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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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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2) - 오직 하나의 복음

갈라디아서 1:11~2: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6-17

말씀내용
갈라디아서를 쓰는 바울 사도는 처음부터 ‘다른 복음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자신이 처음에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전했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오직 하나의 복음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특별히 자신의 삶을 소개하는 것이 매우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이렇게 상세하게 하는 곳은 서신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회심과 어떻게 자신이 오직 하나의 복음을 얻게 되었는가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배웠거나, 공부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1:12) 하는 것이 바울 사도가 이 본문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형제들아’라고 시작합니다. 바울 사도가 서신서에서 이렇게 부를 때에는 특별히 주목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화를 내는 이유가 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지어낸 것이거나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배우거나 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1장 11절과 12절에서 앞으로 전개할 내용의 서론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복음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주어진 복음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교회를 판단하고, 목사를 판단하고, 성도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유일한 기준입니다.

1. 바울의 구원 이전과 이후
먼저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바울 사도가 자신의 회심 이전과 이후를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구원 이전과 이후가 너무나 대조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삶에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A. 이전(1:13~14): 내가…
13절과 14절에는 회심 이전의 바울 사도 자신의 삶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주어는 바울 자신입니다. ‘내가’가 주어입니다. 그는 회심 이전에 유대교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나아가서 잔해하였습니다. 핍박하고 잔해하였다는 말은 ‘쫓아다니면서 파괴하고 뒤집어놓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과 유대의 경계를 넘어 다메섹까지 쫓아갔던 것입니다. 그는 동족인 유대인들 가운데 자기의 동년배들과 비교할 수 없도록 ‘지나치게’ 믿었던 사람입니다. 조상의 유전, 이것은 율법 외에 유대교에 내려오는 덧붙여진 많은 경건의 규칙들이었습니다. 그는 이것도 열심으로 지켰던 인물입니다. 그는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었습니다.

B. 이후(1:15~16): 그분이(하나님)…
그러나 15절은 회심이란 사건과 함께 그의 인생에 반전이 일어나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주어가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그의 인생을 이후부터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여 가시고 그는 순종하고 따라가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회심 이전과 이후의 삶을 보여주는 너무나 중요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회심과 구원에 대한 너무나도 놀라운 설명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그러나’가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회심이란 그저 종교를 바꾸기로 결정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내가 결정하는 것 뒤에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역사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서 행하신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2. 구원 설명(15~16)

