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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11) - 은혜 아래 사는 삶의 자유

갈라디아서 5: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9-02

말씀내용
1. 오해: “예수 믿고 나서 자유를 잃어버렸다.” “예수 믿으면 자유를 빼앗긴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자유를 얻으셨습니까, 아니면 또 다른 구속을 당하셨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자유를 빼앗길까봐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고도 말하곤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관한 매우 중요한 오해를 담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는 바로 이런 자유에 관한 이해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과연,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얻게 된 자유가 무엇인가? 그 자유를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기독교인의 자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다아서를 가리켜 기독교인의 자유의 헌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 자유는 성화의 열쇠(1)
우리가 보통 자유라고 말할 때, 그 자유의 의미가 다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 미국의 건국 초기부터 시작해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가치 가운데 자유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온 가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유의 개념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는 매우 차이가 큰 것이 되었습니다.

A. 왜곡된 자유: “간섭하지 마!”?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종교로부터의 자유
그 왜곡된 자유의 개념은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혼자 있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지요. 지극한 개인주의를 드러내는 자유의 개념입니다. 이것의 근본에는 철저한 이기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대륙 초기에 청교도들이 대서양을 건너올 때는 ‘종교의 자유’ 또는 ‘신앙의 자유’라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왔다면 오늘날의 미국은 ‘종교의 자유’가 아닌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외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옭아매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선언이고 추구입니다. 이런 자유의 개념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자유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자연히 반기독교적인 입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그리고 신앙은 언제나 또 하나의 구속이요, 올무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자유의 개념은 결코 본래적인 자유도, 성경적 자유도 아니며 단지 왜곡된 자유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B. 성경적 자유: 죄와 사망과 마귀로부터의 자유.
성경적 자유의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한정어 자체가 자유를 구속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굳이 비유로 설명하자면, 물고기에게 ‘바다 혹은 강물 안에서 자유’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과 뭍을 넘나들 수 있는 자유가 있다거나 그가 뭍에서 살아갈 자유가 있다거나, 혹은 어느 집안의 작은 어항 안에서 살아갈 자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갇힘이요,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은 자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하셨기에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때 비로서 사람으로서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하고 온전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죄을 지은 인간이 본성이 타락하면서 그들의 죄성은 더 이상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려고 하지를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실로 그들은 벗어났습니다!

그 벗어남은 해방이나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며 억압이고 소외이며 상실이었습니다. 그 벗어남의 결과로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은 그들이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결코 자유할 수 없는 구속되어 버린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와 죽음과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외없이 저와 여러분이 모두 다 그러했습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죄, 죽음,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자유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라고 말할 때, 왜 ‘그리스도 안’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만 우리가 그 종의 자리에서 해방되었고 자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죄를 이기셨고,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죄의 형벌인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정복하셨으며,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권세를 가진 마귀의 권세를 짓밟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담 이래로 인간의 운명이 되었던 것을 깨뜨린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에 의해서 이렇게 설명된 바 있습니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존 스토트가 말했듯이, “우리의 이전 상태는 노예상태?죄와 죽음과 마귀에게?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자시며, 회심은 해방되는 사건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의 삶”인 것입니다.

