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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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9) -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들

갈라디아서 4:8-2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8-12

말씀내용
오늘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르치면서 잠시 자신의 마음의 이야기를 전하는 부분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까지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것처럼 보일 만큼 강한 어조로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갈라디아 사람들과 자신의 좋았던 관계를 회상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바울 사도가 이처럼 흥분해서 편지를 쓰고 있는지 내 마음을 좀 알아달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토록 바울 사도를 사랑했던 교회였고, 복음의 메시지에 반응했던 교회였으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을 때 그토록 기뻐했던 그들이 유대인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그렇게 순전한 복음에서 이탈하는 것을 보며 바울 사도는 그들의 받은 구원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의심이 간다고 솔직히 말합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바울 사도는 참 하나님의 자녀들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아는 자이다(8~11).
A. 기독교는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누구를 아는가이며 누가 우리를 아는가이다(9).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아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는 신학과 성경 시험에서 100점을 맞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누구를 아느냐 그리고 누가 우리를 아느냐 의 문제입니다. 이 지식은 인격적인 지식이며 관계적 지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Knowing God 이지, knowing about God 이 아닙니다. 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갈 4:9a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앞의 8절에서도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라고 했습니다. 비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고,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안다는 것이 경험적인 ‘앎’이라는 것은 우리가 수차례 들었던 말씀입니다. 저는 부시 대통령을 모릅니다. 하지만 제 아내는 압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신 바된 사람입니다.이런 지식은 불분명하고 근거가 불확실한 지식이 아니라, 부인할 수 없도록 분명하게 내가 그분을 알고 그분이 나를 아는 지식입니다.

B.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아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는 것이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물으실 수도 있으나,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의 선택이기 전에 하나님의 선택이고, 그러기에 구원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알았고 먼저 선택했다면 아마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베푼 은혜일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설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 설명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것입니다.

고아원의 예를 들어보지요. 고아원에 어떤 부부가 찾아가서 한 어린 아이를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해서 자료들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한동안을 계속 방문해서 그 아이를 경험합니다. 그후에 그 아이는 그 부부에 의해서 입양되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가 그 부부를 부모로 알게 되는 것은 그 이후입니다. 이것을 오직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아셨기에 우리가 비로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C. 오직 은혜(Sola Gratia)를 아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다.
이런 ‘오직 은혜’?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의존?의 교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그 의도가 어떠하든지 정죄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라고 할 수 없으며, 기독교의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 표방했던 ‘고상한 기독교 프로그램’(higher life program)이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믿음과 할례’, ‘믿음과 율법의 선한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믿음과 교양’, ‘믿음과 상식’, ‘믿음과 수준’, ‘믿음과 성공’, ‘믿음과 물질적 부’와 같은 것들입니다. 오늘날 가만히 보면 이런 내용의 기독교가 얼마나 깊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가 하는 것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믿음에 붙는’ 그 모든 수식들을 다 제거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결코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지도, 누리지도 못할 것이고 여전히 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 나는 거지같고, 못났고, 성질도 더럽다. 그런데 그분이 나를 구원하셨다. 그분이 나를 아셨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셨다.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왜 나같은 놈을 아셨고 왜 나같은 놈을 사랑하셨는지? 하지만 나는 그분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조심하십시오. 마치 나의 인격적 고매함이, 나의 지성이, 나의 도덕적 선함이, 나의 교양이 나의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인양,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태도를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두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도록 우리가 구원의 부르심을 얻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D. 순종이 은혜를 가져오지 않고(종의 태도), 은혜가 순종을 가져온다(아들의 태도).
그러기에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지, 이런 저런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순종이 은혜를 가져오지 않고, 은혜가 순종을 가져옵니다. 은혜와 사랑을 얻기 위해서 순종을 하고 있다면 그는 종이지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똑같은 순종을 한다고 해도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께 순종을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실로 은혜를 아는 아들의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의 삶은 은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얻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겠습니까? 순종하여 사는 자의 얼굴 표정부터 다를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이다(12~16).
두번째 하나님의 자녀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다라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바울 사도는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갑자기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서가 아니라, 바울 사도는 이전에 그들과 너무나 좋던 관계를 회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들(15)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 사역에서 기쁨(enjoyment)을 얻습니다. 바울 사도는 15절에서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처음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들었는데, 지금은 너희들의 그 기쁨이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 기쁨을 잃어버렸느냐?’는 질문입니다. 처음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바울은 그 때를 회상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도 그것을 기억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느새 갈라디아 사람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들 안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기쁨은 어느 새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의무로 다 바뀌어버렸습니다. 은혜가 없는 의무입니다. 지금 그들을 돌이키게 하려고 쓰는 바울의 서신에 담겨있는 복음의 메시지, 그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기쁨이 되지 않는 자신들을 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때 바울 사도는 그들을 찌르듯이 묻습니다. ‘그 때 그 기쁨이 어디로 갔느냐’고 말입니다.

