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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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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에필로그) - 임재의 대가

출애굽기 33:1-3, 40:34-38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2-10-19

말씀내용
<출애굽기 에필로그: 임재의 대가> (출 33:1~3; 40:34~38)




1. 왜 에필로그가 필요한가?
우리는 지난 주 금요일로 <광야교회의 탄생>이라는 큰 주제 아래서 90번에 걸친 출애굽기 강해를 마쳤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통해서 실로 광야교회라 일컬어지는 그 특별한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왜 또 출애굽기 에필로그라는 제목으로 한 번의 설교를 더 하는 것일까요? 사실 지난 주일 설교를 마치고 기도하는 가운데, 꼭 한 번 더 짚어야겠다고 생각한 주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주제는 하나님의 임재의 대가라는 주제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결코 아니겠지만, 이것을 한 번 다루어야만 출애굽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그 논지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2. 영광스러운 시작으로 끝나는 출애굽기
우리가 지난 주에 상고한대로 출애굽기의 마지막은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 가운데 거하실 처소인 성막이 완성되었고, 완성된 성막에는 구름이 가득함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충만한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와 백성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당신께서 이 광야교회의 여정에 늘 함께 계시고 그들을 목적지까지 인도하실 것임을 보증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특권이고 축복입니다.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여정, 이것이 교회, 곧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 혼자 걷는 시간이나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물론 고생합니다. 외롭고 힘든 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그 사실 하나로 자기의 인생을 영광스러워 합니다. 우리는 오는 11월 말부터 그 여정에 초점을 맞추어 <천로역정>을 공부할텐데 그때 그 여정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에 대해서 많이 나눌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에필로그를 통해서 나누고 싶은 것은 이처럼 영광스러운 시작, 하나님과의 동행, 하나님의 임재가 어떻게 주어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어떻게 이토록 영광스러운 시작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3.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시작된다.
애굽에서 노예가 되어서 거의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가던 소망 없는 한 민족에게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광야에서 40년의 인생을 보낸 80세의 모세였습니다. 소망 없는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릇은 소망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또는 광야교회의 시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은 애굽도, 앗수르도, 바벨론도 아니었고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는 히브리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구원의 영웅은 보잘것없는 80세의 연로한 목자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구원하시는 최적의 조건이고 환경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이런 히브리 민족을 택하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7~8).” 광야교회는 이런 구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구원의 이야기는 결코 어떤 인간에게 돌아갈 공로 같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재앙은 하나님의 재앙이었고, 홍해를 가른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구원이란 소망 없는 인간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구원의 사건이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지 않고 광야로 나올 수는 없습니다. 홍해가 없었다면 물론 요단강도 없습니다. 오늘날의 조국 교회와 미주 이민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과거 유럽 교회가 경험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구원 없이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무서운 현실입니다.

4.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는 죄와 더러움의 문제
우리는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흥분을 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기적의 감격은 불과 3일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광야로 들어가 3일 길을 행하면서 물을 얻지 못한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15:22~24). 애굽에서 나온지 한 달 반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또 먹는 것이 시원치 않다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16:2~3).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나와 같은 기적적 공급으로 그들을 먹이기 시작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을 일관되게 행하셨습니다. 그저 이런 불평과 원망의 연속이었습니다. 감사를 하루 하고 나면 한 달을 불평으로 사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들이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그들이 매일 매일을 기적의 체험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영적 성숙을 보장해주지는 않았습니다. 무서운 말이 아닙니까? 아무리 많은 은사를 받고 큰 체험을 가진다 해도 그것이 곧 그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싸워야 하는 영적 싸움이고, 그리스도인은 이 싸움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능력있게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 거룩을 이루어가는 싸움입니다.

32장은 이 싸움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후에 자기들의 시간표에 따라서 내려오지 않자, 기껏 백성의 장로들이 행한 것은 아론에게 압력을 행사해서 아론으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만들게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출애굽기 광야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였습니다. 우리가 33:1~3에서 읽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그들과 동행하게 하여 그들이 원하는 요구인 가나안 땅은 주실 것이지만, 친히 그들과 함께 가시지는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 패역하고 더럽고 죄악된 백성들과 함께 가시다가는 그들을 도중에 다 진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처리해가시는 방식을 주목해 보십시오. 먼저 하나님은 산 위에 있던 모세에게 이 백성을 다 진멸하고 모세에게 큰 나라를 새로 만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2:10). 하지만 모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사 그 화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두번째,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려 그 가루를 물에 타서 이스라엘 자손에 마시게 함으로써 그들이 행한 우상 숭배 죄에 대한 결과를 담당하게 하였고 지도자 아론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세번째로 모세가 하나님의 편에 설 자는 나오라고 하니 레위 자손이 나왔고 모세는 이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자들을 칼로 죽이게 합니다. 그날에 3000명이 죽었습니다(32:26~28). 상상할 수 없이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네번째로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백성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더라도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구했습니다. 32:35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백성을 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전염병과 같은 것으로 치심으로 많은 백성이 더 죽게 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풀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33:1~3에 하나님은 더 이상 이 백성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다 상고한 말씀들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이 너무 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때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면 하나님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옳고, 우리가 판단 기준이고, 우리가 어느 정도 하나님과 만사를 바르게 보고 이해한다는 교만이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어떤 것인지 거의 알지 못한 채,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또 알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역사의 기록을 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과 교양과 이성으로 하나님을 잴 수 없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과 상식만 주시면 되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야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십니다.

