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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83) - 언약 백성이 사는 법

출애굽기 34:18-28 ~ 35:1-3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8-24

말씀내용
<언약 백성이 사는 법> 출 34:18~28; 35:1~3



1. 무의미한 반복인가?
하나님은 다시 산에 올라온 모세에게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모세가 구한 모든 기도에 대한 응답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 백성이 언약 관계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배타적 관계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거나 가나안의 우상을 섬기는 민족과 어떤 언약 관계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어지는 말씀을 읽으면서, 거의가 다 이미 하나님께서 여기 저기서 말씀하셨던 내용들을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18절은 12장에서, 19~20절은 13장에서 그리고 22~24절은 23장에서 하셨던 말씀들입니다. 물론 이전에 깨어진 언약을 이제 다시 맺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과연 이런 반복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무의미한 반복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금송아지를 섬김으로써 언약을 깨뜨린 배교의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언약을 맺으시면서 이 언약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의 가슴 속에서 새겨주시는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구체적인 도덕적, 의식적 율법의 계명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의 원리를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가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들도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주일 예배나 금요 예배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헌금 생활은? 우리의 직업 윤리와 개인적인 삶의 원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적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 섬겨라”하시고 그 다음에는 “각자가 알아서!”라고 말씀하시는 대신에 보다 구체적인 지침들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서 알고 있는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간략하게 여기서 하나님이 정리해 주신 지침들은 그만큼 언약 백성으로 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양보할 수 없는 원리들로 제시되고 있고 그들은 특별히 이 반복적으로 주신 말씀을 유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나아가기 전에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백성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언약 의식을 제정하셨고 행하셨습니다. 24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대답했었습니다(24:3). 70장로를 포함한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시기까지 했습니다(24:11). 이후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돌판을 받고 성막에 대한 자세한 지시사항을 받으러 산에 올라가서 40일을 지냈습니다. 이 기간을 참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강요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한 그들의 대답을 어겼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뜨렸습니다. 이로써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처음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을 때, 그들의 불순종과 불경함을 드러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두번째 율법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 의식을 행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이 말씀을 다 지키겠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 언약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즉 인간에게 율법을 준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시사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처음에 주시고 다시 주시는 이 시작부터 인간은 자신의 무능함, 선을 행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인간임을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선언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들이 나옵니다. 그것은 언약 백성이 살아가는 법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됨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첫째는 정규 예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즉 절기에 대한 규정들을 다룹니다. 둘째는 안식일 규정입니다. 마지막은 헌신과 헌금의 원칙입니다.

2. 예배 원칙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최소한 그들이 지켜야 할 예배의 원칙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각 가정을 대표하는 모든 남자는 일년에 세 차례 절기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23). 아마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배의 원칙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들이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일 년에 세 번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사는 집을 떠나서 교통이 오늘날과 같지 않던 고대에 먼 길을 떠나 하나님 거하시는 성막/성전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명하셨습니다. 이 세 번은 유월절이라고도 불리는 무교절(18), 맥추의 초실절이라고 불리는 칠칠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장절(초막절)입니다(22). 우리는 거의 1년 전에 이 3대 절기에 대한 말씀을 상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저도 똑같이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강해 54번 모세의 복음을 다시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그 핵심을 짚어볼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오늘 반복하여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A. 무교절(18)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밤에 애굽에서 나왔고, 이어지는 7일이 무교절에 해당되었습니다. 유월절이 구원의 사건을 보여준다면 무교절은 성도의 성화를 보여줍니다. 무교절을 지키는 7일은 신자의 전 생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완전수입니다. 이 기간에 이스라엘 백성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부패의 상징인 누룩이 없다는 것은 죄와 구별되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5:6에서 신약 성도들에게 무교절을 지키라고 했는데, 이것은 거룩한 삶을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성도들은 ‘누룩 없는 자’입니다(고전 5:7).

B. 맥추절( (맥추의)초실절, 칠칠절, 오순절, 22)
유월절이 농사에서 보리 추수를 위하여 낫을 대기 시작하는 날이라면 그때로부터 50일간 보리추수를 하게 되고 이 보리추수가 마치는 날이 맥추절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22절에 ‘맥추의 초실절’이라고 한 것은 보리 추수를 완료하고 그 모든 수확의 첫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차원에서 사용된 용어로 이해합니다. 초실절이라는 이름은 신약에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날이 신약적으로 놀랍게 성취된 것은 오순절이었습니다. 그날에 영적 추수가 놀랍게 일어난 것은 맥추절에 보리 추수를 완성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제 수장절이 되어야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종류의 수확을 다 마치고 그 수확을 창고에 저장하고 큰 축제를 갖게 됩니다.

C. 수장절(초막절, 22)
수장절은 가장 풍성한 절기였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은 수장절의 기쁨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농부들에게 추수를 끝낸 것처럼 큰 기쁨이 없었겠지요? 엄청난 양의 희생 제사가 이 8일 동안에 드려졌습니다. 이것은 수확의 풍성함도 상징하지만, 죄인들이 이런 기쁨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은혜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인식을 늘 필요로 합니다. 또 수장절은 초막절이라고 불렸는데, 광야에서 조상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공급하심과 보호하심 속에서 살았던 40년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집이 아닌 밖에 텐트를 치고 생활했습니다.

