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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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7) -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율법

갈라디아서 3:15-2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7-29

말씀내용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참으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 선한 행위나 율법을 순종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은 왜 율법을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나서 율법을 행하라는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셨으나, 이제 모세를 통해서는 의롭다고 하시는 방법을 변경하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까? 신앙 생활을 하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늘 우리는 율법의 행위에 묶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속으로는 지향하여 살면서도 겉으로는 복음을 말하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신앙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경험하고 있던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거짓 교사들이 와서 ‘믿음 더하기 할례’, 그리고 ‘믿음 더하기 율법’이라고 가르치자 그들은 여전히 복음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율법에 매인 삶을 살게 됨으로써 사실상 신앙 생활의 기쁨을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여기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오늘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약속과 율법이라는 두 개념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 말을 복음과 율법이라고 이해를 하셔도 무방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 두 개념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초청합니다.

1. 약속과 율법을 구별하라: “내가 하리니”(I will) vs. “너는 할지니”(Thou shalt)
약속과 율법 혹은 복음과 율법을 구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고, 율법은 나중에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약속은 하나님께서 ‘내가 하겠다(I will)’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아빠가(엄마가) 사줄께’라고 약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해줄께’가 아니라 ‘너는 할지니(Thou shalt 또는 You shall)’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또는 ‘하지 말라’하는 명령들이 율법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이걸 해라’, ‘이걸 하지말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은 약속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하라’, ‘하지 말라’ 이기 때문에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을 주셨고 모세에게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더 깊은 차이가 무엇일까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변경하신 것일까요?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이것을 설명합니다. 먼저 약속을 살펴봅니다.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바울 사도는 15절에서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예는 사람이 죽을 때 남기는 유언입니다. 15절에서 ‘사람의 언약’이라는 헬라어 diaqhkh는 사실 언약이라는 의미도 가지지만 유언이라는 뜻으로 보통 일상 생활에서 사용이 되던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의미하는 바는 유언입니다. 사람의 예를 드는 것입니다.

A. ‘유언’은 변경할 수 없다(15,17).
유언은 일단 정한 후에는 아무도 그것을 무효화하거나 변경할 수 없습니다. 당시 로마법은 오늘날과 비슷해서 유언을 한 사람이 죽기 전에는 얼마든지 고치거나 추가사항들을 넣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헬라법은 그와는 조금 달라서 사람이 일단 유언을 쓰고 법적 효력을 발생시키면 그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변경도 추가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산을 상속받는 유대법이 이와 유사했는데, 유대법에서는 유언을 쓴 사람이 죽기 전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변경하거나 추가할 수 없도록 mattenat bari 라고 하는 행정절차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야기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바로 이 절차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변경이 불가하므로 아버지의 생사와 무관하게 이미 확정이 된 것이고 자기의 유산을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 사도는 여기서 이 상속에 관한 유대법을 고려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미 mattenat bari를 한 상태이면 아무리 변덕스러운 사람의 유언이라 할지라도 변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유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430년 후에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에 의해서 폐기될 수도 없고 변경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의 언약도 변경하고 추가할 수 없다면 하물며 신실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언약(여기서는 유언이 아닙니다)이야 어떠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17절의 내용입니다.

B. 유언의 상속은 믿음으로만 받는다.
이렇게 변경할 수 없도록 결정된 유언에 의하여 유산을 상속받는 것은 수혜자 또는 피상속인(beneficiary)이 열심히 노력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법적으로 타당하고도 구속력이 있는 그 유언의 약속에 근거하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속의 힘입니다. 관건은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언이 법적으로 타당하고 구속력이 있어도 그 유언의 약속을 믿지 않고 멀리 떠나 버린 사람은 그 유언에 있는 약속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약속이 요구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노력할 일’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C. 약속된 ‘씨’(자손)는 그리스도시다(16).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바로 유언의 약속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땅과 씨(자손)였습니다. 땅은 가나안 땅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천국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그 약속의 내용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바로 씨(자손)에 관한 것입니다. 그 자손은 사실 이삭이거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약속된 씨는 바로 그리스도였다고 바울 사도는 힘주어 강조합니다. 물론 이삭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이스라엘 백성도 자손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만일 그 자손이 이삭 만이었고 이스라엘 만이었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된 자손은 바로 그리스도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히브리어 문법에 근거하여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손(seed)이란 단어는 말하자면 집합명사로서 언제나 단수로 사용됩니다. 단수로 사용된 것은 여러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기 보다는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약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유산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하신 후 2000년 쯤 되었을 때,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갈 4:4) 실로 그 아들을 죄인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선물로 주셨습니다!

