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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84) - 중보자의 영광

출애굽기 34:29-35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8-31

말씀내용
<중보자의 영광> 출 34:29~35



1.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
모세는 자신이 가지고 올라간 돌판에 하나님께서 다시 새겨주신 십계명의 돌판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성경은 이 중보자 모세에게 매우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9절 하반절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는 산에서 하나님을 뵙던40일간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고 그 말씀대로 언약서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는 신비한 능력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여기 ‘광채가 나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뿔이 나왔다’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모세 그림 가운데서 ‘머리에 뿔이 난 모세’의 그림을 보셨다면 그것은 라틴어 성경은 벌게이트(Vulgate)역이 이 구절을 ‘광채가 났다’고 번역하는 대신, ‘뿔이 났다’고 번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뿔은 권위와 능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문맥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3장에서 이 본문을 해설하는 것에 의하면 광채가 났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지난 번 산에 올라갔을 때에는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때도 모세는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송아지 숭배 사건을 통하여 자신들의 실상을 드러낸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중보자 모세의 권위를 특별히 세워주셔야 할 필요를 아셨습니다. 모세가 이제 다시 전달할 십계명과 율법의 내용들, 그리고 성막을 지으라는 명령들이 모세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세는 너희를 위해서 세운 나의 종이요, 중보자다.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사건이 모세가 하나님께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했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여주신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도 물론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보자 모세를 통해서 당신의 말씀을 확증하시는 증거로 그 얼굴에 광채를 주셨습니다.

이 효력이 당장에 나타났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은 그의 얼굴의 광채를 보고 그에게 가까이 오기를 두려워했습니다(30). 아론과 장로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백성들이 모세에게 나아왔습니다(31).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율법의 모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였습니다(32). 이것은 충분한 권위를 가지고 행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32).

2. 사람들이 보기를 두려워했던 광채
정작 모세 자신은 자기 얼굴에 광채가 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29). 사람들이 가까이 오기를 두려워했던 것을 통해서 모세는 그것을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하나 질문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백성들이 왜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기를 두려워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는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자신들의 양심과 속을 꿰뚫어본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두려워했다. 자신들이 이 들은 언약의 말씀을 하나도 실행치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썼습니다.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 숭배사건을 통하여 자신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악을 절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존재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굴에 광채가 나는 모세는 전과 같이 십계명의 두 돌판을 양팔에 끼고 내려왔을 것입니다. 이 두 돌판은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상징했습니다. 이것은 곧 죄인에 대한 준엄한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모세?한편으로는 십계명의 돌판을 들고 있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반사하는 빛을 얼굴로 비추는?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모세의 얼굴에 있었던 광채는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는 아니었고, 단지 반사된 하나님의 영광이었는데도 백성들에게 이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에게 말하기를 마치고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33). 단지 그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에만 그 수건을 벗었고, 백성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이 그 광채를 볼 수 없도록 다시 수건을 썼습니다(34~35). 모세가 수건으로 자기의 빛나는 얼굴을 가린 것은 죄인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배려였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 얼굴에 반사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막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반사되는 광채를 보지 못함으로써 죽음의 두려움을 면하기도 하였지만, 사실상 잃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의 영광의 희미한 광채라도 보지 못함으로써 주의 형상으로 변하는 축복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문의 직분의 딜레마입니다(고후 3:7).

3.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고후 4:6; 마 17:1~8)
사실, 오늘 이 본문에서 중보자 모세의 얼굴에 주셨던 광채는 오실 영원하고 완전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드러날 영광을 예시하는 사건입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광채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라고 말합니다(고후 3:13). 모세의 영광은 반사된 영광의 빛이었다면 예수님의 영광은 본유적 영광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세 제자는 예수님께서 본래의 영광을 입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마 17:1~8).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마 17:2). 그때 제자들은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모세의 영광은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영광은 영원한 영광의 충만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이 말은 아시다시피, 죄인의 회심에 대한 구절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광채를 봄으로써 회심한다’, 혹은 ‘그 영광의 광채를 보는 것이 곧 회심이다’ 하는 것입니다. 물론 최초로 보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모세의 얼굴에 비추는 광채를 보았을 때 사람들은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 반사된 빛 앞에서조차 죄인들은 두려워하고 떨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의 충만하고 참된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를 보고서 구원을 받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대조가 보여주는 것은, 옛 언약이라고 일컬어지는 율법과 새 언약이라고 일컬어지는 복음 사이의 대조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차이에 대해서 “율법은 영광에 이르는 하나의 계단이라면, 복음은 영광의 정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백성들은 하나님과 늘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의 광채도 볼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 아래 있는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4.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직분(고후 3:7~16)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모세가 가졌던 직분과 자신이 가진 새 언약의 직분을 비교하면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고린도후서 3:7~18은 사실상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출애굽기 본문에 대하여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모세의 직분과 자신이 받은 직분을 비교합니다. 모세는 비록 중보자였지만, 정죄의 직분을 가진 자였습니다(고후 3:9). 이것이 율법의 성격입니다. 빛나는 얼굴로 내려오는 모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십계명 돌판이었고, 이 돌판은 그의 직분이 정죄의 직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그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돌판에 새겨진 율법의 글씨들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을 순종하게 하는 능력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것을 ‘의문(글씨)의 직분’이라고 말했습니다(고후 3:7). 그러나 이 직분이 비록 정죄의 직분이었을지라도 영광스러웠다고 말합니다(고후 3:7,9). 그것이 바로 모세의 얼굴의 광채가 의미하는 바였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받은 직분은 새 언약의 직분 곧 복음의 직분이었습니다. 이것은 영의 직분이고(고후 3:8), 의의 직분이었습니다(고후 3:9). 이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직분이었습니다. 돌에 글씨를 새긴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이 새 언약의 직분은 성령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에 새겨주신 율법이었습니다(렘 31:33).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러므로 정죄에 이르게 하지 않고, 의에 이르게 하는 의의 직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라질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입니다.

