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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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82) - 하나님의 이름은 질투

출애굽기 34:8-17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8-17

말씀내용
<하나님의 이름은 질투> 출 34:8-17


1. 모세의 반응: 경외감과 예배(8) 그리고 회개(9)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과 성품을 선포하심으로써 영광을 모세에게 보여주실 때, 모세는 그것 조차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반석 틈에 두시고 지나가실 때까지 그를 친히 손으로 덮어서 보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기 보다,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만, 그 의미가 얼마나 장엄하고 두려운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안다면 그 말 조차 사용하지 못할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친구처럼 대면하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선포하시자 그는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고 8절은 기록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뵈올 때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경외감과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선하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의 전형은 경외감이고, 그 경외감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경외감이 없는 하나님 예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감을 가지고 행해지고 있습니까? 예배가 관계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우리는 거의 잃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관계적이란 말은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저 내가 행하는 하나의 종교적 형식인가 말입니다. 종교적 형식이 되어버린 예배는 더 이상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경외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예배이고, 하나님께서 지겨우니 그만 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의 영광 즉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알지 않고서는 우리는 두려워할 수도,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 언약의 사랑, 오래 참으시는 용서, 거룩한 정의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직하게 나의 예배가 그러한가 돌아볼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가 할 일은 돌이켜 회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가 우리의 죄악이 되어버린 것이고, 우리가 예배로서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제는 특별히 말라기에서 혹독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모세는 9절에서 다시 기도합니다.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우리는 전반부의 기도에 이미 익숙할만큼 모세는 이 기도를 여러 번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같이 가겠다고 응답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왜 또 여기서 기도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중언부언하는 것이고, 모세가 의심이 많아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의지해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가령,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실 것,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게 하실 것,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실 것...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약속을 붙잡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도록 구해야 하고 그 신실하심을 따라 행하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반복적으로 말입니다. 중언부언한다는 말은 이방인들을 그저 내용도 없는 빈 말, 마음을 담지도 않은 말을 무슨 염불이나 주문을 외는 양 되풀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때때로 저는 기도를 처음에 잘못 배워서 기도할 때 그저 ‘웅얼웅얼’거리는 경우를 봅니다. 이것은 좀 위험한 태도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 웅얼거리는 것이 아니고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진실로 그 약속을 믿었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되었을 때, 특히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또렷하게 보인 것이 바로 백성들의 목이 곧은 죄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모세는 단지 백성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악과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합니다. 어느 새 중보자인 모세는 목이 곧은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정상적이고 합당한 반응입니다. 그는 결코 가볍게 행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밝은 영광의 빛 앞에 밝히 드러난 자신과 자신의 죄악을 봅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모세는 회개하면서 동시에 간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라는 간청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삼아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도착한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셨던 약속이기도 했습니다(출 19:4~6). 모세는 다시 이 언약을 확정해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언약을 맺으시기 위해서 돌판을 이전 것과 같이 깎아 올라오라고 하셨던 것을 볼 때 모세는 이것을 구해야 한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깎아오라고 하셨을지라도 이것은 전적으로 당연한 약속의 이행이 아니라 은혜라는 사실을 모세는 아는 것입니다.