B. 바울 사도의 육체의 약함: 말라리아(열병, 13), 간질(14), 눈병(15)???
여기에는 바울 사도와 갈라디아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후대의 우리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13절에 언급하는 ‘육체의 약함’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가 수년 후에 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언급했던 ‘육체의 가시’와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추측하게 하는 것은 바울 사도가 처음에 갈라디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그의 병 곧 육체의 약함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서 일부 학자들은 행 13:13에서 바울 사도가 본래 서쪽 방향으로 가면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열병(말라리아)에 걸리는 바람에 습지가 아닌 산지인 갈라디아의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방향을 선회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바울 사도의 병이 열병이었는가 아닌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질병으로 바울 사도의 계획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셨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여기서 보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계획을 가지고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병들게 하심으로써 그의 계획을 포기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가심에 있어서 우리의 문제, 우리의 약점도 사용하셔서 그렇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부적당하고 악조건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 여러분이 어떤 예기치 않은 일로 말미암아 잠시 돌아가야 할때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서 뭔가 다른 일을 계획하시고 그 일로 여러분을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때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그리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것을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바울 사도가 가진 그 육체의 약함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시험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사람의 질병이나 연약함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리이스 로마의 신들을 섬기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단순히 열병이라기 보다는 보다 심각한 간질이 아니었겠는가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 사도를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거절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 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듯이 그를 대접해 주었습니다. 15절에도 육체의 약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힌트가 나오는데 갈라디아 사람들은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주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바울의 약함은 ‘안질’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눈이라도 빼어’라는 표현은 직접적인 표현일 수도 있으나 비유적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문헌에는 ‘눈을 빼어준다’는 표현이 가장 귀한 것, 마치 생명을 내준다는 식의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말 표현으로 바꾸면, ‘간이라도 빼어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 사도에게 생명이라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에 갔을 때 약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메신저인 바울 자신을 천사처럼 또는 그리스도처럼 극진하게 대접하였던 것입니다.

