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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1) -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1:1-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6-10

말씀내용
갈라디아서는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마그나 카르타(the magna carte)라고 불리우는 성경입니다. 이 위대한 서신은 신약 성경 가운데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복음을 변증하는 성경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갈라디아서는 바울 사도의 13개 서신서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성경이기도 합니다. 바울 서신 중에서 유일하게 갈라디아서만이 구체적인 한 도시의 교회를 지목하지 않고 아주 넓은 지역의 이름으로 쓰여진 성경입니다. 갈라디아는 지금의 터어키 중부 지방에 해당하는데, 그 지역이 넓어서 북부와 남부로 또 구분이 되게 됩니다. 특별히 바울 사도가 북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편지를 썼는지, 혹 남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편지를 썼는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만일 남부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에게 썼다고 한다면 그 지역은 바울 사도가 1차 전도여행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비시디아 안디옥(행 13:13~52), 이고니온(행 14:1~5),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행 14:8~19)와 더베(행 14:20~21)를 포함하는 지역이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서 유대인들에게 모진 핍박을 받았고 루스드라에서는 돌로 쳐 거의 죽게 된 지경에도 이르기도 하였습니다(행 14:19; 고후 11:25). 그러면서도 바울 사도의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제자 디모데는 갈라디아에 속한 루가오니아 지방(더베와 루스드라)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제2차 전도여행에서 다시 더베와 루스드라를 방문하여 디모데를 제자로 삼아 동행하게 됩니다(행 16:1~2). 그러나 북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썼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바울 사도의 2차 전도 여행(행 16:6)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지지만, 자세한 정보는 사도행전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사도행전에 그 세부적인 내용이 많이 나타나있는 남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시기의 문제도 결정이 됩니다. 바울 사도가 이 서신을 쓴 것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이후가 됩니다(행 14:26~28). 이것은 바울 서신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진 서신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 이전인가 이후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학자 간에 이견이 많은 문제입니다. 이런 점들로 인해서 갈라디아서는 매우 논란이 되는 서신서입니다. 그래도 예루살렘 회의가 AD 49년에 있었다는 것은 거의 일치하는데, 그렇다면 갈라디아서는 AD 49년 전후로 쓰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모든 성경이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갈라디아서는 복음을 율법과 대조하고, 은혜를 행위와 대조하여 설명함으로써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이런 유익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이 갈라디아서를 상고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배경
갈라디아서를 바울 사도가 쓰게 된 이유는 그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유대주의자들인 거짓 교사들이 와서 바울 사도가 전했던 복음을 왜곡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일이 바로 오래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놀라움과 또 한편으로는 분함을 가지고 이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서신은 다른 어떤 바울 서신에서 볼 수 없는 격렬함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상상해볼 수 있도록 Timothy George 는 이런 편지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를 세우고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갈라디아에 보내진 거짓 교사들의 편지의 가상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우리는 형제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참되고 살아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그렇게 좋은 출발을 하게 된 것을 기뻐하며, 또 한편 복음의 중요한 내용 가운데 일부를 바울이 빼놓지는 않았을까 우려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임명하시고 세우신 사도들로부터 지시를 받고 있으며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바울도 최근에 갑자기 나타난 친구이기는 합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께서 계실 때 동행하지도 그리고 예수님께서 임명하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을 그친 후에 예루살렘에 와서 참 사도들로부터 복음의 기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지금 전하고 다니는 메시지는 사도들의 것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가 할례에 대해서 언급 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할례는 여러분같은 이방인들이 새 이스라엘이 되려고 할때 지나야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시지 않고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할례는 세례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아니 더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율법의 이 거룩한 규례를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율법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모범이 되신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지키심으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렸다면 우리도 의당 그래야 할 것입니다.”

이 편지는 먹혀들었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들을 환영했으며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반응하여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느 서신과 마찬가지로 논쟁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왜 이렇게 논쟁적인가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진리는 결단코 오류와 대결하지 않고는 명료하게 제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신약성경이 논쟁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알 것은 그중에서도 갈라디아서는 특별히 더 논쟁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복음의 내용이 명료하게 설명되는 것입니다.

