스라가 캠페인이나 무슨 부흥운동 같은 것을 일으킨 것이라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모세가 취하는 방식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기 위해서 회막을 진 밖에 치고 거기로 나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위기의 상황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 이미 취하고 있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다”고 기록합니다. 모세는 함께 기도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서명을 하라고 하지 않았고, 회개 기도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서 시종인 여호수아를 불러 조직도를 그리고 사람들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조직을 반대하고, 하나님께서 캠페인이나 운동을 싫어하신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효율을 무조건 반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본문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는 중요한 성경적 원리는 사람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여호사밧도, 에스라도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모세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 강조해서 조직이나 캠페인 혹은 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들리도록 말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행하는 관습의 심각한 부작용 때문입니다. 보통 교계 신문이나 광고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접하는 소식은 무슨 구국기도다, 회개기도운동이다 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당신의 교회에 찾아오셔서 주시는 부흥 조차도 인간이 조직하고 기획해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인상을 주기가 쉽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지난 2007년에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 백주년 기념대회와 같은 것도 같은 범주에 집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유관단체와 포함된 구문, 지도위원, 상임대회장, 공동대회장, 실무대회장들이 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큰 운동장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사실상 그 자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100여 년 전에 하나님께서 평양에 부어주셨던 부흥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는 절망적이고 필사적인 태도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참여했는가 하면 그 대답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런 대회를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어떤 대회, 그것이 구국기도회든, 선교를 위한 기도회든, 회개금식기도이든 사람들을 모으려면 재정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동원하려면 광고를 잘 해야 하고, 장소를 빌리는 것과 모든 장비들을 동원하는 것 다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대회를 조직하거나 어떤 운동과 캠페인을 할 때에는 반드시 스폰서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스폰서를 어떤 기준으로 세우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계연합대회와 같은데서 저녁 예배에 강사로 서는 조건은 몇 만불의 헌금을 내는 것이다 하는 것은 교계에 익숙한 관례와 같은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들이 더러 있겠지만 말입니다. 결국 재정능력이 강단에 서는 것을 좌우하게 됩니다. 과거에 빌리그래함이 복음전도 캠페인을 벌일 때 있었던 문제는 그분이 복음주의의 범주라는 기준을 넘어서 스폰서를 세우고, 협력하는 관계 속에서 전도 집회들을 진행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왜 이런 문제들을 이렇게 자세하게 다루는가 하면, 우리가 이런 관행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에 대한 상식적 생각의 수준에 그친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역사에 보조를 맞추어 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일하시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일하시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교회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하고, 아무리 유능한 사람들이 그 일에 참여하고, 아무리 많은 재정이 투입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으면, 그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없는 허사가 되고 맙니다. 물론 사람이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중요한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 어떤 분명한 부담을 가지도록 은혜를 주신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일은 시작되고, 그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주고 뭔가를 하게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원리를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는 재정 스폰서나 어떤 도움을 줄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로이드존스는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된 영적 각성과 부흥의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인간적인 스폰서십) 지원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세상적인 방식으로 일들을 하려고 한다면 광고를 해야됩니다. 또 대단한 사람들의 이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어떤 장소에서 집회를 가지려고 한다면 그곳의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참석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사람의 지원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교계에 익숙한 것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한다고 할 때,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우리의 눈을 고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고백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 123:2).”

3.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일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보십시오.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만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것은 어떤 캠페인이나 대회의 성공의 잣대가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일하신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에 성령께서 주시는 부담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고, 그런 모세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난 일이며, 모세가 회막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영적인 부담을 가지고 회막을 떠나지 않았던 여호수아의 마음에 성령께서 일으키신 일입니다. 이런 부담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여러분은 이런 경험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가령, 교회를 생각하는데 내가 뭔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렬한 부담이 생기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다 잘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대개 이런 부담은 거룩한 불만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제가 거룩한 불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이 그로 하여금 불평하게 하고 어떤 사람을 비난하게 하는 상황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엎드려 은혜를 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야 할 것 같고, 기도를 실제로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느낌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교회에 대한 부담이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시대의 교회의 영적인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선교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그런 부담이 이길 수 없도록 주어지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 하고 있던 일이 아니라 뭔가 그전에 내가 하지 않던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주시는 부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무슨 조직을 만들고, 기도회를 세우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그런 부담이 있을 때, 여러분은 순종하셔야 하는데 그것은 홀로 엎드리는 것입니다. 이 때 이런 유혹이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같이 기도하자고 할까?” 아닙니다. 먼저 혼자 기도하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과거에 제게 교회에 기도회를 만들자고 요구하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사실 제가 그런 요청을 받을 때 목사로서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상황을 살피면서 제가 조심스레 한 말은 “혼자서 먼저 기도를 시작하십시오”라는 말이었습니다. 만일 어떤 일을 위해서 기도의 부담을 가지고 있다면 혼자서 먼저 기도를 시작하셔야 합니다. 본문은 모세가 그렇게 했고, 하나님을 앙모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같이 기도할 사람을 모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종 여호수아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을 가지고 엎드리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4. 기도가 기도를 전염시킨다.
비록 그 일이 한 사람 모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지만, 그것은 결코 모세 한 사람의 기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본문 7절은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다’고 말합니다. 8~10절에 나오는 백성들,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인 구름이 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경배한 모든 백성들은 다 7절에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입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한 사람의 기도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영적인 부담을 주신 사람들의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모세에게 눈 도장을 받으려고 나아온 사람들이거나, 모세의 명령을 듣고서 할 수 없이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을 그 심령에 주신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이백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몇 명이나 되었는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백만이나 되는 엄청나게 큰 이스라엘 광야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사람들의 존재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로서 이 땅에 설 수 있는 것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 안에 성령님이 주시는 부담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움직이는 힘은 사실 조직력이나, 어떤 운동이나 캠페인이나 대회의 성공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열쇠입니다. 성령님께서 그 마음에 주신 거룩한 부담을 안고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엎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열쇠입니다. 문제는 그 열쇠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다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 속에 들어가게 될 때 확연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었는지, 왜 하나님의 교회가 그런 복된 은혜를 받은 일이 있었는지, 왜, 왜, 왜 하는 수많은 미제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그때에는 확연하게 보게 될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기도의 사람들이 우리 인생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그 날에 바로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의 인생에,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삶에, 그리고 그 시대의 세계 복음화에 열쇠였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어떤 조직에서 내 이름이 어디에 나와있는지, 어떤 대회에서 내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신문에, 광고에 다 나오고 모두가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수고, 그것이 우리가 구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5. 은혜를 구한 사람, 여호수아
말씀을 맺기 전에, 11절에서 언급한 여호수아라는 인물을 한 번만 살펴보고 싶습니다. 인상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그의 지도자를 능가하는 탁월함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요? 모세는 지금 80세가 된 노인이고 인생의 경륜을 통해서 얻은 성숙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여호수아는 아직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세에 못지 않게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를 인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은혜에 목이 말랐고 주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떠날 수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회막에 남아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그렇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목사가 아니고 장로가 아니고 아무 직분도 없다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청년들은 나는 아직 그만한 연륜이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책임도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아는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기억하셨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