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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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6) - 십자가에서 해결된 복과 저주

갈라디아서 3:6-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7-22

말씀내용
1. 회색지대는 없다: 율법이 선포하는 두 가지, 복과 저주(신 27,28; 수 8:30~35)
율법을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의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해주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법을 만드셨고, 인간을 그 아래 두셨습니다. 이 법을 떠나서 살 수 있는 길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복과 저주를 선언합니다. 정확하게는 복이냐, 저주냐입니다. 둘 중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율법에 의해서 의인과 죄인으로 나뉘어지고 영복과 영벌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딜레마는 율법을 다 완전하게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저 행위만을 구속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율법은 마음의 문제 즉 탐욕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과 행위, 생각과 태도에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인간이 다 율법을 범한 자라는 것이 딜레마입니다. 즉, 인간은 다 율법 앞에서 그리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범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복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본래적 상황은 율법 앞에서 받을 복은 없으며, 저주만을 받게 되어 있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피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인 복과 저주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하는 조건은 율법의 순종을 통해서 주어지는 복을 받는 것과 율법을 불순종함으로써 얻게 되는 율법의 저주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이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구원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저주를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먼저 율법이 선포한 복이 어떻게 죄인에게 주어지는가를 보겠습니다.

2. 율법이 선포한 복은 믿음으로 주어진다(6~9)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율법이 선포한 복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A. 누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인가?
율법은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법은 본성상 강제력과 구속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키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준 모세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의미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표시인 할례를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에 와서 거짓 복음을 가르쳤던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의 요지는 설령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여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데, 유대인이 되는 조건인 할례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논리에 이어서 바울 사도는 여기서 과연 누가 참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하는 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창 15:6을 인용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것은 바울 사도가 이신칭의의 교리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바울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해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우문이 될 수 있습니다. 명백하게 그 자손은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의도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가를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고 유대인 외의 이방인들에게는 저주를 내리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 바울 사도는 창 15:6을 근거로 자신의 대답을 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가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구분없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가졌던 것과 동일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타락 이후 아담 이래로 모든 죄인을 위한 계획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의 의도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바울 사도의 관심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행위로 구원을 얻고 신약 시대에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성경에서 벗어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8절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바울 사도는 구약을 인용합니다. 8절은 창 12:3 또는 창 18:18이나 창 22:18의 인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내용은 ‘모든 이방(인)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단순히 그 혈통적 후손인 유대인만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 즉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논리대로라면, 바울 사도의 구약 성경에 대한 해석이 옳다면,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와 사명 그리고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율법을 순종한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면 그 후손, 아브라함의 자녀도 마땅히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첫번째 문제?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누구인가?에 대한 결론을 9절에서 보여줍니다.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복 즉 구원을 받는 것은 빤듯하게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B. 아브라함의 믿음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음을 듣던 때부터 시작해서 그의 생애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즉 그의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생애의 절정으로 기록되는 창세기 22장의 기사에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믿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즉, 그의 믿음은 우리가 믿는 믿음과 본질상 동일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순종합니다. 이삭이 산으로 올라가면서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한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묻자(창 22:7)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리라”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이 자기의 아들을 대속하실 구주를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그를 죽이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대속을 믿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사환들을 산어귀에 두고 올라갈 때 아브라함은 말했습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 22:5). ‘돌아온다’는 동사는 복수입니다. 이삭과 함께 돌아오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나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본질상 같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사는 것이고 아브라함은 그 전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내용은 같습니다.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 살고 있기에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화될 수 있는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역시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믿고 의롭다함 곧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 율법이 선포하는 복을 얻는 것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3. 율법이 선포한 저주는 십자가에서 해결된다(10~13)
이제 또 한 가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저주야말로 율법이 불가불 가져오는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 회당에서는 율법을 범한 자에게 주는 형벌로 40에 하나 감한 매를 때릴 때 그 형벌을 받는 자는 맞을 때마다 신 27장에 있는 율법의 저주에 대한 말씀을 소리내어 읽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매를 5번이나 맞았다고 했으니(고후 11:24)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경험했을 터입니다.