2.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10)
하나님의 응답이 10절 이하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오늘 본문 전체를 지배하는 주제입니다. 언약을 세운다는 말씀 안에 모세가 구한 모든 것에 대한 응답이 있습니다. 언약을 맺는다는 말 속에 하나님의 백성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단순한 말이 함축하는 의미는 엄청납니다. 전능하신 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 속에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이미 보장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영원까지 말입니다. 내가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얼마나 축복된 말인지 우리가 그 의미를 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우리는 언약 가정이라고 말하고, 그 자녀들을 언약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언약 백성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신앙의 고백이 들어있는 표현들이라는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는 의심이 들고, 세상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맺어주신 언약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언약을 세우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언약을 세우시는 궁극적 목적입니다. 10절 내용이 영광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는 않아도 그것을 말합니다.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엄청나고 두려운 일들을 그들이 보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높일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실 때 살펴보았습니다. 바로와 그 신하와 그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각인시키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라는 것입니다(출 9:14~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시는 목적도 결국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서 모든 민족으로부터 영광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궁극적 목적이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기도 합니다. 11절은 하나님께서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가나안에 살고 있던 족속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이것도 사실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이는 것이었지만, 다윗의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을 이기게 하셨듯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모든 가나안 족속들을 이기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철병거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네가 능히 그들을 쫓아내리라”고 약속하십니다(수 17:16~18). 이제 싸움은 언제나 이스라엘의 믿음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성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이 세상이 평가하는 기준의 힘(돈이나 권력이나 학벌이나 성취나 명예 등)으로 승부를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싸워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는지, 어떻게 여러분은 싸우고 있는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3. 질투라는 이름의 하나님(14)
하나님과 우리가 맺는 언약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또 하나의 이름, 종종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을 소개해주십니다. 왜냐하면 이 이름이야말로 하나님과 맺는 언약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질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14절에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십계명의 이계명에서 당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출 20:4~5). 질투는 거의 부정적 의미로 이해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질투는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부정적일 수 없습니다. 질투는 긍정적 의미로 ‘맹렬한 보호(fiercely protective)’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도록 맹렬히 보호하시는 것은 바로 언약의 내용인데,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그리고 당신을 향한 자기 백성의 사랑과 충성입니다. 제임스 패커의 말대로, “하나님의 질투는 지극히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칭송받을만한 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완전하고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는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을 되돌려 놓으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질투는 열정적으로 자기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즉 헤세드와 깊이 연결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질투의 개념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결혼 관계에서 입니다. 결혼은 본질적으로 배타적 언약입니다. 사랑의 언약입니다. 때로는 과도하고 잘못된 방향의 질투가 가정의 비극을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혼 관계에서 정상적 질투는 배우자에 대한 불붙는 애정이고 서로의 관계를 지켜가려는 맹렬한 의지로서 부부 관계에 힘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시는 언약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질투라는 이름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전적으로 배타적인 언약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4. 배타적인 언약(the covenant is exclusive.)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본문에 주시는 명령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고 12절과 15절에 반복해서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쫓아내실 것입니다(11).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가나안에서 섬기던 그들의 단들을 헐고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그들의 우상들을 깨뜨리고 찍어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13). 말하자면 그들의 예배 장소와 예배 흔적을 다 쓸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독점적인, 배타적인 언약을 맺은 백성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질투라 이름하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결혼 관계처럼 이 언약은 배타적 언약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넘어지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언약의 성격을 모르기 때문이고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남편이나 아내가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결혼 관계 안에서만 가능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을 간음입니다. 간음은 설령 배우자와의 결혼 언약을 깨뜨리는 이혼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간음의 행위로써 이미 깨뜨린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세상과 벗된 것이 영적 간음이라고 선언합니다(약 4:4). 이 면에서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매우 엄격한 선을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질투라 이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만일 가나안의 다른 족속과 언약을 맺는다면 그들은 그로써 하나님과의 배타적 언약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자칫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단순히 이웃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언약을 체결하게 되면, 결국 이것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이방 신들/우상들과도 언약의 관계가 확장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함정입니다. 일단 언약을 맺으면 그 다음에는 서로 왕래하면서 그들의 예배에 참여하게 되고 그러면서 영적 타락에 이르게 될 것을 하나님은 내다 보셨습니다. 15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그만큼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는 타락해 있었고, 이것은 인간의 죄성에 가장 부합하는 형태로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세운 언약은 결국 올무가 되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12).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쫓아낸 후에 그들의 예배와 종교의 흔적 조차 전부 없애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방의 종교 문화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형식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고 결국 이방 신을 섬기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14~15). 백성들이 쫓겨나도 예배장소가 남게 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유혹이 될 것입니다. 온갖 모양과 형상으로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감각적인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는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감각적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예배에 있어서 큰 유혹의 하나입니다. 오늘날 시각, 청각 등 오감을 자극하는 온갖 것들을 예배에서 사용하는 것이 합당한가를 우리는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는 17절의 명령도 이방인들이 하는 감각적 예배의 형태를 거부하라는 반복적 명령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려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의 세대에서 일어나게 될 일들입니다. 이방 족속과 언약관계를 맺고 서로 왕래하다 보면 그 타락한 문화 속에 젖어 들게 될 것이고, 자녀들이 서로 사귀게 될 것이고 결혼 관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자명합니다. 언약 자손들이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결혼이 언약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의 언약을 맺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는 영적 간음인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기에 우려하신 모든 일들이 다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모든 일이 일어남으로써 결국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서 자기 백성을 쫓아내셨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난 것입니까? 그 대답이 오늘 본문에 이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스라엘 역사의 비극은 이미 가나안에 이스라엘이 처음 들어갔을 때, 그들이 가나안 족속들을 믿음으로 쫓아내기를 거부하고 적당히 공존하는 길을 결정했을 때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5. 다원주의 세계에서 하나님만 섬기라.
우리는 다원주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오해하면 우리는 다른 종교의 사원들을 파괴하거나 우리 주변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쫓아내든지, 그리스도인들끼리만 모여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변함없는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배타적 언약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직장에나 이웃에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배는 섞일 수 없습니다. 오늘날 다원주의는 하나의 종교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러 종교인들이 모여서 합동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그다지 낯설게 바라보지 않는 시대를 삽니다. 국가적 행사나 위기의 시기에 종종 이런 형태가 많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결코 기독교 예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다원주의 종교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각자 알아서 자기 신에게 기도하는 예식은 예배일 수 없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일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존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예배일 때에는 우리가 타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우려를 봅니다(15). 물론 우리는 불신자들의 예배 의식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때, 떠오르는 생각은 지인의 장례식이나 결혼식이 절이나 기타 다른 종교의 의식으로 행해질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정중하게 설명하고, 예배의식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혹 참여하셔야 할 상황이라면, 여러분과 함께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시험에 들지 않고, 잘못된 영향을 받지 않도록 충분히 성경의 도리를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다원주의 세계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예배의 문제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적용을 하나 더 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언약의 형태로 맺어지는 결혼 관계에서 신중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언약 백성과 결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거니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얼마나 단호한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와 결혼의 언약관계로 들어가는 것은 자연히 그 불신자가 가진 거짓 신과의 언약으로 연장되며 동시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 젊은이들 가운데 조차 이렇게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드물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교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심지어 결혼을 전제로 하는 연애(심각한 데이트)에 있어서도 젊은이들은 신중해야 합니다. 즉 연애도 언약 백성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래 전 야곱의 딸 디나의 사건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창 34). 세상과 세상을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것은 다 언약과 관련된 명령입니다.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이름은 질투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언약 파기행위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관계를 맹렬히 보존하시고 우리에 대한 실패할 수 없는 사랑으로 마침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충성을 얻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이런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고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질투라 이름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아멘.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