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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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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8) - 종에서 아들로

갈라디아서 3:26~4: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8-05

말씀내용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정체성과 신분의 문제를 이해하지못하면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놓치게 되고 기독교 복음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축소될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이 세상에서는 의미가 없고 죽어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신분과 정체성의 문제는 한 마디로 종이냐, 아들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빠져들어갔던 문제가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성령을 받았지만, 유대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아 할례와 율법의 행위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아들에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특별히 바울 사도는 양자됨이라는 원리로 이신칭의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 양자됨의 교리는 믿음과 행위의 대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행위로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청중의 전환(3:26):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3:6~25)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3:27~4:31)
갈라디아 교회는 대다수가 이방인 출신들이었지만 소수의 유대인들도 섞여 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 다른 배경을 가진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신칭의의 교리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3장 26절을 중심으로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로 청중을 전환하여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3:26은 앞의 3:6~25과 뒤의 3:27~4:31을 연결해주는 중심구절입니다. 앞에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약속(아브라함, 3:6~14)?율법(모세, 3:15~22)?믿음(그리스도, 3:23~25)의 순서로 설명을 했고 뒤에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거꾸로 믿음(성령, 3:27~4:7)?법(이 세상 초등학문, 4:8~11)?약속(사라, 4:21~31)의 순서로 설명을 합니다.

왜 모세의 율법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옥이나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가? 앞에서 했던 이야기에 이어서 바울 사도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3:26로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로 접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26절은 우리 말 성경이나 영어 성경에서도 분명하게 번역되지 않았지만, ‘왜냐하면’이란 헬라어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유대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설명한 것을 이방인의 시각에서 다시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너희가 더 이상 감옥으로 너희를 가두어 두는 역할을 하고 또 몽학선생으로 너희를 징계하는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선언의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 8:32). 그리스도인은 종교인이 아닙니다. 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율법과 당위성의 포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설명의 핵심이고, 오늘 상고할 남은 본문은 그에 대한 설명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전환은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구속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설명이었다면, 이제 한 개인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변화되는 차원에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훨씬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들을 수 있게 됩니다.

2. 세례(3:27):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
그 첫번째 문제가 세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는 다 세례를 받습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단순한 물세례라는 외적 상징이나 형식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으로써 영적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다는 내적인 사실을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세례는 또한 양자됨의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것, 양자됨의 법적 절차를 밟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세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가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에 우리가 연결되었다는 의미입니다(롬 6:3~4).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의 죽으심 속에서 우리가 죽었고, 그의 장사지냄 속에서 우리도 매장되었고, 그의 부활 안에서 우리도 다시 살았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말은 영어로는 baptized into Christ 라고 표현되는데 헬라어 표현의 직역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물세례라는 의식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세례의 의미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다만, 물세례라는 형식을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그리로 성도들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A. 그리스도로 옷입는다: 옛생활에서 새생활로의 결정적 전환과 변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옷입는다’는 표현입니다. 옛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입니다. 헬라의 이교들 안에는 그들의 종교에 입문하게 될 때 이렇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신비한 의식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점에서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것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다 하는 이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가령, 더러운 옷을 입으면 더러운 것을 묻힐 것에 대한 겁이나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라도 비싸고 좋은 옷을 입으면 혹시 뭐라도 묻을까봐 매우 조심하여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옷이 사람을 만든다’하는 말입니다. 세례받은 신자들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색깔에 적셔져서 찬란한 영광으로 염색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전의 자아를 버리게 되고, 세상에 대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계를 가지게 된다. 세상의 더러운 것들로 자기의 영광스러운 새옷을 더럽히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가 된 것입니다. 세례는 옛 생활에서 새 생활로의 결정적인 전환을 의미하는 사건입니다.

B. 두 세계 사이의 경계선: 죽음과 삶
그래서 세례를 두 세계 사이의 경계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경계는 죽음과 삶 사이의 경계이며, 옛 생활과 새 생활 사이의 경계입니다. 우리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세례에 대한 충분한 의미를 알고서 세례를 받는지 묻고 싶습니다.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3. 교회 안의 장벽들(3:28)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현상은 그들이 각기 입고 있던 서로 상이한?옷은 신분과 차별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옷들은 다 벗겨졌고 그들은 이제 동일한 새로운 옷,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가 비록 이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엄연히 구별되는 부분은 사회적인 장벽들이 다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

A. 인종(race), 서열(rank,money), 성(sex)
바울 사도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현대 세계에서도 여전히 서로를 나누는 장벽이며, 마귀적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인종의 구별입니다. 둘째는 ‘종이나 자주나나’, 신분이나 서열 또는 물질의 소유에 따른 구별입니다. 세째는 ‘남자나 여자 없이’, 성의 구별입니다. 인종은 우월감에 의해서, 서열이나 물질은 탐욕에 의해서, 성은 정욕에 의해서 더렵혀졌다는 것을 인류의 역사는 보여줍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구성원들 중에는 엄연히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 종과 자유인(주인)의 구별, 남과 여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다 동일하게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한 옷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인종을 떠나, 서열과 신분을 떠나, 성별을 떠나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B. 획일성이 아니라 하나됨(not uniformity but unity)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조심스럽게 생각할 점은 교회는 획일성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됨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어떤 학자들은 ‘다양성 안에서의 하나됨, 하나됨 안에서의 다양성(unity in diversity, diversity in unity)’이라고 표현을 해왔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지만, 그들의 인종, 서열, 성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그것들이 다 철폐되고 없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개성도 다 존재합니다. 여기에는 모든 다양성이 있습니다. 다양성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하나됨을 획일성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장차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을 받게 될 사람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됨을 이루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C.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증거
그러기에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끊임없이 나누고 있는 인종과 서열과 성과 같은 이런 마귀적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자들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이 큰 구원이 정말 얼마나 큰 구원인지를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교회가 교회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인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닫는 만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세상을 향해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그리고 영원토록 말입니다.