A. 택정하심?구별하심
첫번째로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택정하셨습니다. 언제인가 하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라고 표현합니다. 여기 택정했다는 표현은 구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별하시는데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순종이란 행위를 통해서 그 결과로 구별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를 구별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이 택정하심이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을 확증해주는 것입니다. 또 한편, 이런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불순종과 하나님께 대한 저항과 반역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별을 지연하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다고 해도 우리의 의지의 결단을 통해서 하시는데, 이것은 사실 신비에 속한 영역이라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구별하셨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불순종이 그것을 얼마나 막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B. 부르심
두번째로 그렇게 바울 사도를 택정하시고 구별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택정함도 그렇지만, 부르심도 은혜입니다. 구별하신 후, 하나님께서 그 인생의 한 순간에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찾아서 하나님께 온 것 같이 생각이 되도, 성경이 설명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셨기 때문에 네가 찾게 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C. 나타내심(계시)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바울 사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주셨습니다. 이 동사는 ‘계시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계시해주셨습니다. 계시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베일을 벗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부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노력해서 발견한 것도 아니며 오직 계시하는 주도자가 ‘보여주는 만큼’ 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계시라는 단어는 받는 입장이 철저하게 100% 수동적인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보여주시는 분이 보여주시는 만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는 그래서 다메섹으로 교회를 핍박하러 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의 표현대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침내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보려고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상이 바울 사도가 자신의 회심과 함께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게 되었는가에 대한 서론으로 자신의 과거사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3. 오직 하나의 복음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하면서 흐름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왜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으며, 오직 하나의 복음 밖에는 없는가’하는 문제를 바울 사도가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A.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2)
이제 우리는 1장 12절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에 전했던 복음은 어디서 연구한 결과도 아니고 누구에게 주워들은 결과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거짓 교사들인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 자신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보낸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천사가 보냈다고 하더라도, 나아가서 천사 자신이라 하더라도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000년 동안의 교회 역사에서 교회가 위기 속에서도 생명을 걸고 지켜온 것은 바로 바울 사도가 전했던 그 복음, 오직 하나의 복음 밖에 없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계시(1:16)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주신데서 시작했습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구별하시고 그에게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가 이 서신서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이라는 표현의 의미입니다. 그의 사도직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듯이, 그가 전하는 복음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C. 아라비아 광야에서의 3년(1:17; 행 9:19~22)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는 것을 받았을 때, 그는 처음에 사람들(=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1:16b). 또 그는 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1:17). 웬만하면 그는 그 계시를 받은 후, 그리고 회심하게 된 후, 예루살렘으로 먼저 가서 사도들을 만나고 자신을 소개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그 ‘선배’들로부터 들어야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기 17절에서 설명하듯이, 오직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바울 사도의 회심 기사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 사도는 유일하게 회심 이후의 자신의 행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18절에 ‘그후 삼년 후’라는 말이 회심후 3년이라고 보는 것은 거의 보편적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아라비아에서 거의 3년을 보낸 셈입니다. 거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타당합니다. 다른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3년 간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배운 모든 것들을 바울 자신은 아라비아에서 보낸 3년 동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접 배웠다는 것입니다.

4.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바울 사도는 더 나아가서 자신이 어떻게 다른 사도들과 접촉을 하였는가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의 자신의 알리바이?자기가 다른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배우거나 들어서 전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를 증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예루살렘을 두 차례 방문했던 것을 설명합니다.

A. 1차 방문: 회심후 3년(1:18~24; 행 9:26~30).
1차 방문은 바울 사도의 회심 후 3년이 되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이 방문은 사도행전 9장 26~30절에 나와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게바를 심방하려고’라고 예루살렘 방문의 목적을 말합니다. ‘심방한다’는 동사는 뭔가 조사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방문하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인 복음을 베드로 사도와 확인하기 위해서 방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방문은 15일 정도의 짧은 방문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분주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방문에서 바울 사도는 오직 베드로와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만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는 사도 중에서 리더 격이었을 것이고,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방문을 마치고 바울 사도는 수리아(수리아는 안디옥?바울 사도의 선교출발지?이 소재한 곳이다)와 길리기아(길리기아는 바울 사도의 고향인 다소가 소재한 곳이다)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가이사랴로 해서 다소로 갔다고 했는데(행 9:30)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 덧붙이는 것은 유대 지역 교회들이 바울 사도를 직접은 보지 못하고(=얼굴로 알지 못하고, 1:22) 소식으로만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을 파괴하려던 자인 바울이 그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막상 바울을 만나서 그가 복음전도자가 된 것을 확인을 하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에서도 그의 복음 사역은 이미 인정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1차 방문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요지는 ‘자신이 베드로나 야고보로부터 복음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방문 목적이 ‘조사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고, 둘째로 기간이 15일로 복음을 배워듣기에는 매우 짧았다는 것입니다.

