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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86) - 성막,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

출애굽기 36:8-38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09-14

말씀내용
<성막,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 출 36:8~38



오늘 읽은 본문은 출애굽기 25장부터 31장에 걸쳐 하나님께서 상세하게 지시하신 성막이 드디어 세워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진 모든 예물이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였고(출 36:7) 마음에 자원하는 모든 기술자들이 준비되었습니다(출 36:2~3). 제일 먼저 지어진 것은 지성소와 성소로 이루어지는 성막(sanctuary)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25~31장을 다루는 강해에서 상세하게 내용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성막을 건축하고 모든 기구들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정교하게 만들어야 하는 예술가들과 기술자들을 위한 배려라는 것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다양하고 많은 재료들이 사용되었고, 그 순서들이나 규격들이 자세히 나옵니다. 성경이 명백하게 그 하나 하나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가르쳐주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상징이 가리키는 실재가 무엇이다라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서로 의견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물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미 제가 이전의 강해에서 설명드린 정도로 여러분이 이해하시면 그 상징성들은 충분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어떤 책이나 설명을 배우고 나서 지나치게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1. 밖에서 안으로 갈수록 더 아름답고 비싸고 좋은 재료가 사용되고 있다.
먼저 오늘 본문 전체의 구성을 보면 8~19절은 성막의 덮개를 만드는 내용이고, 20~34절은 성막을 둘러싸고 있는 널판 기둥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35~38절이 성막 안에서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과 바깥문 휘장을 만드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성막 덮개를 보면 성막 덮개는 네 겹의 천과 가죽으로 만들라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셨고 이들은 그대로 만들었습니다. 제일 안쪽 덮개 그러니까 성소 안에서 섬기는 제사장이 순금등대가 비추는 불빛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은 흰 세마포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정교하게 그룹을 수놓아 만든 천으로 씌워졌습니다(8). 그 위에 염소털로 만든 울(wool)을 재료로 한 막이 덮여졌고(14), 그 위를 붉은 물 들인 수양 가죽으로 덮었고, 마지막으로 맨 바깥에 해달 가죽으로 덮었습니다(19). 밖에서는 평범하고 칙칙한 색의 해달 가죽 밖에 볼 수 없었지만 안에서 섬기는 제사장은 성소의 천정에서 아름답게 세마포 위에 수로 새겨진 그룹의 형상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전체가 아주 컸기 때문에 여러 장을 이어 붙이는 형태로 되었는데 맨 아래 있는 세마포를 연결하는 데에는 금갈고리를 사용했고(13), 그 위에 있는 염소털 천은 놋 갈고리를 사용했다는 것도 주목할 수 있습니다(18). 우리는 여기서 밖에서 안으로 갈수록 더 아름답고 비싸고 좋은 재료가 사용되고 있다는 원리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여기서 만이 아니라 성막 전체에 걸쳐서 보게 됩니다. 이어지는 널판 기둥을 만드는 일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성막 안에 있는 기구들은 금으로 만들어진 반면, 성막 뜰에 있는 기구들을 만드는데에는 놋을 사용한 것입니다. 밖에서는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완전하게 볼 수 없지만,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될수록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막의 구조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언약궤의 덮개인 속죄소, 그룹 날개 사이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곳이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것입니다. 성막 건축물이 밖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안으로 가까이 가게 될수록 귀하고 아름다운 재료가 사용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막의 모든 구조는 모두 성막의 중심은 지성소 그 안에 있는 언약궤와 속죄소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막의 덮개는 그 넓이로 볼 때(대략 13x20m) 충분히 무거웠을 것이므로 이것을 떠받치는 기둥이 든든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각목(아카시아나무의 일종)으로 4.5m(10규빗) 높이와 67cm(1.5규빗) 넓이의 널판을 금으로 싸서 남쪽과 북쪽에 20개, 성막 뒤편인 서쪽에 6개 그리고 연결 모퉁이에 다른 널판의 두께의 2배가 되는 널판을 각각 하나씩 두 개를 세워 모두 48개의 널판을 세웠습니다. 이것들은 은받침에 의해서 아래 부분을 고정하였고 바깥 둘레에는 조각목을 금으로 입힌 띠를 다섯 줄로 둘러서 연결시켜주었습니다. 이것이 20~34절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마지막으로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과 바깥문의 휘장을 설명합니다(35~38). 이 두 휘장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흰 세마포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래에는 금갈고리를 달아서 늘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다만 안에 있는 휘장은 네 개의 성막 둘레의 기둥과 같은 것으로 네 개의 기둥을 세웠고, 바깥문에는 다섯 개의 기둥을 세운 것이 달랐습니다. 저는 전에 이 휘장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 휘장에 수놓아진 그룹은 하나님의 ‘출입금지’ 사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출입금지 사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사건을 통해서 내려지게 된 것이라고 말씀드렸지요(마 27:51).

