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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10) - 두 어머니, 두 언약, 두 아들

갈라디아서 4:21-3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8-19

말씀내용
1. 서론: 믿음을 외적 조건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믿음을 외적 조건으로 증명하는게 가능할까요? 가능하다면 얼마나 가능할까요? 갈라디아에 와서 거짓된 가르침을 주었던 유대주의자들은 물론 이 대답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그렇다’(Absolutely yes.)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믿음은 할례를 받았는가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습니다. 또 믿음은 율법의 계명들을 그가 지키고 사는가에 의해서도 증명이 됩니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갈라디아 교회에만 국한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많은 교회 그리고 모든 시대의 교회 가운데 있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믿음을 혹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됨을 외적 조건이나 증거로써 증명하거나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할례, 율법의 순종, 기타 여러 경건의 조항들의 준수와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과연 신앙이 이렇게 기계적이고 외적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요? 만일 이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대답을 하면 하는 만큼 우리의 신앙과 그 가르침은 심각한 오해를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정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고 맙니다. 이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그런 신앙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 빠져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은 결코 세례를 받았다는 것, 혹은 직분을 가졌다는 것, 또는 열심히 봉사하는 삶이나 기도 열심히 하는 것 같은 것들로 증명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약간의 긴장이 존재합니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며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이 되게 하라는 말씀은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주는 도전입니다(약 2:17~18). 그러나 동시에 그 순종의 행위가 과연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인가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는 그런 식의 분위기에 젖어있는 두 교회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한 교회는 가르침에 있어서도 매우 율법주의적이었고 생활면에서도 그랬습니다. 또 한 교회는 가르침이 꼭 율법주의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생활면에서는 분명히 그런 율법주의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개는 이러기가 쉽습니다. 저는 비록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 안에서 신앙에 대한 오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장하면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더 바르게 깨달아가면서 배우게 된 것은 남의 믿음을 평가할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 참 믿음이고, 믿음이 좋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분별력이 많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소위, 믿음이 좋다, 나쁘다고 할 때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판단 기준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종교적 노예가 되려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쓴 서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확신과 은혜와 자유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성경을 대하면서 특별히 갈라디아서를 대하면서 우리가 그런 믿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과 통찰을 바르게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견해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외적 조건?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누릴 수 있다. 비록 너희는 직접적 자손은 아니지만, 너희도 그 축복을 누릴 수는 있는데 그 길은 너희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길이다.” 그들이 믿음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지만, 믿음만으로는 아니고, 믿음 위에 할례와 율법 순종의 행위가 있어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을 부르는 호칭에서 우리는 그가 느끼는 위기 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그들은 아직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 아래 있으려고 그 쪽이 좋아보이니까 그리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부르면서 말해 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정말 무슨 의미인지 도대체 깨닫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먼저 22~23절에서 구약의 역사를 소개하고, 24~27절에서는 그 의미를 비유적으로 해석하고 28~30절에서 그 해석을 각 개인의 삶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가 역사를 소개하는 장면을 봅니다.

2. 역사(22~23)
또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보다, 그가 가졌던 두 아들과 그 두 아들을 낳은 두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아들은 이스마엘과 이삭이고 각각 두 아들의 어머니는 하갈과 사라입니다. 그런데 그 각각의 이름을 여기서 바로 부르지 않고 ‘계집종’과 ‘자유하는 여자’라고 부릅니다. 의도가 있겠지요.

A.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점
아브라함의 집 안에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두 아들은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한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아들들이었고, 한 집에서 자라났으며, 둘 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의 표시로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둘의 차이점인데, 첫째는 그들의 어머니가 달랐으며, 둘째로는 태어난 방식이 달랐습니다.

i. 어머니가 다르다(22): ‘계집종’ vs. ‘자유하는 여자’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계집종이었던 반면,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자유하는 여자였습니다. 하갈은 애굽 태생으로서 사라의 여종이었습니다.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사라를 대신하여 이스마엘을 낳아준 여인입니다. 그래도 그녀의 신분은 계집종이었습니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자유한 여인었습니다.

