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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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80) - 주의 영광을 보이소서

출애굽기 33:12-23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7-27

말씀내용
<주의 영광을 보이소서> 출 33:12~23



금송아지 숭배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의 대표적 배교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죄, 특별히 우상숭배의 죄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그 합당한 대가는 모든 백성을 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따라 백성을 다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레위인들을 통하여 동족 3천명이 살륙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들아가도록 천사를 보내시겠지만 말입니다. 이 상황에서 다시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갔고 모든 백성은 장신구를 제거함으로써 회개의 태도를 보였고, 하나님을 앙모하는 백성들은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은혜를 구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한 내용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있는 모세의 기도는 대략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2~14절은 중보자로서 모세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간구이고, 15~17절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위한 간구이며, 18~23절은 하나님을 알기 원했던 사람으로서 다시 모세가 자신을 위해 하는 간구입니다.

1. 중보자 모세의 자신을 위한 기도(12~14)
하나님께서는 2절에 어떤 천사를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은 채, 그저 당신 자신의 임재 대신 천사를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항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러서 이 백성을 인도하라 하시고 자신과 함께 갈 천사가 누구인지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면 전에 자기를 이름으로 알고 은총을 입은 자라고 하신 것이 무슨 의미인지 묻습니다(12). 이름으로 안다는 표현은 그만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자기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길을 보여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구하면서 모세는 자기에게 은혜를 주시고 이 백성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달라고 구합니다(1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1절에서 마치 모세의 백성인 듯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이 절박한 기도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고 배운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성공의 보장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이 저주요, 죽음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과거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가 없이 자기 생각과 계획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고통스럽게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자기 동족을 돕고 구원해보려는 가상한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가 바로의 원수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는 도망자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무엇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옳고 훌륭한 일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모세의 기도를 이해할 수 없고 그의 심정을 공감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없는 성공의 보장이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범죄, 금송아지 숭배 사건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없는 성공을 그들이 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입니다. 이런 일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겼습니까? 왜냐하면 바알은 그들에게 성공과 번영과 부를 약속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성경의 하나님이든, 바알이든 상관없다는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이런 태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배우게 된다면 그로써 우리의 신앙은 아주 중요한 진보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종교 생활의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우리의 가정, 교회, 일터 모든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행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진짜 성공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직업적 소명을 받고 그 일을 하게 될때 이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시고, 하나님을 아는 친밀한 지식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성공이 보장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면 할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대신 성공을 보장하는 세상의 방식에 무릎을 꿇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드린 기도는 주님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인생에서 완전한 실패를 할 각오를 하는 사람만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그렇습니까? 여러분이 인생에서 이루고자 하고 얻고자 하는 어떤 포기할 수 없는 가치와 비교할 때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에 대해서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 친히 가신다는 말씀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얼굴이 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민 6:25~26).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 빛이 자기 백성에게 비추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이제 이 하나님의 응답으로 모든 게 끝났습니다. 모세는 이제 가면 됩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모세가 일어날 생각을 하는 대신,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만하면 만족해야 할텐데 도대체 모세가 더 기도하는 내용은 무엇이고 왜 그렇게 구하는 것입니까?