D. 하나님은 우리를 성과(performance)가 아니라 약속(promise)에 기초하여 대하신다(18).
유언은 본성상 율법이 아니라 약속과 관련이 됩니다. 약속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약속은 단순하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일반 기업체에서 하는 방식으로 ‘성과에 근거하여’(performance-based) 우리를 대하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인사고과를 따져서 봉급을 결정하는 식으로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매해를 벌벌 떨면서 성과를 내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회계년도의 결산이 가까와 오면 올수록 우리는 초조하게 성과를 내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도록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결국 인생을 다 살아보고 나서 그분의 평가를 받을 때에만 최종적으로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과를 요구하는 율법에 근거하지 않고 약속에 근거하여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칭의와 우리의 구원은 우리 편에서의 성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E. 약속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복음이다(20).
이 약속이야말로 바로 복음 자체 입니다. 그것도 바울 사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복음입니다. 이 약속은 누구를 거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 곧 모세의 손을 빌어 베풀어주신 것이지만(19절), 약속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입니다(20절). 이 말이 약간 난해한 구절인 20절에 대한 해석입니다. 여기 중보는 율법을 하나님과 천사를 거쳐서 받은 모세를 가리킵니다. 모세는 양편의 중간에 서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약속은 하나님 한 분에 의하여 아무 중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앞서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직접 주신 복음이었습니다.

3.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
그러면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는 별개로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 율법을 추가로 주신 것입니까? 그 이유,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19절에서 바울 사도가 던지는 질문의 핵심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일반적으로 율법의 기능과 목적에 대하여 매우 불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참된 이해에도 어려움을 겪게 만들게 됩니다. 먼저, 율법의 기능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A. 율법의 세가지 기능

i. 죄를 드러내고 밝히는 것(롬 5:20).
제일 먼저, 죄를 드러내고 밝히는 것을 칼빈은 율법의 제1 용도라고 했습니다. 19절에서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20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합니다. 다시 로마서 7:7에서 바울 사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율법의 용도는 죄를 드러내고 밝혀주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발견할 수 있도록 잘 보이게 드러내고 밝혀주는 일입니다. 로마서 5:20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이상하게 들리는 말씀이지요? 실상 율법은 죄를 증가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마치 죄의 자극제처럼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하지말라’는 명령(율법)이 없었더라면 하지 않았을텐데, 그 명령이 있어서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주고 죄악을 찾아내고 발견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권위에 반항하는 속성을 가지는 죄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ii. 죄를 억제하는 것.
율법의 제2 용도 또는 부차적 기능은 죄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일의 결과나 댓가를 말해줍니다. 율법을 범한 자에게 율법은 저주와 형벌과 책임을 요구합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원칙 속에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어 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제1 용도에 비하여 부차적인 용도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오늘날의 범죄자를 처벌함으로써 범죄를 억제시키는 정부의 기능과 비슷한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보여주는 것.
율법의 제3 용도는 율법에 있어서 매우 완전하고 영구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기대 수준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율법은 완전하고 영구적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십계명은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B. 율법은 천사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19).
이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주셨던 약속과는 달리 천사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19절에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는 장면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모세에게 주셨다는 힌트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율법은 천사를 통해서 또 모세를 통해서 백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간접적으로 주어졌다는데 강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거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는 대조적인 특징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약속이 율법에 우월할 뿐 아니라 우선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기초가 아니라 약속이 기초입니다.

C. 율법은 복음(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21).
바울 사도는 21절에서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유언의 원리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유언도 변경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430년이나 후에 주어진 율법에 의하여 더욱 변경될 수 없을 것입니다.

