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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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3) -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는 생활

갈라디아서 2:11-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6-24

말씀내용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자신이 전했던 그 복음은 어떤 유명한 사도들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여 주신 복음이라는 것을 자신이 회심한 이후에 사도들과 접촉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가지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루살렘을 두 번 방문했던 사실을 비교적 상세하게 밝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밝히는 또 하나의 배경은 수리아의 안디옥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에서 아마도 ‘안디옥 스캔달’이라고 알려질만큼 유명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의 두 기둥이라 할 베드로와 바울이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맞붙은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1. 초대교회의 위기: 안디옥 스캔달
안디옥 스캔달은 초대교회의 위기였습니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의 상세한 역사 기록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반드시 필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성령님께서 사도들을 감동하사 기록하게 하신 책입니다. 오늘 이 사건도 단순히 두 사도의 마찰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우리가 믿은 복음의 내용에 대한 너무나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안디옥 스캔달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배경을 약간 알 필요가 있습니다.

A. 안디옥 교회(행 11:19~26)
첫째는 이 사건이 일어난 안디옥 교회에 관한 배경 지식입니다. 초대교회에 스데반의 순교가 일어난 후,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대박해가 시작되었고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그 많던 그리스도인들이 주변의 유대와 사마리아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행 8:1). 그들은 각지로 흩어져서 비록 피난민의 처지였지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꽤 멀리 북쪽으로 나가서 베니게와 구브로 섬 그리고 안디옥 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 11:19).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대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구브로(가령, 바나바의 고향이 지중해의 섬 구브로였습니다, 행 4:36)와 구레네(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 가운데 북아프리카 구레네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그날 베드로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행 2:10) 출신의 몇 사람들이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주의 손이 함께 하사’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행 11:20~21). 이것이 소위 안디옥 교회의 설립 역사입니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 제국의 대도시로서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번째로 큰 도시였고 로마 제국의 속령인 시리아 주의 수도였습니다. 때문에 어느 도시보다도 안디옥은 그 주민 구성원들의 인종에 있어서나 문화에 있어서 국제적인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 최초로 이방인이 대다수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교회는 이 이방인 교회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듣고 적잖이 당황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신뢰하는 바나바를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조사를 하였고 그들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친히 목격하고 많은 이방인 교인들을 격려하였습니다(행 11:22~23). 이후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머물면서 복음을 가르쳤고 그의 됨됨이와 가르침은 큰 열매를 맺어 큰 무리가 더해지는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행 11:24). 그러면서 바나바는 너무 교회가 성장하는 바람에 아마도 자기 혼자서 목회를 하기에는 힘이 부친다고 생각했던지, 10여년 전에 회심을 한 유명한 박해자 사울이 안디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인 다소(안디옥에서 약 20 miles)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다소에 가서 사울을 불러와 안디옥에서 그 두 사람은 함께 수많은 이방인 초신자들인 안디옥 교인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의 사역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열매가 있어서 최초로 안디옥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행 11:25~26). 안디옥 교회는 이렇게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최초의 이방인 교회로서 명실상부한 위치를 가지며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이나 바나바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하였지만, 안디옥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곧 이방 기독교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될 모든 준비를 갖추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B. 베드로의 복음에 대한 이해(행 9:43~11:18)
우리가 안디옥 교회의 설립 역사에서 잠깐 엿볼 수 있었듯이 초대 기독교는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수많은 유대교 순례자들이 붐비던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과 함께 놀라운 역사적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성도들 뿐 아니라 사도들의 생각 속에 기독교는 유대교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약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디옥에 이르러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교회가 설립되고 또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이루신 일들임에 분명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도들 중에 수장격인 베드로가 받은 계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1~12장)는 사도 베드로의 전도 사역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고 후반부(13~28장)는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이 중심입니다. 이것은 또한 유대인 중심의 전도 사역과 이방인 중심의 전도 사역으로도 구분이 됩니다. 그런데 이 구분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 9장에서 11장에 걸쳐 나오는 베드로가 받은 계시와 고넬료라는 로마 백부장의 회심 사건입니다.