A. 우리가 저주를 받아야 하는 이유
10절 말씀이 바로 그 본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신명기 27:26의 인용입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의롭게 되기 위하여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바울 사도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자들이 왜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가 하는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은 그 모든 율법의 조항들을 다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작은 조항 하나라도 범한다면 그는 설령 다른 조항들을 다 잘 지켰다고 하더라도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을 지키는데 실패한 것에 대한 벌은 하나님의 의로운 저주일 수 밖에 없습니다. 10절에는 숨겨져 있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율법을 범한 자다 하는 전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의롭고 합당한 저주를 받아야 하는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유대인이나 유대인이 아닌 자나 모든 인간은 다 마찬가지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인간의 전적 부패’라고 말합니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인간은 없으며 오히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매일 율법을 범하고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된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기에 율법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전부는 오직 저주 밖에 없으며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 아래 데려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를 강조했을 때 사실 그들은 스스로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의로움에 이르기는 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자신들을 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의 기준을 따라서 살고자 한다면 그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고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이 우리를 축복할 수 없고 저주 아래 놓이게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가 씨름했던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이 11절 말씀입니다.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바울 사도 자신은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한 노력을 철저하게 해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율법 행위에 기초한 만족을 얻기 위해서 그는 심지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결코 그를 영적 만족?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확신?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11절에서 하박국 2:4 말씀을 인용하여 주장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서로 다른 원리에 따라서 작용을 합니다. 서로 배타적입니다. 섞을 수가 없습니다. 12절의 설명입니다.
갈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바울 사도는 구약의 레위기 18:5을 다시 인용합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의로운 자가 되겠지만 그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줍니다. 율법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저주를 가져올 뿐이고,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만 말미암는 것입니다.

B.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죄인의 구주가 되시는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물론이요, 이후의 인류 역사 속에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는데 가장 어려운 장애는 바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13절 하반절에서 바울 사도는 또 다시 구약 신명기 21:23을 인용합니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구약 시대에 저주를 받은 자는 그 시체를 해지기 전까지 나무에 달아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무에 달렸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의 표시였습니다. 이 말씀과 전통은 후일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었음을 바울 사도와 베드로 사도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행 5: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베드로 사도가 공회 앞에서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아 죽였다고 하지 않고 ‘나무에 달아 죽인’이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다는 신 21:23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4도 같은 의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바울 사도는 처음 갈라디아 지방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에서 이렇게 이 사실을 암시합니다.
행 13:29 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바울 사도나 베드로 사도가 이로써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우리 죄인의 구주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결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앞에서 바울 사도가 말한대로 우리가 다 율법을 범한 자라면, 우리는 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아 우리가 다 나무에 달린 자가 되어야 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바울 사도는 선언합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죄인의 구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나무에 달려 죽으사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죄인의 구주가 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받을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임할 저주를 제거해주셨습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의 결론을 말합니다. 14절입니다.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이 우리 모든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되고, 반면에 우리가 받아야 했던 율법의 저주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에게 남김없이 부어짐으로써 우리에게서는 완전하게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 성령의 약속 곧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주가 제거되고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에게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였으며 저주가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모든 자에게 말입니다.

4. 교훈과 적용
A. ‘죄송합니다만 당신은 저주를 받을 사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모든 인류가 피할 수 없이 받는 하나님의 저주 선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사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길 뿐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우리가 그 저주를 피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B. ‘옳아서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너무 옳아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무리 옳아도 그가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기준을 채우려는 종교생활은 언제나 불만족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이 불만족은 온갖 형태의 위선으로 나타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다녀도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모습을 반영해줍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아무리 종교적 열심을 더하고 더해도 채울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영적인 만족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의로움 안에서만 우리는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될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C. ‘교회를 다닌다고 세례를 받았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또는 교회에서 얻은 직분이 그들 중 아무 것도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녀로 만들어주고 구원받은 성도로 보장해주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그 보장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여러분의 구원을 보증해주지 못합니다. 믿음 뿐입니다.

D. 오직 믿음!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평생의 모토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 믿는 자를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감격하여 살았습니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이,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을 인하여 그들은 기뻐하였습니다.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원리를 잊지 마십시오.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다 빚이요, 불평이고 불만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십시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