문안(1~5)
보통 당시 서신의 문안 형식에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발신인과 수신인이 소개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신을 발신인으로 밝히면서 그저 형식적인 관용구로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1절입니다.

사도의 기원은 하나님(1절)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 사도는 자신이 사도다 라고 이 위대한 서신의 인삿말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도란 말에 두 가지 용례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란 말이 사용된 것은 빌 2:25에 에바브로디도를 가리켜 사도(한글개역성경에는 ‘사자’로 번역되어있음, NIV, ‘messenger’)라고 한 것이나, 고후 8:23에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모금을 위해 보내는 사람들을 ‘사도’(한글개역성경은 ‘사자들’이라고 번역되어있음, NIV ‘representatives’)라고 지칭한 것도 같은 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사도는 특별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셔서 임명하신 자들을 의미합니다. 엡 2:20에서 말한 바,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는 의미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신약성경의 저자들이며, 그리스도께서 직접 부르신 자들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인간에게서 기원하지도, 인간의 수단을 통한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거짓 교사들의 문제제기를 의식하고서 바울 사도가 이 서신을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도직은 태생적으로 받은 직분이 아니고, 또 어느 인간이나 인간 집단이 선출한 것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나 요한 또는 야고보와 같은 사도들에 의해서 선출되거나 임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뽑아서 보낸 대표도 물론 아닙니다. 바울의 사도직은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 곧 성자와 성부로부터 기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사도직은 누군가에 의해서 계승될 수도, 또는 바울 사도가 후계자를 임명할 수도 없는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사도가 된 것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도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세우신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또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십니다.

바울 사도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신 사도라면 그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해주는 것이 됩니다. 바울 사도의 권위는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서신서가 단순히 바울이란 인물이 쓴 역사적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근거가 됩니다.

2절에 수신자가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라고 표현되어있습니다. 한 교회가 아니라 넓은 지역의 여러 교회들?우리의 가정대로라면, 비시디아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과 더베와 같은 도시에 있는 교회들입니다?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 사도는 3절에서 은혜와 평강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영광이 하나님께 있을찌어다라고 합니다. 즉, 너희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그리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습니까? 바로 4절의 사실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4절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구원의 사역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하지만,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4절)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매우 간략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은 주관적이기보다 객관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역사에 닻을 내리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에 기초합니다. 그것은 루터가 표현한대로 ‘우리 자신의 밖에서’(outside of ourselves) 일어난 일입니다. 복음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계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성령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해주시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 자신의 밖에서 일어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시공간 안에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독자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요 5:19,30; 8:28). 여기서 바울 사도는 구원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만의 사역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합작으로 일어난 일임을 보여줍니다. 둘째로, 구원의 목적을 설명합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체계가 기본적으로 마귀에게 속한 것임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이며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엡 6:10)이고, ‘이 세상 신’(고후 4:4)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성경은 그 신에게 복종하고 충성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충성의 대상이 바뀐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구원은 그 마귀의 권세, 그리고 이 악한 세대로부터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세째로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구약 레위기에 있는 속죄제사를 암시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갈보리로 가는 것입니다.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서 우리는 결코 은혜와 평강을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그의 서신서의 중심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보통 바울 서신의 공통적인 특징은 문안이 나오고 나면 이어서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나오거나 그들로 인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 사도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서신은 바울 서신 가운데 갈라디아서가 유일합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마음을 표현해주는 바가 큽니다. 그는 어느 서신서에서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책망입니다. 6절은 한 마디로 ‘나는 충격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6~9)
6절부터 9절에는 놀라울 정도로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른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는 각각 다른 형용사와 전치사들이 사용되어서 표현되어 있지만,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처음에 갈라디아교회에게 전해주었던 그 복음의 내용과 다른 것 즉 거짓 교사들이 와서 할례와 율법 지킴을 그들의 구원의 조건에 더해주었던 그 가르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기에 현혹되었고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충격을 받은 일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배교행위
그들이 이렇게 넘어간 것은 배교 행위요, 변절 행위였습니다. 이 변절은 그리스도의 복음?바울 사도가 전했던?을 버리지 않고서는 절대로 거짓 교사들이 전한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은혜로 부르신 그리스도’를 떠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로 하여금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너무나 빨리 그렇게 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같이 속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유래가 있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을 때에도 모세는 그들을 향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신 9:12,16).
신 9:12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내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
신 9:16 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급속히 여호와의 명하신 도를 떠났기로

