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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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81) - 하나님의 영광을 들려주시다

출애굽기 34:1-7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8-03

말씀내용
<하나님의 영광을 들려주시다> 출 34:1~7



1. 언약 관계를 회복하시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선한 형상을 보여주시겠다고 응답하셨고,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으므로 지나가실 때 모세를 반석 틈에 숨기시고 또 친히 손으로 덮었다가 등을 보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에서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게 됩니다. 모세는 이 일 후에 바로 산으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오기 전에 먼저 할 것을 모세에게 지시하십니다. 그것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명령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찢어버린 계약서를 다시 쓰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다시 너희를 내 언약 백성으로 삼겠다는 말씀이고, 이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베푸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런 지시를 주실 때, 모세는 그 지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확증해주시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감격이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왜 전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까지 준비하지 않으셨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모세가 돌판을 깎아서 준비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친히 거기에 십계명을 써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전에 처음 산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사람이나 짐승도 그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서 이튿날 아침 일찍이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이제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깨어져버렸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을 기대하면서 올라갔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신 방식
이제 본문 5~7절은 모세가 33:18에서 기도한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보여주시는 장면에 대한 묘사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기대하셨습니까? 우리가 기대한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하나님의 모습을 어떤 인간의 언어로 모세가 형용할 수 있을만한 어떤 것이 아닙니까? 말하자면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무엇을 보았고, 그 본 것을 어떻게 묘사하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세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성령의 영감으로 쓴 것인데, 보통의 기대와 다른 것입니다. 모세는 본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그 차이의 핵심을 짚어줍니다. 물론 모세가 경험한 하나님의 영광은 전인적인 체험이었을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본 것이 라기 보다는 귀로 들었다고 표현해야 옳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기 보다는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에 대해서 직접 하신 하나의 설교였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모양인가, 어떤 빛인가, 어떤 찬란함인가 하는 묘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선포였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신적 성품 즉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33:19에서 말씀하셨던대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기대하는 어떤 그림 이상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가령, 이번 올림픽에서 김재범 선수가 유도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기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은 귀한 일이지만 사실 하나님의 영광은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무게, 하나님의 완전하심의 전부,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고 압도하며 인간의 입을 다물게 하는 어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심이며, 하나님의 전체로 완전하신 성품과 속성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안다, 혹은 본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성경이 가르쳐주듯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저 피상적이고, 아는 정도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에 써서 주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모든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요체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5~7절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것을 들었습니다.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미련해 보이는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교회를 세워가시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 사도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21).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롬 10:17).

물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모세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설교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자기와 함께 거기 서’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5). 이것은 그가 본 것입니다. 그의 체험은 전인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영혼을 사로잡고 압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계셨다고 할 때 역시 그 구름은 그냥 구름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을 상징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모세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보이시기 위해서는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강림하사’라는 말을 씁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곁에 서셔서 선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듣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들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어떤 성품 보다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인격과 성품을 망라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집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몇 달 전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다양한 하나님의 이름은 다 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상황 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시편에서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했던 방식입니다.

A.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여기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당신 자신의 이름을 반복해서 선포하고 계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셨을 때 계시하셨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가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전달하는 의미는 그렇지만, 이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을 건지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과 언약을 체결하십니다.새롭게 언약의 돌판에 십계명을 새김으로써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에서 참 자유를 발견하고, 안식을 얻고,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이렇게 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경험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누리는 특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당신의 성품을 선포하셨는데 이 선포는 이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고백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고백한 사람들의 고백을 많이 듣게 됩니다. 요엘 선지자나 요나 선지자가 이렇게 고백을 했고(엘 2:13; 욘 4:2) 시편에도 같은 고백들이 많이 나옵니다(시 86:15; 103;8; 145:8). 이것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성품에 대해서 선포하신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강조하신 것, 모세와 후대의 언약 백성들이 알기를 바라신 것이 무엇입니까?