B. 2차 방문: 회심후 14년(2:1~10; 행 11:29~30)
바울 사도는 14년 후 그러니까 그의 회심 후 14년에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이 기사는 사도행전 11:29~30에 있는 내용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행 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이 때 바울 사도는 그의 동역자인 바나바와 동행했고, 또 이방인 제자인 디도를 수반했습니다. 2장 2절에서 바울 사도는 ‘계시를 인하여’ 올라갔다고 했는데 이 계시는 아마도 사도행전 11: 27~28에 있는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바울 사도가 있던 안디옥(수리아)에 와서 예언하기를 ‘천하에 흉년이 들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예루살렘과 인근 팔레스타인 지역에 임할 흉년을 말합니다. 이 예언을 듣고 안디옥 교회는 모금을 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바울과 바나바 편에 그것을 보내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2장 10절에서도 나타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야고보와 게바(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특별한 부탁을 받은 바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의 전도여행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2차 예루살렘 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이 방문에서 바울 사도가 유념하였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2차 방문은 첫 방문 이후 11년이 지난 후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동안 바울 사도는 자기의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바나바가 그를 찾으러 다소로 와서 안디옥으로 인도한 후에는 다수가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던 국제적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자기가 전하고 가르치는 ‘복음’의 내용을 분명하게 확인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간 자신의 사역(=’나의 달음질’ 2:2)이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2장 2절에서 설명됩니다.
갈 2: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자신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을 바울 사도는 유명한 자들에게 개인적인 차원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유명한 자들은 바로 9절에서 언급하는 야고보나 게바나 요한을 일컫는 말입니다. 6절에서도 ‘유명하다는 이들’, ‘유명한 이들’ 그리고 9절에서는 ‘기둥같이 여기는’이라는 수식어는 다 같은 이들을 수식하는 말들입니다. 이 방문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방인들 가운데 전파되는 복음의 내용에 대한 회의가 예루살렘에서는 최초의 기독교 공회(the Council)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내용이 사도행전 15장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회의가 열리기 전에 갈라디아서를 쓰게 됩니다. 그가 제2차 방문에서 했던 것은 공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도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했던 것입니다. 이유는 ‘자신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바울 사도의 마음에 있었던 것은 ‘복음의 진리가 저희(이방인 신자들)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2:5). 이것이 바울 사도가 헬라인 제자인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지만 그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게 했던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즉,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은 헬라인이었지만, 할례를 통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 하나로도 예루살렘 교회가 그를 용납하여주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교회에 온 유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파견을 받았다고는 하나, 예루살렘 교회의 지지를 받는 자들이 아님을 드러내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2장 4절에서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고 합니다. 바로 갈라디아에 온 거짓 교사들과 같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 1:7). 그들은 거짓 형제들입니다. 자신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거짓이고, 그들은 형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정체는 사도행전 15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1절에, ‘어떤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갈라디아에 갔던 자들과 같은 자들로서 초대교회를 매우 어지렵혔던 자들이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바울 사도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행 15:2).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다시 예루살렘에 보내 그것을 다른 사도들과 공적으로 다루기를 원했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공의회가 태동한 배경인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들’에 동조하는 이들은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기도 했는데 이들이 주장한 것은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행 15:5). 이 회의를 통해서 가결된 내용이 편지로 각 이방인들의 교회들에게 전해지게 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라는 말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행 15:24), 예루살렘 공의회는 갈라디아에 갔던 거짓 교사들이 스스로 밝히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들이 거짓 교사들이라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의도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지는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마귀에게 속한 스파이들이고 죄에서 자유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죄의 종으로 삼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저들에게 일시라도 복종치 않았다고 말씀합니다(2:5). 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까?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흔들리면 삶은 흔들리게 되어있고,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교회의 기초가 복음의 진리라면, 우리의 삶의 기초와 근거도 복음의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기로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 바울 사도가 설명하고 있는 자신의 2차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6절부터 9절에서 밝혀줍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도들이 나에게 복음에 대하여 더하여 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6절의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특별히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오히려 바울의 복음의 내용을 승인해 주었고, 그래서 대상에 따른 복음 사역의 분담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7절입니다. 바울은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에게, 베드로는 할례자들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의 분담을 한 것도 인간의 뜻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8절에서 말하는대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셨고, 또 바울에게 역사하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베드로에게나 바울에게나 그리고 야고보에게나 요한에게나 오직 하나의 복음 밖에 없다는 것이 서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했습니다(2:9). 그래서 그들은 서로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다만 베드로나 요한 그리고 야고보는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로,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향하기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5. 교훈과 적용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 시대에도 갈라디아 교회가 처했던 동일한 위험이 있고, 초대교회가 겪고 있던 복음의 진리를 지켜내려는 싸움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목사나 신학자들의 몫으로 돌려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싸워야 할 몫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싸움의 최전선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무너지면, 우리의 선교도, 우리의 전도도, 우리의 교회도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거짓 교사들에게 농락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먼 옛날 1세기 갈라디아와 안디옥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옛 이야기가 아니라 스무 세기 동안의 교회 역사 속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던 위험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결코 예외가 아니며, 우리가 사는 워싱턴 지역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A. 복음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위험, 알려고 하지 않는 위험.
첫째로 그 위험은 복음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위험입니다. 또한 알려고 하지 않는 위험이기도 합니다. C.S.Lewis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웜우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씁니다.
“너는 자칫하면 논증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환자의 이성을 깨우게 된다. 그것이 깨어날 때 야기될 결과를 과연 누가 예견할 수 있겠느냐?......네가 해야 할 일은 그의 관심을 감각적인 흐름에 묶어두는 것이다. 그로 하여금 그것을 ‘진정한 삶’이라고 부르게 만들어라. 그러나 ‘진정한’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못하게 하라.”

