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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5) - 이신득영

갈라디아서 3: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7-15

말씀내용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부분이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첫번째 부분(1~2장)이 바울 자신의 자서전적 이야기를 통하여 사도직을 변호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두번째 부분(3~4장)에서 바울 사도는 칭의의 교리를 매우 상세하게 논증하는 교리적 부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6장은 교리의 적용 즉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매우 신랄하고 강한 표현으로 이 본문을 시작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의 다른 서신서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강한 표현입니다. 필립스는 ‘갈라디아의 친애하는 바보들이여’(O you dear idiots of Galatia) 라고 번역했고 유진 피터슨은 ‘여러분, 미친 갈라디아 사람들이여’(You crazy Galatians) 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바울 자신이 얼마나 감정적으로도 상하였는가 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란 점에서 하나님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어떤 감정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드러내신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명제: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by grace through faith) 이루어진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바울 사도가 처음으로 꺼내는 논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by grace through faith) 이루어진다’는 명제입니다. 이것은 대명제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논지를 가지고 어리석게도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버린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명제 아래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은 ‘이신득영(以信得靈)’ 즉,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대명제입니다. 신자의 삶은 믿음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처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시작하였으나 믿음을 중간에 포기한다면 여러분은 처음부터 가졌던 믿음이 참 믿음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의 믿음은 하나님 편에서의 은혜라는 단어를 만납니다. 믿음이 아니라 일을 하는 자에게는 은혜란 단어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마는(롬 4:4), 오직 믿음으로 서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일 뿐입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요, 이 복음을 믿는 것이 구원하는 믿음이며, 이 복음을 믿을 때에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되는것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절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듣고 믿음으로냐’는 말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원어로 이것은 ‘믿음의 들음으로써’(by hearing of faith)라고 되어있습니다. 의미는 같습니다마는, 그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믿음으로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고 그 들음은 믿음을 가져왔습니다.

우리의 평생에 잊지 말아야 할 명제입니다.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by grace through faith) 이루어집니다.

2.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영적 분별력을 동반한다(1).
1절에서 바울 사도는 ‘누가 너희를 꾀었느냐’고 묻습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꾀더냐’가 아니라 단수인 ‘누가’를 쓴 것으로 보아 바울 사도는 결정적으로 그들을 꾀고 유혹한 존재인 거짓의 아비, 사단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단은 진리를 매우 묘하게 왜곡하여 거짓 진리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하와에게 그렇게 접근했었고 역사적으로도 쉬임 없이 사단은 교회와 성도들을 그렇게 꾀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단이 그 일을 동일하게 하고 있다고 할 때, 교회와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영적 분별력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분별력입니다. 참된 신앙에 대한 분별력입니다. 참된 성도와 참된 지도자에 대한 분별력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분별력을 동반합니다. 분별력없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한다’(요 10:4~5)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요일 2:20). 역시 모든 성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본능적으로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갈라디아 사람들처럼 잠시 현혹될 수는 있습니다마는 참 성도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 책망을 듣고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이 분별력은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거짓된 복음이나 교훈을 많이 들어보십시오. 절대로 여러분에게 참된 믿음은 커녕, 분별력이 생길리 만무입니다. 특별히 이 부분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처음에 갈라디아 교회에 전했던 복음, 그들이 믿었던 복음의 내용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갈라디아 사람들의 선행이 하나님께 인정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눈을 떠서 그들 눈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똑똑히 본 것입니다.

그 누구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믿음의 유일한 대상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았기에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살아온 삶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로보지 못하고서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것이 바로 나의 죄를 위한 사건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향해서 가지고 계시는 붙타는 진노가 다 해소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교는 우리가 이렇게 하면 가정생활, 부부생활, 자녀교육, 사업성공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이를 수 없음을 언제나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설교했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보았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눈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보고서도 이렇게 그리스도를 떠나 구원의 근거를 자신들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2,5)
바울 사도는 본격적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 질문이 함축하고 있는 사실 하나는 바울 자신이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할 때 그들이 이미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비록 지금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은 여기서 바울 사도가 성령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들이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신칭의,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은 후에, 그 다음의 특별한 체험으로 오게 되는 것이 성령받는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매우 성경에서 벗어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제시하는 질문을 보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두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오답이고 하나는 정답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인가, 듣고 믿음으로 인가를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항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알게 하고자 했던 것들입니다.

A. 성령받음은 나의 영적 성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취를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영적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보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행위’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행함으로써 그 보상으로 성령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을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으로 나누는 셈입니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과 성령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는 성령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이 사실을 성경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모를 수는 있겠지만,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성령을 주신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고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롬 8:15,16).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고자 하시는 일이십니다. 5절은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라고 했는데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역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성령을 받게 되는가 하면 믿을 때입니다.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써 우리는 성령을 받습니다. 받는다는 표현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일을 해서, 율법을 준수해서, 할례를 받아서 그것을 내 당연한 몫으로 얻게 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나의 성취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취하심에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위해서 완전하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이루신 일을 믿는 사람이 성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면 성령을 받는 것도 동일합니다.