C.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 사도를 사랑했던 이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 사도를 눈이라도 빼어줄만큼 사랑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종종 목사와 성도의 관계에서 친한 것이 좋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적인 친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관계가 없다면, 참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목사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엮어진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목사와 성도의 관계는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다면 어떻게 목사와 성도의 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기를 그토록 극진히 사랑하고 대접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다면, 그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그리스도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의 메시지와 메신저인 자신으로부터 돌아섰을 때, 그들이 참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20). 목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유명해지고 성공하도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목사를 판단하실 때, 그 기준은 인격이나 능력이나 외모나 유명함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한 가지 기준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충성스럽게 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자신을 비롯한 그 시대의 동료와 후배 목사들에게 이런 경고를 하였습니다.
우리 목사들에게 성령님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분이 없는 우리의 직무는 이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속해있는 교회에 대하여 제사장직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옛 시대에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그의 말씀을 선포하고 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대의를 주장하였던 사람들의 후예입니다. 우리가 우리 위에 머무시는 그 선지자들의 영을 가지지 않는 한 우리가 걸치고 있는 가운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거친 껍데기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위에 성령이 임하시지도 않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감히 말하였다는 이유로, 정직한 자들의 무리에서 싫어여김을 당하여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그의 증거를 계속하도록 임명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변인으로 자처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인격과 메시지 위에 언제나 머물렀던 분입니다. 만일 우리 위에 그 성령께서 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과 같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위임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 가운데서 말씀드립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는 목사로 살다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말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자이다(17~20)
세번째로 하나님의 자녀는 변화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속에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가 성령 받고 거듭난 것이 사실이라면,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내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겠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궁금하게 여기는 부분은 과연 예수 믿는 사람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직접 하시는가 아니면 다른 도구 가령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가? 물론 하나님은 직접 그 일을 행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리고 그 일?성화?을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행하십니다. 이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개가 신비주의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화?영적 변화?를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A. 하나님께서 영적 변화를 위해 사람을 사용하신다(19).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영적 변화를 이루신다는 사실이 19절에 나옵니다. 바울 사도는 ‘자녀들아’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실제로 영적 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영적 성숙?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속에 이루어지는 일?을 위해서 자신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신앙생활하는 것을 배우셨습니까?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통해서 ‘이렇게 기도하는구나’ 혹은 ‘저렇게 기도하는구나’ 하고 배우고, 사람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적 깊이도 도움을 받아 깊어지고 자라갑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사를 세우고 직분자들을 세우시는 것은 본질적으로 교회라는 조직을 관리하기 위한 경영자나 관리자들로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즉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4:11~12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에 세움을 받은 지도자들이 이 본분을 놓치게 되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의 기능을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신앙의 성숙이 일어나기 보다는 조직의 비대함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착각하게 됩니다. 조직의 비대함을 교회의 성장이라고, 그것이 신앙의 성숙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갈라디아 교회가 어떻게 하면 양적으로 숫자적으로 성장을 하느냐가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형제들의 속사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언제나 바울 사도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빌 1: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의 유일한 관심은 성도들의 속사람이 자라나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가는 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댓가도 지불할 용의가 있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아무리 힘겨워도 나는 그것을 감당하고 말겠습니다.”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해야 할 때, 힘드니까 포기하겠다고 하는 산모는 없겠지요? 심지어는 죽음의 위협을 받더라도 새 생명의 출산을 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주어서라도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영적 지도자를 둔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런 영적 지도자를 거절하였고 이로써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이 되었고 오히려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그들을 이용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충성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누구를 통해서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하고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또 여러분은 어떤 사람의 신앙의 성장과 그리스도 형상이 이루어짐을 위해서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고 있습니까? 사람이 중요합니다.

B. 사도는 자기 제자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17~18).
사도는 자기 제자를 만드는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의 관심은 당연히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17절입니다.
4: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잘못된 양육과 잘못된 제자훈련이 가지게 되는 문제를 바울 사도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열심을 내는 동기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자기들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로 만들려 함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이간 붙이는 일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바울 사도와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바울 사도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 관계를 떨어뜨려놓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들이 좋은 동기로 그런 열심을 낸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질문합니다. 바울 사도가 있을 때나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모든 기독교의 양육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자기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C. 사도는 먼저 그들과 같이 되었다(12).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일,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일은 결코 댓가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사도는 먼저 갈라디아 사람들의 구원과 성장을 위해서 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12절을 돌아가서 봅니다.
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과 같이 되기를’, 이 말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기가 섬기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형상을 자기와 같이 닮아가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목사의 최대관심은 사람들을 자기처럼 만드는데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먼저 목사는 성도들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기처럼 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이 그들과 같이 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같이 되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휩쓸리는 것을 정당화해주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느 때에도 놓치지 않고 비본질적인 형식에 있어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동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 사도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놀라운 복음의 열매를 가져온 것입니다.