4.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3:28~2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그리스도께 속한 자’, 아브라함의 자손
이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논리적으로 더 끌고 갑니다. 27절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장벽들이 제거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이제 29절에서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말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곧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바로 그 씨(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라는 혈통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자가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는 말입니다. 할례라는 형식을 통해서가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께 속하게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혁명적인 언사인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상속받게 될 권한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상속권 때문입니다!

5. 과거의 상태(4:1~3): 종노릇
본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아라. 도대체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냐’하는 투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운 사실인데 이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너희의 예전 상태를 돌아보자고 말합니다. 그들은 비록 그때에도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아들이었을지라도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에는 종노릇하는 자에 불과하였습니다.

4장 1절은 ‘유업을 이을 자’ 즉 상속자라고 성도들을 지칭합니다. 상속자란 말은 이미 타이틀(명의)이 그에게 속했으나 아직 실제적 소유를 한 것은 아닌 상태를 일컫습니다. 아직 그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그 모든 소유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성숙함이 없는 어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 것이 후견인과 청지기입니다.

A.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후견인은 주인의 아들 즉 상속자가 아직 미숙한 어린 아이일 때 그를 돌보는 노예이고, 청지기는 그가 어려서 아직 재산을 관리할 수 없기에 그가 성인이 되기 까지 재산을 관리해주는 노예입니다. 비록 상속자는 그 모든 재산의 주인이지만, 노예의 감독 아래 살아야 합니다. 아직은 미성숙한 어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B.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이교적인 영적 존재와 그 세력들
사도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 후견인과 청지기의 존재를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앞에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또는 감옥 안에 갇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의 율법을 알지 못했던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율법이 아니라)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서 종노릇하였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이 이교를 믿을 때에 가졌던 모든 규정들과 원리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고, 나아가서는 그들이 굴복하고 살았던 모든 이교적이고 마귀적인 영적 존재와 그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기 전에는 다 거기에 굴복하는 종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6.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에 대한 6가지 중심 진리(4:4~5)
그러나 드디어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모든것을 변화시켰습니다. 특별히 종노릇하고 살아가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선언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셨습니다. 여기 너무나 짧은 두 구절(4~5절)을 통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에 대한 6가지 핵심진리를 증거합니다.

A. 시점(timing)?‘때가 차매’ his timely arrival
고대 세계에서는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기 위한 때를 결정하는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여기 ‘때가 차매’라는 표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때가 찬 것을 아버지가 결정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을 때였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하나로 통일된 세계,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써 인간의 죄와 실패를 온 세상에 보여주기에 충분한 역사의 시간….이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기에 무르익었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B. 기원(origin)?‘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his eternal deity
그 아들은 어디서 오신 분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신성을 가리킨다.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C. 방식(manner)?‘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his true humanity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여자에게서 나셨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 성자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게 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D. 조건(condition)?‘율법 아래’ his perfect obedience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조건으로 이 땅에 오셨는가를 보여준다. 그분은 역사상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우리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율법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지키셨다.

E. 목적1(purpose)?‘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루터교 목사는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 보다는 말구유로 바꾸어야 한다고까지 말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적시에, 완전하신 하나님이신데 완전하신 인간으로 이 땅에 보내실 때, 율법 아래 복종하도록 보내셨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사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목적입니다. 속량(redeem)한다는 말은 노예시장에서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 그를 풀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어제의 노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의 전부가 결코 아닙니다.

F. 목적2(purpose)?‘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심이라’
두번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의 명분입니다! 단지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노예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아들의 모든 권리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아들로서의 모든 상속권을 다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7.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심(4:6)
아들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A. 성령=아들의 영
성령님은 아들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들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을 그 마음에 보내주셨습니다. 아들의 마음이 없으면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마음에 아들의 영을 보내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아들의 영이 없는 자는 아들이 아닙니다.
B.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
아들의 영이 주어짐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하는 것은 그냥 그렇게 불러야지해서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닌 자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듯이, 우리는 아들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애정과 경외함을 가지고 그분을 부르며 나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들의 영을 받은 자요,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아바라는 말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아바는 (자기 백성의 입술을 대신하여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영의 목소리이다.” 우리가 아바라고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입술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영의 목소리를 들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바라고 부를 때, 하나님은 우리를 들으십니다.

8. 마지막 질문: 당신은 아들인가, 종인가?(4:7)
말씀을 맺으면서 우리가 생각할 질문은 단 한 가지 입니다. 나는 아들인가, 종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4:7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기에 하나님은 너희를 상속자?유업을 이을 자?로 만드셨다.”

아들됨이란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모든 것을 상속받을 것이란 뜻입니다. 죄용서 만이 아닙니다. 천국과 영생과 그 모든 것을 다 아들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들이 된 자들은 그것을 다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분명한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당신이 누구인지 확실치 않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참 자아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 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미 그리스도를 믿지만 당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 외의 다른데서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신은 현재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이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이 없으시다면 이 시간,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분의 죽으심과 피흘리심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사기에 합당한 당신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의 영원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주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 안에 거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