ii. 태어난 방식이 다르다(23): ‘육체를 따라’ vs. ‘약속으로’
이스마엘과 이삭, 두 사람은 태어난 방식도 달랐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고,’ 이삭은 ‘약속으로’ 말미암은 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육체를 따라 났다는 표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창세기 16장을 거슬러갑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85세가 되었습니다. 아내 사라는 10여년 차이가 나니까 75세 정도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10년이 지났습니다. 이 10년은 단순한 10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25살 된 부부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셔서 10년이 지나도 35세 나이 정도라면 뭐 10년 더 기다릴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나이에 10년은 이미 모든 희망이 다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야말로 ‘zero’였습니다. 그 때 조급해진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내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으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육체를 따라’ 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삭은 기다려서 얻은 아들입니다. 모든 인간적 조건, 자연적 조건이 불가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받은 응답이었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이삭은 정말 약속으로 받은 아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지혜, 능력, 시도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약속으로 말미암은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B. 이삭은 선물이었고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방법 대신 자기 방법으로 시도한 결과였다.
두 아들이 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할 수는 있었지만, 분명히 차이가 존재했습니다.두 아들 중 하나는 육체를 따라 낳았고 하나는 약속을 따라 그리고 성령을 따라 낳았습니다. 이삭은 선물이었고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방법 대신 아브라함이 자기 방법으로 시도한 결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식을 선물이라는 표현으로 종종 씁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부가 결혼해서 자연적으로 낳는 것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자식이라는 엄청난 신앙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의 고백이 없다면 자식은 선물이 아니라 육체를 따라 낳은 것에 불과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구별을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출생을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행한 태도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신념이었지, 결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자기들이 팔걷고 나서서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 일을 했고 그 결과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이런 요소가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자기 노력의 산물입니다.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사실 우리 믿음이 절대 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절대 무한의 신뢰인데, 아무리 겉으로는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선물이지요’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사실 자기 마음 속에는 ‘우리가 하갈을 취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이스마엘은 태어날 수 없었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운운해도 속으로는 압니다. 내가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게 이스마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행동으로 얻은 아들이고, 이삭은 믿음으로 얻은 아들이라는 겁니다. 이스마엘은 종교이고 이삭은 복음을 대변합니다. 전자는 율법이고 후자는 은혜를 대변합니다. 결국 이스마엘은 성경의 역사 중심에서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삭은 야곱을 그리고 야곱은 열 두 아들을…하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운 사실 하나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이삭 아니면 이스마엘이라는 것입니다.

3. 비유(24~27)
이제 이 역사의 이야기를 바울 사도는 해석하는데, 이 해석이 다소 어렵습니다. 바울은 이 역사의 이야기를 비유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어머니(하갈과 사라)가 각각 두 아들이 있는데(이스마엘과 이삭), 이 어머니들은 각각 두 언약을 상징하며(옛 언약과 새 언약) 또한 각각 두 성을 상징합니다(현재의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 이것이 바로 아웃라인에 써놓은 것입니다.
A. 하갈=옛 언약(율법)=현재의 예루살렘?이스마엘
B. 사라=새 언약(복음)=위에 있는 예루살렘?이삭

바울 사도는 소위 풍유적(allegorical) 해석을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하갈은 옛 언약 즉, 시내산에서 주어진 모세의 율법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 즉 후에 이스마엘이 자기의 근거지로 삼게 된 아라비아를 연결시키면서 그 아라비아에 있던 시내산을 또한 연결시킵니다. 그 시내산은 모세가 율법을 받은 산입니다. 그 율법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맺어진 새언약과 대조되는 옛 언약입니다. 하갈은 이렇게 옛 언약을 대표합니다. 그 율법 행위에 매여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계집종인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가 아들이 아니라 종이 된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종의 자녀이기에 종인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시 이 하갈은 현재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지리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제도적 유대교의 중심지입니다. 갈라디아에 온 유대주의자들이 그렇게 자기들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서 갖다 대는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가 하갈은 오늘의 예루살렘이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은 바울 사도 당시의 유대인,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 영적 의미에서는 이방인이며, 나아가서는 아랍인과 다름이 없다라는 선언이므로 매우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사라는 옛 언약이 아니고 새언약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율법이 말하는 바, ‘하라’와 ‘하지 말라’가 아니라 복음이 선언하는 바, ‘내가 하겠다’, ‘내가 해주겠다’는 약속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26절에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말입니다.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즉 자유자입니다. 이로써 바울 사도가 상징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결코 아브라함과 혈연적 관계를 가진 집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종처럼 눈치를 보면서 살지 않고 아들의 권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라가 바로 우리 어머니다 라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성령을 받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울 사도는 바로 이사야 54:1을 인용합니다. 27절입니다.
갈 4: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유다 왕국이 망하여 무수한 유다의 자녀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지만, 나중에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신 후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었습니다. 즉,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 교회를 상징하는 사라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잉태치 못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슬퍼해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에게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녀는 남편이 있어서 자식을 많이 낳은 자들?가령, 하갈 같은 여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자식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4. 교훈과 적용(28~30)
바울 사도가 이렇게 다소 어려워보이는 해석을 갈라디아 교회에게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의 권위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이라 불리우는 거짓 교사들을 책망하며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한편, 갈라디아의 구원받은 성도들이 율법 아래 속하여 종과 같은 신앙 생활로 떨어지는 것을 면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21세기의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교훈과 적용을 주고 있습니다.