B.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체험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성령체험하고 싶은데 방법이 무엇입니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받는 비결’이라고 해서 이런 저런 책들도 가르침들도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방법 속에 하나님을 묶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만나고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오직 한 가지의 길만을 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하는 말도 다른 의미가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체험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Donald McCullough)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연구방식은 연구대상과 맞아야 한다. 천문학자는 망원경으로 천체를, 생물학자는 현미경으로 세포를, 사회학자는 조사와 면담을 통해 인간의 행동방식을, 정신병리학자는 깊은 대화를 통해 잠재의식을 연구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신뢰와 전적의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연구하고 알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이후에야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믿고 따르기로 결정하고 따라갈 때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뢰하는 관계! 이 말처럼 신앙을 잘 정리해 주는 말도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앙,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관계로만 정의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왼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동의한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본질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신뢰한다,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삶의 태도에서 드러나고 보이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이 의사를 신뢰한다면, 의사의 처방을 따라 약을 사서 복용하실 것입니다. 신뢰하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뢰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약을 사서 복용하지 않겠지요. 그리고 그 신뢰가 순종을 통해서 드러날 때 우리는 보다 깊은 신뢰의 관계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체험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C. 믿음이 성령받음에 선행하는가, 반대의 순서인가?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이 먼저인가, 성령을 받는 것이 먼저인가 하는것입니다. 2절 말씀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믿음으로 반응함으로써 성령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선행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 루디아의 기사를 보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죄인의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믿게 하실 때 성령님은 분명히 믿음에 선행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사역은 죄인이 실제로 믿을 때까지는 온전하고 확실하게 그 사람의 내면에서 의식할 수 있도록 나타나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라야, 신자는 자기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고, 그 속에서 거룩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성령님의 역사를 인식하게 되며, 성령님의 열매가 자기 성품 속에 맺혀져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말하고 믿음이 성령받음에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그리스도의 삶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끝난다(3).
바울 사도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어떻게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출발점의 문제만이 아니라 어떻게 마치는가에 대한 문제도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믿었을 때 성령을 받음으로써 제대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받고자 함으로써 성령이 아닌 육체로 마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루시는 분, 완성하시는 분은 처음에 그 일(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A. 육체는 성령과 구별된는 개념으로 약함과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의 본성을 가리킨다.
여기 육체라는 표현은 사실 할례의 개념과 관계가 있습니다. 할례를 육체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체가 의미하는 것은 성령과는 구별되는 개념으로 온갖 약함과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의를 추구하는 죄성입니다. 구원의 근거를 자기 안에서 찾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잘 시작했다가 이제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철저하게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끝나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B. 성화에 대한 오해: 성화는 칭의에 따라오지만, 칭의가 과거의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성화에 대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분명하게 할 부분은 성화와 칭의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이 3절 말씀을 언뜻 보면 성화에 대한 말씀을 하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성화는 칭의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가 칭의에 따라온다고 해서 칭의는 과거의 사건으로 남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칭의를 마치 기독교에 입문할 때 통과하는 수준의 복음(entry-level gospel) 즉 일종의 통과의례(rite of passage)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칭의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의 신자로서의 삶을 지배하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가지고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는 오직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관계로 설 수 있을 뿐 입니다. 한 번이자 영원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써만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인정받고 그 분 앞에 서기 위해서 우리의 순종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이요, 믿음으로써 값없이 주어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의로우심인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하고 적용해야겠습니다.

A. 이신칭의의 복음은 고난을 가져오며 가져올 수 있다(4).
이신칭의의 복음을 오늘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는다는 이신득영으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고난을 예고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복음을 전하면서 수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만일 그가 복음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타협할 수 있었다면 그는 고난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갈라디아 지방 즉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그리고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복음을 전할 때(행 13~14),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서 죽게 되었던 경험도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당한 고난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고난이 바로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고난은 비단 바울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갈라디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은 이들 가운데에는 바울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4절에서 바울 사도가 하고 있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그 복음을 인하여 고난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속히 떠나서 거짓된 교훈에 휘말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난을 헛되이 받았구나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본성으로 듣기 좋아하는 이야기, 들어서 세상 사는데 유익한 교양에 관한 이야기, 세상에서 눌리고 상한 자존심을 교회에 와서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자존심 회복의 메시지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거짓 복음이라고 규정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오직 바울 사도 자신이 받았고 전했던 그 복음의 진리 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자존심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보장받게 된다면 이 보다 더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죠이선교교회인 우리는 이를 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고난을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마 5:10~12).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B. 교리 없는 체험은 왜곡된 영성으로, 체험 없는 교리는 죽은 정통으로 인도한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다루고자 하면서 놀랍게도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밝힌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풍성하고 실제적으로 가르쳐주는 서신입니다. 우리는 보통 교리와 체험을, 신학과 삶을 나누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신앙에 매우 해악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잘못된 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리와 체험은 함께 가며 신학과 삶도 함께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교리없는 체험은 왜곡된 영성으로 인도하고, 체험없는 교리는 죽은 정통으로 인도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기도는 항상 함께 가야 하는 우리의 경건의 가장 기본적인 틀인 것입니다. 한 가지에 치우치지 않게 하십시오.

C.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마지막으로 여러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처음에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눈 앞에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보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잊혀져가고 은혜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구원을 얻고 감격하고 죄인에게 찾아오신 은혜를 찬양했으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교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고, 그러기 위해서 무엇인가 자기의 공적을 쌓아가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는 일을 우리는 많이 보게 됩니다. 그것은 남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 참선을 하고 덕을 수행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눈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밝히 보이지 않는 순간 우리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대로 행하도록 우리를 허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눈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예수께 주목하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밝히 보고 산다면 결코 여러분은 육체로 돌아가는 일, 육체로 마치고자 하는 데로 가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설 곳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자리 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도 그렇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맞이할 때에도 그럴 것입니다.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들어갑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만세반석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깨뜨리신 곳 십자가를 붙들고 우리는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담대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