5.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는 심판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본질상 죄에 대하여 진노와 심판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죄가 거룩하고 무한히 영광되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크기에 상응하는 형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요구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완전하게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의 기준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는 선한 열심을 품고 온 족속을 준비시켜서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오다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소들이 뛰는 바람에 웃사가 하나님의 궤가 넘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손을 댓다가 즉사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보였던 반응을 생각합니다(삼하 6). 다윗은 분노했습니다(삼하 6:8).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삼하 6:9). 이런 반응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가는 것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쓴 것인데, 이런 식으로 흥을 깨버리는 하나님이 그는 두려웠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곁에 두는 것이 달갑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언약궤는 그 사이에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메어가서 거기 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그 소식을 들었고, 또 왜 그런 참사가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후에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수레에 싣고 옮기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 중 고핫 자손이 채를 꿰어 운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대상 15:2,13).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하여 언약궤를 결국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됩니다. 그때 다윗은 기뻐서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가 출애굽기의 이야기와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두 이야기를 통해서 동일한 교훈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멋대로, 자기 식으로, 자기 편의에 따라서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쉽게 원하는대로 좌우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저 달라고 하면 되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모든 요구를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는 구분된다,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본질상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어떤 존재와도 구별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저 쉽게 하나님과 동행한다, 하나님의 임재 운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고,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죄에 대해서든지 진노와 심판을 정당히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본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더러움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정직하게 대면한다면, 우리는 출애굽기의 결론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자기를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다 진멸하셨다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출애굽기의 마지막 5구절은 놀랍고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만든 성막에 충만한 영광으로 임재하심을 가시적인 구름으로 보이셨으며, 구름이 떠오르고 떠오르지 않음으로써 광야교회에 늘 함께 하고 그들의 모든 걸음을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죄인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동행, 의로우신 하나님의 임재가 당연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6. 임재의 대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 피흘림 그리고 순종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대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모세의 중보기도도, 모세의 희생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책에서 지우신다고 할지라도 이 백성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구했었지만,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그가 비록 훌륭한 마음으로 기도했지만 그는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금송아지 숭배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은 먼저 3000명을 죽이셨고, 그후에도 백성을 쳐서 많이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임재의 대가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저 죄에 대한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의 행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33장이 그것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대가는 제일 먼저 유월절 어린 양으로 거칠게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장자가 죽는 대신,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죽이고 그 피를 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물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하는 모형입니다. 그리스도는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요한복음에 의하면 바로 그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그 시각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성막이 또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놀라운 모형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는 성막이 필요했습니다. 성막에 있는 모든 기구들이 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모형들입니다. 사실 성막이야말로 피비린내가 그치지 않고 진동하는 죄의 대가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조건을 분명하고 생생하게 날마다 백성들에게 증거해주었습니다. 피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진리를 보여주었습니다(히 9:22).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임재의 대가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흘리심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단순히 속죄제사 이상이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에 대한 배상만을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3:25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주님은 속죄제물 이상의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화목제물의 의미는 단순히 죄의 값을 치루는 배상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하게 다 가라앉혀드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훨씬 더 인격적인 것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화가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완전하게 다 풀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주님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죽기까지 완전한 순종을 보이심으로써 아담 이래 모든 인류가 실패한 율법의 완전한 순종을 이루셔서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의를 성취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들입니다. 이것이 임재의 대가입니다. 출애굽기는 이것을 많은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이것을 보고 알고 깨닫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광야교회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이제 39년의 남은 여정을 걷게 될 것입니다.

7. 주님의 임재를 누리는 인생 여정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벼워질 수 없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기에,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고, 하나님의 동행을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거북함을 느낄 때가 솔직히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대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구원은 거저 받는 것이다고 말할 때, 우리 편에서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의 가치를 알지 못할 것이고, 여전히 자기 편의를 따라,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믿으려는 태도를 가질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가 주인인 것이지요.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을 아십니까?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거룩하신 당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고 죄인들 가운데 거하게 하셨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매달아 아담 이래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모든 죄인의 죄를 향한 진노와 저주와 심판을 행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를 아십니까? 백성들 3000명이 죽고, 그것도 모자라 전염병으로 쳐서 더 많은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긴 죄로 죽어간 것을 심하다고 말하고, 자기 마음대로 섬길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고 언약궤를 손으로 잡으려고 했던 웃사를 죽이고 분위기를 깨뜨린 것에 대하여 분노하는 수준에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출애굽기의 마지막 처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말할 수 없는 은혜로 알고 광야 교회의 여정을 시작한 사람입니까? 혹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난 후에, 다시 거룩하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기로 하고 그 앞에서 기뻐 춤추는 그런 자리에서 살아가십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오셔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며,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걸음을 인도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불가능한 상황이며,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그 하나님의 임재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므로 그 아들의 죽으심과 순종의 대가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뿐 아니라 우리의 남은 모든 인생 여정 가운데 임재하시고 동행하신다는 이 영광스럽고 복된 사실을 그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누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내가 아무 것도 알기를 원치 않으며,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내 인생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이런 고백은 임재의 대가를 성경대로 아는 자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남은 생애 충만하게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