놀라운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귀의 전략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복음의 내용을 그리고 우리가 믿는 내용(교리)을 이해하고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략에 넘어간 시대는 교리를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감각적인 것이 신앙이라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와 이런 성도는 바람이 불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복음의 진리가 여러분 가운데 항상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를 예배의 중심에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주일 아침과 주중에 제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매일 읽으시도록 맥체인성경읽기표를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도록 권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심령부흥회가 아닌 부흥사경회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 위에 서 있어야 우리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B. 복음의 내용을 타협할 수 있는 위험(2:11~14).
이 위험은 위에서 언급한 것으로부터 파생할 수 있는 위험입니다. 복음의 진리 위에 여러분이 바로 서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고 살아가지 않을 길이 별로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편의에 따라서 말씀을 타협하기 쉽고, 경건의 능력이 아닌 모양을 갖춘 거짓 교사들의 거짓 복음에 속아 우리가 들은 온전한 복음을 타협하기가 너무나 쉬운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갈라디아 사람들은 대 사도 바울로부터 직접 복음을 들었고 배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토록 속히 그 복음의 진리로부터 떠났고 타협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적 무늬를 갖춘 프로그램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대신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심각한 위험을 인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죠이선교교회가 서 있는 자리, 환경이 바로 그런 것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C. 복음의 진리가 행위의 기준이 되고 있는가?
복음의 진리는 머릿 속의 진리가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는 행위의 기준이요, 우리를 내면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삶과 행위의 유일한 기준입니다. 여러분께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는다면 그것은 절대로 머릿 속의 진리로만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여러분의 삶과 행위의 절대 유일의 기준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러분께서 아직도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일 뿐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매주일 살펴보면서 그 복음의 진리가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그 진리를 살아내게 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D. 교회와 지도자를 판단하는 절대 기준은 바로 ‘오직 하나의 복음’이다. 우리는 동기를 판단할 수는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오직 하나의 복음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입니다. 교회가 참 교회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첫번째 기준으로 존 칼빈은 ‘말씀의 참된 전파’를 들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고 했습니다. 교회가 참 하나님의 교회인가를 판단하는 절대 기준은 친절함도, 다양한 프고그램도, 건물과 주차장도 아닙니다. 그 절대 기준은 바로 ‘오직 하나의 복음’인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판단하는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동기를 정확하게 살필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강단을 통해서 선포되는 복음의 진리만이 가장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전했던 복음이고,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전했던 복음, 오직 하나의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죠이선교교회와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 재림하시는 날까지 복음의 진리가 온전하게 증거되고 그것을 살아내는 참된 교회와 성도로 인도하여 주사 홀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를 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