2. 예수 그리스도가 성막의 완성이시다.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 바,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중앙에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고 거기 거하시겠다고 하신 것과 동일하게, 죄인된 인간 세상의 중앙에 오셔서 인간들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친히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특별히 성령님께서는 요한복음 1:14을 통해서 그것을 너무나 의도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거하시매’라는 단어는 ‘스케노’라는 헬라어인데, 이 단어의 원의미는 ‘천막을 치고 거하다’입니다.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바로 성막이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으로 가면 주님께서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요 2:19). 주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요 2:21). 사흘 안에 부활하실 것을 겸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 그리고 이후에도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알려면 방법이 딱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성막으로 가야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하게 허락된 방법이었습니다. 거기서만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하고 죄사함의 은혜를 구약의 한계에서나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가 바로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 방법은 변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총을 받기 원한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절대적인 의미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6).

이렇게 성육신하신 주님께서 성막이 가리키는 실재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대에 의해서 파괴되고 지금까지도 다시 세워지지 못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내셨습니다. 실재가 왔으니, 그림자는 이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으므로 더 이상 성전 제사가 드려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성막의 덮개를 관찰하면서 본 원리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밖에서 안으로 갈수록 더 아름답고 비싸고 좋은 재료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동일하지 않습니까?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에 사람들은 겉으로, 육안으로 볼 때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저 한 인간,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슬프게 죽은 한 인간을 봅니다.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아무 것도 그에게서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를 싫어했습니다. 빛이 와서 어둠 속에 비치자 어둠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빛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인용한 요 1:14 말씀대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고백하는 것은 믿음의 눈을 열어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보게 될 때, 고백하게 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저주를 하지만,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그를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밖에서 보느냐, 안에서 보느냐? 육안으로 보느냐, 믿음으로 보느냐는 차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막이시고, 성막의 완성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3. 교회가 성전이다.
놀랍게도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이것은 바로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교회는 지어져 가는 성전이라고 사도 바울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전이 되셨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으니 교회가 성전임을 당연한 것입니다(엡 4:12).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는 성전’입니다. 사도는 또 이렇게 씁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교회는 성전입니다. 어떤 학자는 교회가 성막이 아니라 성전이라고 한 의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막은 임시 거처이지만, 성전은 영구성을 나타낸다. 신자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계신 하나님은 결코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16). 신자 그리고 교회는 개인적으로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교회도 성막과 똑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확증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가 교회를 볼 때에도 참 약하고 결점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막연히 겉으로 보면 교회처럼 우습고 결속력이 약한 조직도 없습니다. 구성원들도 다 뛰어나고 탁월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어져 가는 성전’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공사 중인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창조의 최고의 걸작품인 하나님의 처소로서, 성전으로서 우리는 만들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합니까?

첫째는 참아 주어야 합니다.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참아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한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습니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공사가 마쳐지는 때를 기다리십시오.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에 대한 마음일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대한 성도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성전은 성전이로되, 지어져가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둘째로 여러분은 점점 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성도는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되면 보게 될수록 교회 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믿음으로 보는 것’은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성경의 렌즈로 교회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는 내가 거하는 성전이다’라고 말씀하신대로, 교회에 대한 모든 영광스러운 진리를 가르쳐주시는대로, 교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눈이 열려지기를 구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십시오. 오늘날과 같이 성경문맹시대를 사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적 판단력, 비판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발달되었고 예민해 진 것 같은데, 문제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무감각하고, 또 성경이 우리의 사상과 안목과 관점을 변화시키는 역사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교회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기에, 교회를 섬기고, 교회를 세워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으로 부름을 받은 저의 인생에 한 없는 위로를 얻습니다. 바울 사도가 밝히듯, 교회 자체, 그리스도인 자신은 대단하지도 않고 훌륭한 어떤 점을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저를 봐도 그렇고 우리 교회를 봐도 그렇습니다. 외면적으로는 마치 해달 가죽으로 덮은 성막 지붕을 보는 듯 합니다.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누가 봐도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 속에 감추인, 질그릇이 담고 있는 보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는 그리고 신자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교회를 보십시오.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좌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시오. 성소 안에서 순금 등대가 비추어주는 빛으로 빛나는 금향단과 금제단 그리고 천장에 아름답게 수놓아진 그룹의 형상을 보았고, 더 깊게는 휘장을 넘어 지성소에 들어가 언약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 위에 금으로 조각된 두 그룹의 형상 사이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를 보십시오. 이 깊은 자리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셋째로 여러분은 한 분 한 분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에, 여러분의 몸을 잘 간수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의 권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돌판에 친히 기록하신 말씀을 주셨고 그 언약의 돌판을 언약궤에 보존하였고, 언약궤는 성막의 가장 깊은 자리인 지성소에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든 신자의 마음판에 성령으로 당신의 말씀을 기록해주심으로써 거듭나는 은혜를 베푸셨고, 그 안에 거하심으로 신자를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신자는 그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로 행하는 모든 음행과 잘못을 피해야 합니다.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할 것,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것을 보지 않아야 하고, 합당하지 않은 것을 듣지 않아야 하며, 합당하지 않은 것을 만지거나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연합을 요구하는 모든 관계에서 하나님의 성전인 신자는 비기독교인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동업을 하는 것은 영적 연합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 연합을 요구하는 관계입니다. 결혼뿐 아니라 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는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 몸의 모든 지체가 다른 합당하지 않은 것과 연합적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을 성경은 배교이며 우상 숭배라고 정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성경의 렌즈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 깊이 그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는 지속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참아주고 사랑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교회, 그 완전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전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