바울 사도는 거의 이 본문을 인용하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불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지만,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도를 ‘속히’ 떠나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급속히’ 여호와의 명하신 도를 떠난 행위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갈라디아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모세와 같은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모세는 두 돌판을 던져 깨뜨렸습니다?갈라디아 교회에게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결코 문안의 형식 뒤에 갈라디아 교회를 위한 기도나 감사가 들어설 틈이 없이 바로 책망을 하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다른 복음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것이 복음이어서가 아니라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바 ‘복음’이라고 하기 때문에 다른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전해주었던 복음만이 참 복음입니다. 그런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울의 사도직분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그것을 1장의 나머지 부분과 2장을 통해서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대적은 교회 안에 있는 ‘다른 복음’이다.
교회의 적은 언제나 밖에서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세력을 펴고 있는 거짓된 가르침 곧 다른 복음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교회를 흔들고야 맙니다. 교회를 흔들지 않는 거짓 복음은 없습니다. 교회를 그대로 두고 복음만을 흔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이 낳았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이 약화되고, 교회가 약화되는 이면에는 바울 사도가 지금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복음의 진리를 위한 싸움을 교회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복음의 내용입니다. 7절에서 ‘어떤 사람들’ 바로 거짓 교사들인데 이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교회)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자들입니다. 왜곡한다는 말은 어떤 진리의 체계가 복음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복음은 하나의 진리의 체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종종 놓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해해야 할 내용은 바울 사도는 2장 후반부에서 4장까지 죽 설명을 해줍니다. 그리고 앞서 4절에서 바울 사도는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설명하였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 자신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했습니다. 단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 외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더해진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왜곡(변하려)이요, 교회를 요란케(흔드는) 한 행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끝내지를 않습니다.