베드로가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사는 시몬이란 제혁업자(tanner)의 집에 있을 때였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유대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낮 12시 기도를 하기 위해서 시몬의 집의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 그는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하늘이 열리고 보자기 같이 생긴 한 그릇이 내려오는데 거기에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율법에서 정한 먹어도 되는 정결한 짐승 뿐 아니라 부정한 것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하늘의 음성이 들리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완강하게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언제든지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음성이 다시 들리는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거절한 것 같습니다. 세번째로 같은 음성을 들은 후에 그 보자기 같은 그릇은 하늘로 다시 올라갔고 베드로는 환상에서 깨어났습니다(행 9:43; 10:9~16).

베드로가 그 환상의 의미를 놓고 고민하고 있을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고넬료란 로마 백부장에게 먼저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베드로를 청하라고 해서 고넬료가 보냈던 사람들이 마침 그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그 때 성령의 ‘가라’는 음성을 듣고 고넬료가 있는 가이사랴로 갔고 거기서 고넬료와 모인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동행한 유대인 신자들은 이 일로 인하여 매우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와 동일한 역사 즉 그들이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에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고?이것은 그들을 동등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였다는 뜻입니다?수일 동안 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 10:44~48).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 최초의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이지만 사실,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베드로의 회심이라고 말할만큼 베드로의 복음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의 내용의 중요성입니다. 복음은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베드로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수일을 더 머무는 동안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에서 거리낌없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경계를 확장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된 것입니다.

C. 초대교회의 여전한 난제: 식탁의 교제(행 11:1~3; 15:1; 21:20~21)
이렇게 이방인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되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은 처음에는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넬료 회심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이런 소식을 들어 알고 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자들(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였습니다(행 11:1~2). 그 비난의 핵심은 놀랍게도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이 아니라 베드로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인 무할례자의 집에 들아가 함께 먹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행 11:3). 이것이 초대교회가 가진 문제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방인의 구원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설명하듯이 성령이 그들에게 분명하게 임하셨기 때문입니다(행 11: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을 감히 유대인이라고 해서 막을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행 11:17). 여기까지는 OK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았습니다. 바로 식탁의 교제의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왜 식사의 문제가 그토록 중요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음식과 식사 규정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중요성을 가진 문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먹는 것 그리고 누구와 함께 먹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규정해 주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그토록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셨다는 것을 문제로 삼았던 것입니다. 즉, 이방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해도,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유대인 신자가 식사를 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허락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 하는 정체성이 신자 즉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정체성 보다 중요한 일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살펴야할 배경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베드로(게바)의 외식(hypocrisy)
이야기의 배경은 한참 바나바와 바울의 사역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아니라,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베드로가 바울의 사역지인 안디옥으로 왔습니다.

A. 베드로의 습관: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12b).
12절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먹다’는 동사의 헬라어 시제로 보아 정확하게 번역하면 ‘게바는 이방인과 함께 먹는 습관이 있었고 그 때도 습관대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의 환상과 고넬료 회심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믿음으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것은 단지 전도와 구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제의 문제이기도 함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디옥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베드로가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먹은 것은 성찬이 아니었겠는가 라고 합니다마는 그것이 성찬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식사였는지는 본문으로 볼 때 분명하지 않고 또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 날도 베드로는 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잘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B. 베드로의 동료로부터의 압력(peer pressure):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 할례자들’(12a; 행 15:24)
그런데 문제가 터진 것은 그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로부터 보냄을 받은 이들이 도착한 순간이었습니다. 막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아마도 누군가가 베드로에게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사람들이 왔다고 전갈을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 때 갑자기 베드로는 180도 돌변하여 그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유대인들 곧 할례(를 받은)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전에 고넬료 회심 사건 직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그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했다고 비난했던 이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야고보에게서 왔다는 이 사람들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방인 신자들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예루살렘 공의회가 모여 결의한 내용을 편지로 각 이방인 교회에 보내려고 할 때 그 편지의 내용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행 15: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여기서 ‘우리’라는 주어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 역할을 하던 야고보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로 보건대, 안디옥에 왔던 그 사람들은 실제로는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아니고 야고보의 이름을 팔던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자들이 얼마나 이 식탁의 교제 문제에 있어서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은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야고보에게서 사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순간적이고 반사적으로 그는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하던 식사 자리를 떠나 물러간 것입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의 약점이 또 다시 작용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의 압력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동료들이 가진 생각과 판단이 베드로를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Peer pressure 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녀를 두려워하여 주를 부인했던 바로 그 베드로가 지금은 할례당을 두려워하여 또 다시 그의 주님을 부인한 것이 된 것입니다.