A.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다(29).
구원받은 성도들은 모두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28). 그러나 성령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은 언제나 육체를 따라 난 자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이스마엘은 14살이었습니다. 이삭이 젖을 떼던 3살 때 이스마엘은 17살이었습니다. 그 때 사라가 본 것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창 21: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놀린다는 말은 ‘희롱하다’ 혹은 ‘가지고 놀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핍박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원리를 말합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도 그러합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그 때도 유대주의자들인 거짓 교사들이 참 성도들인 갈라디아 사람들을 희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고 교회 역사 속에서도 그랬습니다. 이것은 두 아들이 다 유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두 아들 모두 아브라함의 혈통적 아들들이었지만, 하나는 약속의 자녀로 유업을 이을 자였고 하나는 종으로서 나가게 될 자였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지고 제대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성경은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 믿음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희롱하며 핍박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기대치입니다. 좋던 관계가 상하고, 집안에서도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입니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여러분, 이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참 성도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려고 한다면, 평화가 깨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길만이 온전한 샬롬,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면서 얼마나 이런 위기를, 이런 결과를 겪고 사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믿음은 참과 거짓을 나눕니다.
고후 6:14b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a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B.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30).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것을 본 사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입니다.
창 21: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아브라함이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합니다.
창 21: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아브라함은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쫓았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것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주려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을 거짓된 가르침으로 넘어지게 하는 유대주의자들을 내어쫓으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교묘하고 교활하게 자기의 의도를 가지고 돌려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였습니다. 거짓된 가르침, 거짓 복음이 교회를 얼마나 무섭게 넘어지게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기에 바울 사도는 그들을 내어쫓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존재한다면, 목사는 바뀔 수 있고, 교인들도 바뀔 수 있지만, 교회의 터가 되는 진리의 말씀만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양보는 교회의 터를 흔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은 계집종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함께 얻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C. 당신은 정말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인가?(31)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31절에서 3장과 4장 전체의 결론을 줍니다.
갈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의 많은 성도들은 분명히 바울 사도의 전하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믿었으며 의롭다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령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유대인들처럼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봉사를 잘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그런 식의 외적 조건으로 증명하고 살기에는 너무나 불안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양심의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듭난 자들에게 주시는 그 위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더 봉사하고 더 노력하고 더 경건의 외모를 가짐으로써 자기를 확인하려고 하는 삶을 반복적으로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 아니라 종이라는 반증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여러분의 선한 행위와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됨의 지위와 신분을 획득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결코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아들은 아들의 영인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주시는 영이십니다(롬 8:16). 그는 아들로 인정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이라는 이 변치 않는 확신으로 인하여 의무가 아닌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비록 감당할 수 없는 죄에 넘어졌을지라도 아들이라는 확신 때문에 더욱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은혜를 구하는 담대함을 가지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죄인을 찾아오시는 자비로우시고 무한히 긍휼하신 은혜의 하나님 앞에 다시 한 번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자신이 종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느끼시는 분들은 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나, 아들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확신 가운데 있는 분들은 감사함으로 아버지께 나아가십시오. 어찌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단 말입니까? 더욱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내가 아직도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분들이나 외적 조건으로 자기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해왔다는 생각을 가지는 분들을 하나님은 지금 초청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세상에 이런 무조건적인 초청은 결코 없습니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주심으로써 구원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을 뿐 아니라, 죄인의 아버지가 되시기를 기뻐하시고 죄인들에게 당신의 영광과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홀로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