B. 자비로우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은 주로 영어 성경에서는 merciful 또는 compassionate 으로 번역된 말입니다. 긍휼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성품을 먼저 드러내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모세와 이 백성이 처했었던 형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다 죽어야 마땅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셨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모든 이야기에서 오해할 수 있는 위험은 모세는 자비롭고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오해도 적지 않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심판만 하려고 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은 바로 “세상을 사랑하신” 성부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요 3:16).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은 이런 배교와 반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을 믿을 때, 이 부분을 놓치면 우리는 늘 하나님을 경외하기 보다는 무서워 하는 것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실패와 연약을 받으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C.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은 두 번째로 당신을 은혜로우시다고 선포하십니다. 은혜로우신 성품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백성을 대하실 때 그들이 행위와 존재에 합당하게 대우하지 않으시는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기적을 통해서 건져내시고 그 후에도 광야에서 기적을 날마다 경험하게 하시고 그들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친히 가르치고 말씀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금송아지를 섬기고 하나님을 배역한 사건을 기록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만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이토록 큰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처럼 넘어지고 실패하고 하나님의 배반하는 모습이지만, 하나님은 자기 언약 백성을 은혜로 대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에게 다시 돌판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서 올라오라고 하신 말씀에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 진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며 그 죄에 상응하도록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미 이 사건의 과정을 통해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품만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십니다.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바로 지금 이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 진멸하셔야 하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언약 백성으로 받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입고 살아가는 은혜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때 빼놓을래야 빼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D.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인내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성품을 이해할 때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때에 홍수로 세계를 심판하신 하나님이시고, 아브라함 때에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온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심판을 하나님의 분노의 폭발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참고 참고 참다가는 언젠가 폭발합니다. 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그런 성격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젠가 오래 참으시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여 폭발해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마침내 인내의 한계에 달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심판을 행하시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지연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우리는 그 이상의 대답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 인자와 진실이 많으셔서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시는 하나님
여기에 사용된 인자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익숙한 헤세드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즉, 언약의 사랑, 끊어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언약에 기초한 사랑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 인자하심은 천대까지 베푸실만큼 큰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께서 또 하나의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는 단어를 추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진실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확고함, 확실성, 진리(truth), 진실함(truthfulness) 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히브리어 ‘에멭’이란 단어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성경은 종종 이 본문에서처럼 인자와 진실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할 때 바로 이 용어를 차용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사실, 요한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모세에게 계시하셨던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진리를 동반하는 은혜이고,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언제나 인자를 동반합니다. 그리고 그 인자는 하나님의 언약 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가 천대에 미친다는 것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그것을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너무나 많은 성경 구절들이 이 성품을 설명하고 있으나(인자하심/ 느 9:17; 사 54:8; 시 26:3; 48:9; 사 63:7; 렘 9:24, 진실/ 시 111:7; 느 7:2; 삼하 2:6; 시 108:4) 우리는 여기서 이만큼만 말하고 지나가야 하겠습니다.

F.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악(iniquity), 과실(transgression), 그리고 죄(sin)를 용서하신다고 여기 불의한 것의 세 가지 범주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굳이 이 불의를 의미하는 단어들을 구분하여 설명하자면, 악은 옳고 선한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태도와 행동을 말합니다. 과실은 이보다 훨씬 더 의도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으로서 의지적으로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죄는 일반적인 죄를 말하는데 주로 도덕적인 실패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김으로써 이 모든 것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 자신을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들의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신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78편에 잘 표현되었습니다. “(35)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36)그러나 저희가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37)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 (38)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시 78:35~38).”

G.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시는 하나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성품에 왔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말씀은 그 하나님의 모든 선하신 성품을 완전하게 하는 성품입니다. 정의와 상관없는 자비는 자비일 수 없습니다. 만일 어느 나라의 정부가 살인과 강간과 온갖 범죄를 연쇄적으로 저지르는 모든 악한 사람들을 조건없이 용서하고 무죄를 선언하고 풀어준다면 우리는 그런 정부를 그저 자비롭고 은혜롭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능하고 부정하며 불의한 정부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비와 은혜와 인자와 용서가 그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은 언제나 정의와 공의 위에 서 있을 때입니다. 부분적인 정의의 개념이 아니라, 온전한 정의가 시행될 때에만, 자비와 은혜와 인내와 인자와 진실도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어떤 나라의 정부도 이것을 완전하게 시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완전하게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형벌 받을 자에게 보응을 하신다고 하심으로써 당신의 모든 선하심을 온전케 하십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저희에게 응답하셨고 저희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희를 사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9:8).”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이 있는데, “아비의 악을 자녀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이미 십계명의 사계명을 말씀하실 때 하신 말씀인데, 아비의 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 자녀손 삼 사대까지 심판하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은 조상에게서 유전되는 죄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자기의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와 같은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상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죄와 악의 영향력입니다. 그것은 삼사 대까지 흘러갑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주변에서 보고 경험하는 일입니다. 강도도 자기 자녀를 사랑한다고 볼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와 악이 내 사랑하는 자녀손에게 얼마나 악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경고를 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모든 하나님의 성품과 선하심과 영광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복되신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하나님의 영광, 이 모든 하나님의 선하심, 이 모든 하나님의 성품은 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나타났고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오래 참으심과 인자와 진실, 용서는 하나님의 죄를 면죄하지 않으시고 보응하시는 것과 함께 완벽하게 십자가에서 나타났고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께 보응하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완전하신 자비와 은혜, 오래 참으심과 인자, 진실, 용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 모든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돌판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주시는 새 언약의 중보가 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 증명(vindication)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의 영광 그 완전한 나타남과 성취를 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세에게 당신의 모든 선한 형상을 지나가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구한 것처럼 눈으로 보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귀로 듣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하나님의 설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게 될 때, 인간은 단지 그것이 귀의 경험이거나 눈의 경험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격과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영광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모세가 경험했듯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듣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사로잡히고 그 영광에 압도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십시오. 모세의 생애에 이 경험은 그를 일평생 남은 40여년의 그 모진 삶을 넉넉히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생애에 어떤 일을 만나시든지 여러분을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주는, 그리고 거룩한 길을 걷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