C. 외식: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12c)
그들을 두려워해서 베드로가 취한 행동은 그 식사 자리를 떠나 물러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러가다’라는 단어는 군사적으로 후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때 복음을 부끄러워 한 것입니다. 한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기게 되면, 그것이 곧 우리가 믿는 복음을 부인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잠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게 될 때 외식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행동을 지금 바울 사도는 ‘외식’을 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외식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hypocrisy 는 헬라어에서 온 것인데, 본래 연극에서 배우들이 얼굴에 가면을 쓰고 하는 ‘연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연기를 했습니다. 아닌 척 했다는 말입니다. 그가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가 누군가의 앞에서 자기의 본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을 가지고 행했다는 말입니다.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있어서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시자’들이 등장하자, 그는 그들 앞에서 자기가 믿고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다르게 행동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 앞에서 아닌 척하고 연기를 한 것입니다.

D. 베드로의 외식의 결과(13): ‘바나바 마저도’
그 결과가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베드로와 함께 이방인 신자들과 더불어 부담없이 기쁨으로 식탁의 교제를 누리던 유대인 신자들이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는 자기들도 베드로와 같이 연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안디옥 교회의 담임 목사라고 할 수 있으며, 유대인 중에서도 레위인이기도 하였던 바나바 마저도 베드로의 외식에 유혹을 받아 그 식탁을 떠나 물러간 것입니다. 베드로 한 사람의 외식은 한 사람의 외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탁월한 지도자 ‘바나바 마저도’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안디옥 교회의 함께 식사하던 이방인 신자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유대인 신자들과 동일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돌변하는 베드로와 바나바 그리고 유대인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큰 상처를 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2등 신자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바울의 책망
바울 사도 역시 그 자리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던 식탁을 떠나 저쪽에 떨어져 있는 사도 베드로에게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책망을 하였습니다. 어쩌면 바울 사도의 이 태도는 베드로의 외식 사건보다도 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을 것입니다. ‘자, 이제 사도 베드로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해서 밝혀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앞으로 진행되는 바울 사도의 논지에 따라 볼 때 사도 베드로가 그 책망을 겸허하게 수용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AD 65년 이후에 쓰여진 베드로후서에서도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바울을 가리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 3:15b)
짐작컨대 이 위대한 두 사도에게 있어서 이 안디옥 스캔달은 전혀 두 사람 사이를 벌려놓는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었고, 또 전했던 복음의 내용은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바울 사도가 왜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대 사도인 베드로를 책망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 사도의 동기에 대한 문제입니다.