D. 율법은 잠정적(temporary) 기능을 가진다: ‘시내산에서 갈보리산까지’
여기서 바울 사도가 집중적으로 말하는 율법의 기능은 바로 제1 용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드러내서 보여주고 나아가서 죄를 더하게(짓게) 하는 기능입니다. 율법의 이 기능은 시내산의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갈보리산의 그리스도에게까지만 존속하는 기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인류가 구원을 받는 교과서가 되도록 쓰셨습니다. 이 구속사라고 불리우는 구원의 역사에서 율법의 이 기능은 모세에게서 그리스도에게까지만 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때까지만 이 율법의 기능은 작동을 하도록 의도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i. ‘더한 것이라’(19): 복음의 하이웨이로 들어가는 진입로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19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율법은 말 그대로 ‘추가된’(It was added) 것입니다. 본래 약속이 있는데 거기에 추가되었습니다. 이 말은 옆길(side road)로 온 것이 율법이란 말입니다. 즉, 비유컨대 율법은 복음(약속)의 하이웨이로 들어가는 진입로와 같은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진입로가 없이는 복음의 하이웨이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진입로에 불과하기에, 그 자체로는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21절 하반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율법 자체가 그것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으라는 의도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을 흠없고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인류사에 한 사람도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율법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그것을 지켜서 생명을 얻으라고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단지 복음의 하이웨이로 들어가는 진입로일 뿐입니다.

ii.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19).
19절 하반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그 약속하신 자손은 물론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의 제1 용도는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만 입니다.

iii. 감옥(22~23): ‘믿음이 오기 전에’.
22절 이하에서는 바울 사도가 율법의 기능을 두 가지 예로써 설명해줍니다. 첫째가 감옥의 예입니다. 율법은 마치 감옥 혹은 감옥의 간수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람을 가두어두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22절과 23절의 말씀입니다. 22절은 “성경이 온 세상(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신약 성경이 다 쓰여지기 전이므로 당연히 구약 성경 즉 율법을 가르킵니다. 율법은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두는 역할을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그 약속을 모든 믿는 자에게 주려고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23절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고 합니다. 22절을 재진술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그리고 ‘계시될 믿음의 때가지’라는 말은 구속사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 전에는 모두 율법 아래 매여 있었고 갇혀 있었습니다.

매여있고 갇혀있는 사람만이 풀려나기를 원하고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율법 아래 오랜 세월을 갇혀 있음으로써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간절히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약의 참 성도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얼마나 인간의 죄악이 철저하게 드러나게 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너의 거울이다! 이 안에 네 모습이 있다.’ 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iv. 몽학선생(24~25): 율법은 키모테라피(chemotherapy)?
마지막으로 24~25절은 율법을 ‘몽학선생’에 비유합니다. 유감스럽게도 NIV 성경은 이 단어를 직접 번역하지 않고 의역으로 처리했습니다. “So the law was put in charge to lead us to Christ…”(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책임을 맡았다). 왜냐하면 일찌기 KJV이 이 단어를 교사를 의미하는 schoolmaster로 번역을 했는데 현저한 오역이 되었고,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의역을 한 것입니다. J.B.Philips는 이렇게 옮겼습니다. “the law was like a strict tutor in charge of us until we went to the school of Christ…”(율법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기 까지 우리를 책임지는 엄격한 개인교사와 같다.) 가장 최근의 번역에 속하는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The Message는 Philips와 비슷하게 “The law was like those Greek tutors…”(율법은 옛 그리이스의 개인교사와 같았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몽학선생은 고대 그리이스에서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성숙하여 청년이 되기 까지 그의 성장의 전체 과정을 책임지는 노예로 헬라어로는 paidagwgos 라고 했습니다. 교육학 또는 교수법을 의미하는 pedagogy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학문적 교육을 담당했다기 보다는 주로 버릇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면 그를 학교로 데려가고 학교에는 몽학선생들이 대기하는 방이 있어서 거기서 기다리다가 방과 후에 다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숙제를 하도록 달라붙어서 시키고, 그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게 합니다. 훈육 선생 같은 역할인데 어려서부터 청년이 되기까지 거의 온 종일 붙어서 그를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고대 몽학선생에 대한 그림들이 발견된 것들이 있는데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매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을 볼 때 매우 엄격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가 장성하여 청년이 되어 성인이 될 때 그는 더 이상 몽학 선생의 지도와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사실 몽학선생은 그를 성장하여 독립된 성인이 되도록 이끌어주고 인도해주는 것이 그 사명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 사도가 설명하는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은 몽학선생과 같습니다. 그것은 엄격하고 가차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장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게 될 때에는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은 그렇게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의 이런 엄한 기능을 아마 키모테라피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암을 치료하는 키모테라피는 19절에서 말씀한대로 결코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키모테라피는 죽이는 치료법입니다. 화학물질들(chemicals)은 몸 속에 들어가서 암세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조직까지도 파괴합니다. 이 치료를 하는 동안에 환자는 사실 전체적으로 힘과 건강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치료를 하는 이유는 당장에는 견디는 것이 힘들어도 장기적으로 암세포를 죽임으로써 건강을 줄 것이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죄를 범하게 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 악화시키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믿음으로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갈구하도록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주기에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율법은 우리가 영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죽을 암환자라고 선고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도 스스로를 고칠 능력이 없습니다. 이 선고를 받은 사람만이, 이 자신에 대한 자각을 얻은 사람만이 그리스도께 나아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저 주시는 복음의 은혜에 간절히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두 가지로 정리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겠습니다.