2. 중보자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간구(15~17)
15절에서 모세는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가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모세가 제대로 듣지 못한 것입니까? 14절은 모세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세는 자기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가셔야 한다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은 ‘우리를’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라고 구합니다. ‘나와 주의 백성’이 모세가 지금 두번째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의 초점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가시겠다는 확증을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 기도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가진 사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라는 말로써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언급합니다(출 19:4~6). 이스라엘 백성은 온 세계 위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구별하여 세우신 민족이고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모든 민족과 나라들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민족과 백성이 얼마나 큰 복을 누리는지를 보고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모세가 기도한 것이 이것입니다.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확증을 허락해주시기를 구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이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고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중요한 교훈이 여기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과정과 목적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을 따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과정과 목적에 대해서 계시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기도는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 곧 지식을 따라 구하는 기도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혹은 수많은 기적 경험들에 대한 감격만이 아니라, 출애굽이라는 사건이 하나님께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 뜻을 성취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의 중심에 계시는 길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계획과 과정에 대한 더 많은 지식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역사에 대한 지식이 풍성하다면 기도 생활도 그 풍성한 만큼 깊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16절에 있는 모세의 질문을 주목해 보십시오.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저는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을 무엇으로 확인하십니까? 여러분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그 증거가 가나안 땅에 성공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속고 가는 부분입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출애굽기 33장처럼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본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동행의 증거로 내세우는 많은 것들이 사실상 그 증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성공, 문제 해결, 질병의 치유와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답을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오직 하나님 자신이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것,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 외에는 아무 것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대답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함께 하시는 것, 하나님의 동행 이외에는 어떤 대답도 불가능합니다. 모세는 여러 가지 미약한 증거들이 아니라, 확신 그 자체를 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확신입니다. 모세가 구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이런 확신을 구해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세상 앞에 증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성공입니까? 우리의 규모입니까? 우리는 외형적인 어떤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어하는 유혹에 빠지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우리 안에 진정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을 때 우리는 이런 외적인 현상과 성공으로 우리 자신과 신앙을 증명하려고 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하다면, 그들은 결코 어떤 외적 현상으로 자신들을 증명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를 보라.”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당당함이 오늘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 앞에서 회복해야 할 요소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는 오직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외에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간구도 응답해주셨습니다. 17절에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모세와 함께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도 함께 가시겠다고 확언하셨습니다.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라는 대답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잠깐 멈추어 생각해야만 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왜 그 생각을 바꾸셨는가, 왜 다시 그들과 함께 가시겠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17절 하반절에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는 앞서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런 증거가 어디 있냐고 물었었습니다(12~13). 지금 하나님이 그 물음에 대답하셨습니다. “그 증거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가지 않겠다고 한 결정을 철회하고 다시 그들과 함께 가겠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은 그들이 장신구를 떼어내고 회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의 정답이 아닙니다. 핵심 이유는 하나님께서 중보자 모세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17절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같은 인간을 기뻐하실 수 있는가?”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의구심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때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가 경건하고 의롭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종종 잊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위기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데서 우리의 구원의 감격이 식어버리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경건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으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셨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대속의 죽음을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셨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구원의 도리를 놀랍게 중보자 모세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취하시는 모든 기쁨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독생 성자에게서 취하시는 기쁨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원수된 죄인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는 은혜를 입고자 한다면 오직 한 가지 길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요, 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입니다.

3. 주의 영광을 보이소서(18)
여기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모세의 끈질김입니다. 이제 더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만큼 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 앞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는 18절에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구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상에서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보기를 구하는 것 이상에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이 입니다. 모세가 지금까지 보고 경험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으며, 하나님의 산에 올라 40일 40야를 하나님 앞에서 십계명의 돌판을 받고 율법과 성막에 관한 모든 말씀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부분을 보았고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에 보다 풍성하고 충만한 계시를 보기를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금이라도 맛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갈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맛본 사람이 더 큰 은혜를 구하는 법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더 큰 은혜를 구합니다. 지금 모세가 구하는 것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지금까지 그리고 이후에도 없는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19).” 모세가 보기를 구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인데 하나님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한 열쇠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선한 형상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모든 선한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아우르는 매우 포괄적인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선한 형상을 그의 앞에 지나게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20).”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의 전부를 그에게 보이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피조물이 지니는 인식의 한계와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한 완전 때문입니다. 그 영광을 보고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피조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할지라도 그 완전한 충만을 완전히 보게 될 때, 그 흠없는 영광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생명체, 어떤 피조물도 그대로 보고서는 살 수가 없을 만큼 완벽하고 완전한 영광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경험 밖의 이야기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으면 모세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22~23).” 놀라운 표현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이 기도에도 응답하셨습니다. 인간이 지상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왜 주께서 이 말씀을 기록하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구하는 자리에 가라는 것입니다. 더 큰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면서 받은 은혜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보다 큰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 은혜를 구하십시오. 쉽게 만족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살 수 있는 피조물이 없을 만큼 하나님의 완전하신 영광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토록 당신의 영광으로 만족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 제게 더 큰 은혜를 주옵소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십시오. 그런 목마름과 갈증을 가지고 나가십시오. 하나님 밖에는 채워줄 수 없는, 그리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만족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영광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은 단순히 엎드려 기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선한 형상과 속성들을 계시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들을 알게 되고 그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이성적인 피조물인 인간에게 알리기를 기뻐하시고, 우리가 그 영광을 봄으로써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기뻐하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의 고유한 결과들 속에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드러내심으로써 나타나며 창조된 지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알리심으로써 나타나며 하나님의 무한한 충만하심을 피조물들에게 전달하심으로써 나타나며 그리하여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최상의 존경을 드리고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최고로 기뻐하는데서 나타나며 이런 것들이 합당하게 실행되고 표현됨으로써 나타난다...그 피조물들의 선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대한 지식과 그것들을 보는 것에 있으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하나님께 순응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에 있다...다른 말로 표현하면 참된 은혜요, 실제적인 거룩함이라 말할 수 있다(참된 미덕의 본질).

모세가 구했고 경험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모세에게만 허락하신 은혜가 아닙니다. 모든 자기 백성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예비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구하십시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 부함, 문제 해결..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하나님 자신을 잃어버린다면 그보다 비참하고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기도로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