A. 바울의 동기: ‘거저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위한 싸움’
사도 베드로에게서 늘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던 바울 사도가 사도 베드로의 약점을 발견하였을 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꺽은 것인가? 아니면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는 성격적 약점이 이 때 터진 것인가?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바울 사도의 동기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안디옥 스캔달을 바울 사도가 소개하고 있는 이유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나 바울이나 그들은 이미 복음의 진리 안에서 교제의 악수를 나눈 사이였고(갈 2:9), 바울 사도가 지금 이 사건을 소개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로 받은 복음의 진리로 인하여 자신이 베드로와 같은 유명한 사도에게도 사람들 앞에서 책망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임으로써 ‘복음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천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 바울 사도의 입장은 베드로라고 하는 대 사도 앞에서도 동일한 것이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표면상의 문제는 이방인과 유대인 신자들의 식탁 교제의 문제였지만, 사실 이것은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거저 주어지는 은혜의 복음을 위한 싸움이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B. 바울의 책망의 역사적 중요성
베드로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과의 대결을 회피하기를 원했고 대결을 싫어했다면,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 사도의 태도는 평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감당하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지켜내겠다고 한 것은 평화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였습니다. 그는 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일치된 삶이 나타나지 않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이를 따라가는 지도자인 바나바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악한 영향을 주는 나쁜 본보기를 깨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일이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바울 사도가 이렇게 사도 베드로를 면전에서 책망하지 않았더라면, 이 안디옥 스캔달을 기점으로 당시의 많은 교회들은 유대인의 교회와 이방인의 교회로 분열되었거나 ‘한 주가 아닌 두 주님을 섬기는 성찬’을 대하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개인적인 죄는 개인적인 책망을 필요로 하지만, 공적인 일은 공적인 노출과 책망이 필요할 때가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딤전 5: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베드로를 책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아타나시우스가 거의 모든 교회가 삼위일체의 이단인 아리우스주의를 포용할 때 다섯 차례나 주교직을 박탈 당하면서도 그것을 대적함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일과, 마틴 루터가 로마의 교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을 인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죠이선교교회에게 주시는 교훈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A. 그리스도 안에는 구별이 없다(갈 3:28).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의 뒷부분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리스도 안에는 구별이 없습니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여러분이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회의 신분과 구분과 차별을 넘어서서 우리를 그 진리 안에서 하나로 만들어주는 능력입니다. 한국 사람이라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보다 더 소중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죠이선교교회는 한국교회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학력, 학교, 출신 지방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동창회가 교회보다 편하게 느껴지신다면, 동네 사람들과의 모임이 교회보다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어준다면, 여러분이 한인회나 기타 모든 다양한 동질 그룹들 속에서 교회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소속감과 친밀감을 느끼신다면, 여러분은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거나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을 나눌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우리가 세상의 기준으로 기호와 취미와 학력과 지방색과 학교 등으로 신자들을 구분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가 교회라는 사실을 행동으로써 부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책망을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B.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실수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외에 우리가 두려워하고 경외할 수 있는 대상을 두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만일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일터의 현장이나 가정에서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굳게 서있지 않다면, 우리는 매 주일 교회에서 베드로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외식을 하는 것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여러분의 일터의 현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동료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복음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C.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부인하면 행동으로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나 바나바는 이방인 신자들이 2등 신자들이라고 생각하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했다. 이것이 바로 연기하는 것이고 외식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행동이 말보다 더 크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베드로의 이 행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지를 말한 후에, 서로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복음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형제와 자매들과의 교제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행동으로써 복음을 부인하는 셈입니다. 여러분, 혼자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갔다면 우리는 부수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형제와 자매들과 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그들과 교제의 식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는 생활입니다. 여러분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의 삶 속에는 그 복음의 진리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고 싶은,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고 싶은,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교제의 열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로, 예배와 코이노니아는 동일하게 중요한 짝을 이루는 신앙의 실천인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실천에 대한 싸움을 바울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문제는 두 복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복음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D.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어떤 댓가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교회에 이것처럼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평화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가치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평화를 깨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평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할 채비가 된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지켜내기 위해서 평화를 깰 준비가 되어있는가 라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면서 평화를 얻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거짓 평화를 깨는 자리에 서시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역사의 길을 걸어갈 때, 안디옥 스캔달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때 여러분은 평화를 추구하겠습니까, 아니면 복음의 진리를 지키시겠습니까? 비참하게도 긴 교회의 역사 속에서 많은 교회는 성경의 원리를 따라,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심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죄용서를 얻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또는 영생의 소망을 얻기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 즉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믿어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여기에 그 어떤 것이라도 더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고 더하는 것처럼 보이게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위한 싸움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