D. 반드시 지켜라(23~24).
이 세 번의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근본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언제나 이 세 번의 절기를 중심으로 짜여져야 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든 일정이 이 확정된 일정을 중심으로 혹은 피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들이 이 절기에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피할 핑계는 없었습니다. 사실 모든 남자가 처자들을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나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와서 7~8일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고대 세계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가까이에 있는 원수들이 그들의 이 풍습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무방비 상태로 처자식들을 놓아두는 꼴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의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24).” 그들이 땅을 차지하고 풍성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이 세 번의 절기는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에 그것을 기억하는 행위였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뵙게 위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며칠 길을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1시간 남짓이면 차로 올 수 있는 거리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게 하는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주일에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만이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금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성경이 명확하게 지시한 것은 아닙니다. 수요예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주일을 사는 중에도 하나님께 나와서 “우리는 은혜로 삽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돌보아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배, 정규 예배가 여러분 삶의 중심이 되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나는 내 힘으로 삽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말해주는 삶입니까?

E. 그리스도 안에서 다 성취되었고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 번의 절기는 그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다 성취되어 우리의 것이 되었고 또 일부는 성취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사 그 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무교병이 되어(벧전 1:19) 우리의 거룩함까지도 되어 주셨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 모든 성도의 부활을 보장해주셨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추수를 시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추수를 마치는 재림의 날에 모든 성도를 다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 왜 그토록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고 자랑해야 하고 그리스도를 높여야 하는지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3. 안식일을 지켜라(34:21; 35:1~3).
우리는 이미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 십계명을 상고할 때 5번에 걸쳐서 상고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표지로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강조한 계명이었고, 오늘날 유대인이 아닌 신자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자들의 삶에도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계명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할 것에 대한 명령을 포함합니다(21; 출 20:9).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안식일에 안식을 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특별한 시간과 쉼을 누리지 못할 만큼 바쁜 사람은 아주 게으르거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하나님과 그 백성의 만남을 위해서 구별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은 질투라 이름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34:14).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랑하는 언약 백성과 함께 하는 날을 정하셨습니다. 특별히 정해진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들로부터 쉼을 누리면서 그것을 하기를 바라십니다. 21절에 보면 “밭 갈 때나 거둘 때에도 쉴찌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주일은 이사하는 날이 아니고, 주일은 휴가를 가지라고 주신 날이 아닙니다. 그래서 35장에서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출 35:2~3).” 이 날은 주 안에서 쉼을 누리며, 주님과 함께 보내는 날이고, 주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날입니다. 이 날은 내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두드러진 표시입니다.

4. 최상의 것을 드려라(19~20).
초태생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처음 난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생명이 속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피조물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속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가축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이것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십일조의 원리와 동일한 것입니다. 보통 제유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부로써 전체를 대신하거나 표현하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 고백이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듯이, 가축의 첫 새끼를 드림으로써 앞으로 나게 될 모든 새끼가 다 주님이 주신 주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예외적 사항이 있습니다. 20절에 나귀의 첫 새끼는 그것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지 말고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면 목을 꺾어 죽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나귀가 율법의 의식법상 부정하여 제물로 드려질 수 없는 짐승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나귀는 새김질도 하지 않고 쪽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레 11:1~2). 이어서 주시는 말씀이 특이합니다. 20절 하반절에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찌며”라고 했습니다. 나귀가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에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고 했다면, 사람은 왜 대속해야 합니까? 사람이 부정하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도 나귀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사 64:6).” 바로 앞에서 금송아지를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부인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이 곧았고 완고했으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지 않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장자도 그를 희생 제물로 직접 드리는 대신 대속되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자식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첫 자식만이 아니고 모든 자식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자식은 귀한 내 자식이기 전에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것과 같은 요구를 하지 않으십니다.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것과 같은 요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식이 독자이건, 첫째이건 막내이건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자식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귀해도 자식과 바꿀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자식이 다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20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왜 이런 말씀이 여기에 이어집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서 나아가야 합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결코 빈 손으로 하나님께 가지 않습니다.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 그리고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3번의 축제에 하나님 앞에 갈 때에 나타났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절기를 지키는 것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명하셨습니다.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신 16:17).” 하나님은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거나 없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고후 8:12). 그리고 인색함이나 계산하는 마음 혹은 억지로 하는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고후 9:7). 이렇게 요구하는 것은 이단 종파나 진리에서 벗어난 집단에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히 빈 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셨으며, 최상의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여기는가를 드러내는 좋은 시금석입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한 사람이 안식일에 쉴 수 있듯이, 재정과 물질 생활에서 규모 있게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가지고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식 이야기를 하시면서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명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그렇게 사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독생자를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랑 때문에, 이 사랑을 아는 자만 이렇게 그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 가진 모든 것 다 주의 것이니”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빈 손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최상의 것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세상의 염려와 불안 속에서 걱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예배를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하지만, 안식일은 조금의 타협도 없이 쉼을 누리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들은 최상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존재들임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살아가는 법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은 자신을 신뢰함으로 언약 백성의 삶에 충실하기로 정한 자들을 모든 약속을 따라 신실하게 돌보시고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신앙 고백이 여러분의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의 주일 성수를 통하여, 그리고 여러분의 헌금 생활을 통하여 드러나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