A.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죄인의 구원은 죄인이 범할 수 밖에 없는 율법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범하실 수 없는 약속에 근거한다.
구원은 율법에 근거하지 않고 (변경할 수 없는 유언의) 약속에 근거합니다. 율법은 죄인이 범하지 않을 수 없는 또는 범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근거로 율법을 제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과 생명의 근거로 우리에게 제시하신 것은 ‘내가 해주마’(I will)고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변덕스러운 우리가 지켜야 하는 약속이 아니라 참으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결코 변경하시거나 폐하시지 않고 지키실 약속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리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보장이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그 약속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겠다”(요 1:12)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주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B. 율법만이 죄인을 믿음으로, 구원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은 자기 방식대로 나아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 오직 한 가지 길만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복음의 하이웨이로 가는 길은 오직 율법이란 진입로를 통과하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에 이 말씀을 적용해보십시오. 율법이란 진입로를 통과하지 않고 복음의 하이웨이로 들어오게 된다면 여러분은 복음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죄로 비참해지고, 아무런 소망이 없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괴로움이 없이, 믿음으로써 의롭다하시는 복음의 은혜에 들어오셨다면 결코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거꾸로 여러분이 복음의 은혜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살 수 없다면 여러분이 율법이라는 진입로를 통하여 복음의 하이웨이로 들어온 것인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율법이 먼저 나를 정죄하여 나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쉽게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결단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죄로 비참한 처지에 빠져있는 소망없는 여러분의 상태를 율법이 가르쳐주는 것을 경험하셨습니까? 그것을 경험하고 사십니까? 그 경험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이란 조심스럽게 서행을 해야하는 진입로가 아니라 신나게 달릴 수 있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하이웨이임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믿음으로 거저 주시는 구원을 준다고 말하는 것을 듣기 전에, 여러분은 율법이 여러분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먼저 들으셔야 합니다.

여기서 율법을 잘못 사용한 사람의 이야기를 언급해야만 하겠습니다. 바로 부자 청년 관원이었습니다(눅 18:18~23). 예수님께서 율법의 내용을 십계명의 항목들로 말씀하시자 그는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율법으로 자기의 죄를 찾는데 쓴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로움을 확인하는데 썼다는 것입니다. 앤드류 쥭스(Andrew Juk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단이 율법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거룩함을 입증하려 하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임을 입증하시기 위해 그것을 주셨다.”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우리는 자기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도덕성을 확인하는데 율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꼬박 꼬박 한다든지, 주일을 꼬박 지킨다든지 하는 식의 율법 지킴으로 자신의 의로움과 옳음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가신다면, 여러분은 율법을 잘못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율법을 참으로 아신다면 여러분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계시하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탐내지 말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우리 안의 탐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오직 율법 안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의 터 위에 세워진 도덕과 윤리는 결코 우리의 죄성을 가르쳐주지도 않고 줄 수도 없습니다.

절망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희망을 찾지 않습니다. 율법을 모르면 결코 그는 구원의 길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의 기본적 요점은 인간을 향상시키는게 아니라 악화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그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스스로 겸비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고 깨어지게 하고 부서지게 한 후에 그들로 하여금 은혜를 구하게 하고 마침내는 복된 씨인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한다.”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말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체면이라는 껍질을 벗겨내고 그 바닥에 깔린 참 모습을 밝혀줍니다. 현대 사회가 복음을 깨달을 수 없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 없이 복음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돼지는 아무리 값비싼 진주라 할지라도 그 가치를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습니다. 율법이 먼저 계시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마치 칠흙같은 밤 하늘에서만 별들이 나타나듯이 죄와 심판의 어두운 배경을 향해서만 복음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멍들게 하여 죽이기 전에는 우리가 우리의 상처를 싸매줄 복음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체포하여 감금하기 전에는 우리가 우리를 풀어주시는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여 죽이기 이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의롭다 하심과 생명을 요청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자신에 대한 실망 가운데로 인도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지옥에까지 낮추기 전에는 우리는 우리를 천국으로 올려 주시는 복음에로 돌아서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