4. 교훈/적용
A. 자기 점검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도전하시고 물으시는 바가 분명히 있는 것을 확인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기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들이 여러분 안에 있는지 정직하게 대답하셔야 합니다.

i. 나는 하나님은 아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정말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여러분을 아셨고 선택하시고 사랑하셨기에 여러분들이 그 결과로 그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안다. 나는 그 분께 늘 나아간다. 그분께 나의 마음을 늘 털어놓는다. 그분은 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분은 나를 아신다.” 바울 사도와 함께 여러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들은 분명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시 정직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그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간절히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으며, 잠시는 속일 수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서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알았는지를 확연하게 확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확인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만일 여러분이 이 증거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할 수 없으시다면, 하나님께 정직하게 그 은혜를 구하라고 자비로우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ii.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즐거워하는가?
하나님의 자녀됨의 두번째 증거로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한없이 즐거웠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주일날 즐겁게하는 것은 사람들과 만나 그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입니까? 무엇이 과연 여러분의 가장 큰 즐거움이요, 기쁨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참 자녀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인 설교와 가르침을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갈망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솔직하게 이런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참 자녀라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참 자녀라면 세상적 즐거움을 하나도 즐거워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그런 육체의 소욕이 분명히 있다고 바울 사도는,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 사역을 기뻐하거나 즐거워할 능력이 없습니다. 결코 이것은 그들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조금 더 이 문제를 정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단지 설교를 들을 때에 그것이 좋은 말씀이다라고 반응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그런 반응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복음의 메시지?당신은 영원히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사실?를 여러분이 듣기를 기뻐하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교가 도덕적 교훈을 말하는 것이 되고, 교양과 상식의 전달이 되어가고 있는 세대에서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어도 그런 설교를 듣기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코 복음의 핵심, 우리의 존재를 향한 성경의 지적을 기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기뻐합니까? 여러분은 그 복음을 더 듣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내가 어떤 자였는지를 들으면 믿는 자를 의롭다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찬송하고 싶어지십니까? 여러분은 복음의 핵심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묵상하기를, 듣기를 기뻐하십니까?

혹시 여러분이 예전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느끼십니까? 어디서 떨어졌는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내 영혼을 다시 회복시켜주시도록 구하기에 앞서서 먼저 회개하십시오.

iii.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는가?
하나님 자녀의 세번째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을 경험하십니까? 겉으로의 변화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교회에 출석할 수 있으며, 봉사도 할 수 있고, 결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의 영혼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본래 나의 것이 아닌 다른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뭔가 나의 것이 아니던 어떤 것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끌고 가는 그런 힘을 경험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이 숨쉬고, 움직이고 도약하는 것을 경험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은 자라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싸움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게 할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고, 그런 것을 느낀 적이 없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심각하게 되물어야만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정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가? 살았다고 하지만 죽은 자는 아닌가?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가셔야 합니다. 특별한 은혜를 구하셔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원한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B. 건강한 성경적 교회의 이상: ‘눈을 빼어주는 성도’(15)와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 상이 이루도록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목사’(19)
저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보면서 제 속에 있는 ‘교회, 성경적 교회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이 다시 한 번 불타오르게 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눈을 빼어주는 성도’와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도록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목사’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들의 첫 목사인 바울 사도를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간이라도 빼어주려고 할 만큼 그들은 그들의 목사를 사랑했습니다. 바울 사도를 존경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바울 사도의 학식 때문이었겠습니까? 아니면 복음의 사역을 위한 그의 고생 경험 때문이었겠습니까? 인격적 매력 때문이었겠습니까? 오직 하나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해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기뻐받았고 그 말씀으로 구원을 경험했고 그 말씀 안에서 믿음이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목사와 성도들을 맺어주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적 사랑이나 정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안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맺어짐이 없는 목사와 교인 관계는 결코 교회를 세워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관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 본질을 떠나지 맙시다.

John Brown은 말하기를 “목사가 성도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들의 목사를 사랑할 때 그 교회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는데 바로 오늘 본문에 딱 들어맞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John Calvin은 말하기를, “목사는 존경만 받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존경과 사랑 이 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가르침은 달콤한 맛을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보여준 모범과 같이, 저도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는 일을 위해서는 어떤 댓가도 지불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선한 목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생명을 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다소 부담스럽더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면 거리낌없이 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은 목사와 성도의 관계로 묶어주셨습니다. 이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의 관계로 묶어주신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는 오직 사랑의 의무 밖에는 없습니다.

성도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 위해서 어떤 댓가도 치루고, 생명이라도 내어주려는 목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그들의 목사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자기들의 눈이라고 빼어주기를 원하는 성도들, 이것이 죠이선교교회의 현재와 미래가 되기를 주 앞에 간절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