모세의 얼굴을 덮고 있던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었습니다(고후 3:14~16). 이 수건은 오직 그리스도께 가게 되면 벗겨지게 됩니다. 수건을 제거하는 것은 우리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수건이 벗겨진다고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이 가지는 영광입니다.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수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수건이 ‘마음을 덮었다’고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고후 3:15). 이 수건은 더 이상 모세의 얼굴을 덮은 수건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입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똑 같은 것입니다. 옛 언약의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율법 곧 옛 언약이 가지는 영광이 영원한 영광이 아니고 새 언약이 올 때까지 잠시 있다가 사라지게 될 영광인데, 모세가 수건을 씀으로써 백성들이 그 영광이 사라져 없어지는 영광임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후 3:13).” 모세는 이 율법의 영광이 참된 중보자인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사라져갈 영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죄인으로서 모세의 얼굴의 영광을 보지 못하였고, 모세가 수건을 쓴 후에는 그 영광이 사라져갈 영광이라는 사실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두번째 이유였습니다. 그러니 이 수건으로 말미암아 옛 언약의 영광이 사라지고 새 언약의 영원한 영광이 오는 것을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가진 딜레마였습니다. 그들이 옛 언약의 중보인 모세를 붙들고 있었던 반면, 새 언약의 중보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던 주된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라져갈 영광만을 여전히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라져버렸다는 사실 조차도 모른 채 말입니다.

5. 주의 영광을 보는 자는 주의 형상을 닮는다(고후 3:18).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생긴 것을 오늘 본문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라고 설명했습니다. 모세는 수건이 없이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 구약의 중보자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40일 40야를 보내고 내려오자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라질 영광 조차도 무서워서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수건이 없어졌다고 말합니다(고후 3:14).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고후 3:18). 모세의 얼굴의 광채는 오늘날 모든 신자들의 경험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 은혜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얼굴의 사라질 영광이 아니라 주의 영광을 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영광을 보는 자는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신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게 됩니까? 어떻게 신자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까? 어떻게 신자는 거룩하게 변화됩니까? 그 열쇠는 ‘주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덮고 있던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진 후에, 주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했던 그 기도를 기억해야 합니다(출 33:18). 신자들은 주의 영광을 보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본 자들입니다(고후 4:6).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주의 영광을 보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 영광을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4주 전 설교에서 원고에는 적어놓았지만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오늘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의 고유한 결과들 속에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드러내심으로써 나타나며 창조된 지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알리심으로써 나타나며 하나님의 무한한 충만하심을 피조물들에게 전달하심으로써 나타나며 그리하여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최상의 존경을 드리고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최고로 기뻐하는데서 나타나며 이런 것들이 합당하게 실행되고 표현됨으로써 나타난다...그 피조물들의 선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대한 지식과 그것들을 보는 것에 있으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하나님께 순응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에 있다...다른 말로 표현하면 참된 은혜요, 실제적인 거룩함이라 말할 수 있다(참된 미덕의 본질).
이 말을 조금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은 신자의 최고의 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셔야 합니다(롬 8:28). 곧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롬 8:29).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서 그 거룩함을 이루어가신다는 것이 모든 신자를 향한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저절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주고 행하게 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빌 2:13). 주 예수님의 얼굴의 영광을 보고서 회심한 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당신의 거룩한 법을 새겨 넣으심으로써 우리로 거룩한 소원을 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원은 참된 선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그 선은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대한 지식과 그것들을 보는 것에 있으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 하나님께 순응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이 지식은 머릿속의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체험적인 지식입니다. 즉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순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은혜이고 실제적인 거룩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받았다는 말을 종종 씁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된 은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고, 하나님께 순종함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읽을 때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우심을 보기를 사모하십시오. 이것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영광이 그 사람에게 반사되어 나타나고 그 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건이 벗겨져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모세가 했듯이 주의 영광을 보여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우리의 영광스러운 변화는 결코 이 지상에서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날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그 영광의 날을 기다립시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나날을 그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