저주 선언: 메신저는 메시지로 판단하라.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심한 소리라고 일컬어지는 본문이 바로 8절과 9절입니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는 2번이나 저주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옥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더 이상 센 표현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원래 자신들이 전해주었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이 천사라 할지라도, 그리고 혹 자신이라고 해도 예외없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두번씩이나 선포합니다. 이 말은 지금 갈라디아 교회를 현혹한 거짓 교사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 모습으로 그들에게 접근해서 사역을 하고 있든지 상관없이, 그들의 그런 훌륭한 모습들은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고 예외없이 그들이 전했던 메시지에 의해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단이라고 해서 늑대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자 같은 모습을 하고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로 그를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루터는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베드로나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것은 사도적이지 않은 것이며, 가룟 유다나 대제사장 안나스나 빌라도 또는 헤롯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전한다면 그것은 사도적이다.” 메신저는 메시지로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이 즐기는 것 중심의 문화(entertainment driven culture)에서는 설교를 ‘내가 어떻게 느꼈는가’ 또는 ‘설교가 우리의 산만한 주의를 집중시킬만 한 것이었는가’ 심지어는 ‘즐거웠나’로 평가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얼마나 카리스마틱 한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신실하게 복음을 전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지루한 설교방식과 준비되지 않은 설교를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빌 1:17~18의 관용은 어디에?
빌 1: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쓸 때에, 자기가 갇힌 틈에 오히려 시기심의 동기로 복음을 더 열심히 전하는 자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그들이 어떤 동기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내가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쉽지 않은 그런 관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의 이 본문에서 우리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들의 동기나 인품이나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두 교회가 서로 경쟁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그려보게 합니다. 경쟁 자체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서 전파되는 복음이 참된 복음의 내용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도 복음이 전파되게 하십니다. 이 결과가 그들의 동기를 정당화해주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동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지요. 그리고 우리의 태도나 인품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들이 다 중요한 덕목들이지만, 메신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지이며, 아무리 다른 것들이 다 좋다고 해도 그것이 메시지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다른 것은 다 천사처럼 훌륭했을지라도 메시지가 거짓 복음이었던 이 교사들을 향하여 저주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이 중요하지, 교리가 무슨 문제인가?: 바른 교리는 성화의 기초
이런 생각은 역사 속에서 매우 뿌리깊은 문제였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어느 정도 잠재되어 있는 생각일 것입니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던 저에게도 정말 마음 속 깊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을 한다는 신학자들에게서는 어떤 윤리의식이나 멋진 인품 같은 것들이 종종 느껴지는데, 저희를 가르쳐주시던 학교의 보수신학을 하신다던 분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일반적으로 보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리는 있는데 삶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삶이 중요하지 교리야’ 하는 식의 생각을 굳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바른 교리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성화의 기초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이해는 분명히 머릿속의 이해로 끝날 이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교리를 가지고 무릎을 꿇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말했습니다.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도들을 통해서 주어진 참 복음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암송도 할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 말씀이 확 드러나고 명료해져서 피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까지 그렇게 해야 하고, 결국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복종하게 되기까지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각을 얻어내기까지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원한 동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바울 사도는 자신의 동기를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10절입니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아마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바울 사도의 동기까지도 의심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자신의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밝힐 필요를 느꼈습니다. 지금 그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 때문이지, 결코 갈라디아 교인들을 기쁘게 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까지 심한 소리로 서신을 써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충만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을 인식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잠시도 이 일을 모르는 채 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확고부동한 삶의 태도를 증거하실 수 있으십니까? 살다보면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기를 다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 더 이상 좋기만 해서는 안될 때가 있다고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부모는 다 그저 웃고 잘 해주는 부모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매를 들어야 할 때가 있고, 얼굴을 붉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 할 상황에서 그렇지 않다면 그 부모는 신뢰할 수 있는 좋은 부모이기를 거절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고통스러운 일인 줄은 바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넘겨버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삶의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금송아지를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온 모세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모세가 형 아론과의 관계를 생각했다면, 그리고 자기가 아끼던 그 백성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생각했다면 그는 그저 타이르고는 갈 길을 가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계속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돌판을 던졌고, 아론을 책망했으며,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이 나서서 죄를 지은 형제들을 죽이게 하였습니다. 비참한 살륙으로 3000명의 동족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인간과의 관계를 좌우하게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그의 원칙은 바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사도로서 한 성도로서 그의 삶을 잘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 자유주의 신학이 일어나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던 84년 전에 그레샴 메이천(Gresham Machen) 목사님은 고전적 명저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저술하였습니다. 마치 갈라디아서를 썼던 바울 사도와 같은 심정으로 쓴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갈등의 시대 가운데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테이블을 중심으로 진정으로 모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진정한 목사다운 목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도시들 가운데서 그러한 교회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의 싸움에 지쳐서 영혼의 신선한 환기를 위해서 교회를 찾는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발견하겠습니까? 슬프게도, 너무나도 흔하게, 그 사람은 겨우 세상의 소동만을 발견할 뿐입니다. 설교자는 앞으로 나오되, 묵상과 권능의 비밀스런 장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영광에 의해서 인간의 지혜가 저 멀리 뒤쪽으로 밀려나 버린 채가 아니라, 오늘의 세상적인 문제에 대한 인간적인 의견들이나 죄의 커다란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들만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런 것이 설교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위험과 잘못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가 거짓된 복음을 무분별하게 용납하고 관용하는 잘못입니다.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과 하나됨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그저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갈라디아에 왔던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도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용납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갈라디아 교회가 범한 잘못이었습니다.
두번째 잘못은 보다 교묘한 것입니다. 교리적 순수함이 교회의 삶의 목적이고 전부라고 여기고는 우리 안에서의 형제 사랑이나 다른 교회 전통 속에 속해 있는 형제들을 사랑해야 하는 요구를 무시하는 잘못입니다.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길만이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강이 보장되는 길이며, 이것만이 여러분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길입니다. 갈보리의 언덕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서는 우리의 영원에 대하여 아무런 약속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어린 성도들에게: 미혹함을 받지 마십시오.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고 변하게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십시오. 복음의 메시지를 굳게 붙드십시오. 그 말씀에 견고히 뿌리를 내리십시오. 평생의 삶을 사는 동안, 복음의 메시지를 붙잡고 주님앞에 순종하는 삶을 사십시오.

헌신된 성도들에게: 진리를 위한 싸움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셔서 복음의 진리를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다른 것이 이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시고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음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