이제 죄인이었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거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서 하나님이 되라고 하시는 그 모습이 될 수 있고, 하라고 하시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것입니다. 물고기가 뭍에서 물로 들어옴으로써 드디어 물고기가 되었고 맘대로 헤엄칠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인간은 참 인간이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전,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는 참 인간이라고 생각했을지라도 우리의 의식과 생각, 마음과 태도의 뿌리가 전부 심하게 왜곡되어 있어서 참 인간으로서의 의식과 생각과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살 수 없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 대한 모든 생각이 다 왜곡되어 있어서 바르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할 수도 그분을 물론 영화롭게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C. 거저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고 신뢰하는 만큼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린다.
그러니까, 이것을 이렇게 말로 설명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마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은 저도 여러분도 다 아는 것입니다. 문제는 소위 ‘거저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고 신뢰하는 만큼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명제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거저 주신?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는 만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주관적인 이해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를 절대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한다면 그것은 404장 찬송가 가사의 후렴과 같을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시편에서도 그 하나님은 은혜를 가리켜서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시 36:5)라고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그 은혜는 끝이 없고 무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의 한계로, 감성의 한계로 알고 경험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깨닫고 경험하면, 자기 자신의 존재로부터 정말 해방되어 자유하게 됩니다. 온갖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표출되는 교만함으로부터, 자기 실현이나 자기 성취라는 그 알량한 목표 의식으로부터 해방되어 처음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절대로 사랑할 능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기껏 사랑한다고 해도 그리고 고상해 보여도 그것은 이기적 동기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자신의 환경과 모든 상황에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자족함이라고 했습니다(빌 4:11).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죄의 욕구에서 풀려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자유를 또한 얻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은혜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약화되고 기독교인들의 삶이 도무지 연약한 상태에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두 세기 전의 신학자 였던 Archibald Alexander(1772~1851)는 명확하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에 대한 믿음의 결핍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그 이름은 부르지만,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그것이 은혜를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 폐기론?도덕적 방종?으로 기울어지지 않으면서 이 온전한 은혜를 가르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는 일이 드문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영적 삶이 성장하는 것은 오직 이것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 되는 것이고, 우리 믿음의 유일한 내용은 거저 주어지는 은혜의 교리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쳐지기 까지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안에서 강력한 경건의 성장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은혜는 부드러운 것이지만, 또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최고의 힘이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은혜는 우리 안에서 참된 경건의 능력을 자라나게 합니다. 은혜를 대항하여 그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은혜가 성도의 삶의 주도적인 원인이 되고 힘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교회의 주도적인 힘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야말로 그리스도인을, 그리고 교회를 설명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입니다. 이렇게 누리게 되는 자유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삶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누리는 자유가 없는 성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3. 은혜에서 떨어지는 삶(2~4): 종의 멍에를 메는 삶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런 은혜에서 떨어지는 삶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은혜에서 떨어지는 삶은 자유인이 되었는데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본문 1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지금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종의 멍에를 다시 메려고 하는 위험에 빠져있는 것을 바울 사도는 직시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가 하면 은혜가 없으면 이렇게 됩니다. 은혜의 복음이 행위의 복음으로 둔갑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의 본성은 늘 은혜가 아닌 행위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A. 할례를 받는 자(2,3)=모든 율법을 행할 의무를 가진 자(3)=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자(4)
은혜에서 떨어지는 삶의 직접적인 표지는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이 할례를 받음으로써 구원을 확실히 하라고 했을 때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 말에 굴복하여 할례를 받는다면 그들은 은혜에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다면, 그들은 할례 만이 아니라 율법이 하라고 하는 모든 계명을 남김없이 완벽하게 다 지켜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3절의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할례만이 아니라 수많은 명령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할례에 있다면, 할례만이 아니라 율법의 모든 명령을 다 지켜야 구원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결국 할례를 받는 자는 자기가 오직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가 아니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결과들을 얻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B. 그 결과:
i. 그리스도께서 아무 유익이 없다(2).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심, 그리고 고난을 당하고 죽으심과 부활하심, 마지막으로 승천하셔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부어주심 이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은 할례와 율법 지킴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고,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인 죽음을 당하셨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먼저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승천하사 성령을 보내어주신 이 모든 것이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ii.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들이다(4).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이 아무 유익이 없다면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거하는 자들이요, 여전히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고 그리스도에게서 여전히 끊어진 자들입니다.

iii.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이다(4).
결국 한 마디로 그들은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이 되어서 은혜 아래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의 원리는 ‘자기 힘’, ‘자기 유익’, ‘자기 추구’일 뿐입니다. 은혜가 아닙니다. 가인의 삶인 것입니다.

4. 은혜 아래 사는 삶(5~6): 자유를 누리는 삶
하지만, 바울 사도는 여기 은혜 아래 사는 자유의 삶을 대조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4절까지 ‘너희는’이라고 말하다가, 바울 사도는 5절과 6절에서 ‘우리가’라고 전환을 합니다. 이 두 구절의 열쇠가 되는 개념은 바로 ‘믿음’입니다.

A. 믿음에 근거한 확실한 소망을 바라는 삶(5).
바울 사도는, 아니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믿음에 근거하여 확실한 소망을 바라는 삶을 살아갑니다. 성령님께서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십니다. ‘성령으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또는 ‘성령을 통하여’라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모든 성도의 심령 안에서 믿음을 끝까지 붙들게 해주셔서 그 믿음으로 미래의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게 해주십니다. 그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이 은혜 아래 사는 삶의 한 가지 특징입니다.

B. 믿음이 사랑으로 표현되는 삶(6)
그러니까 은혜 아래 사는 삶은 자유로와서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외적인 형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을 약간 특이한 방식으로 수식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뒤에서 다시 자세하게 말하고 싶은 요소를 잠시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하는 믿음’입니다. 즉,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사랑이 은혜 아래 사는 삶의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할례라는 외적 형식 너머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효력을 가지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의 복음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그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이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관련해서 뒷부분에서 보다 깊고 상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5. 교회를 무너뜨리는 요소: 잘못된 가르침(7~12)
이런 은혜 아래 사는 삶?참 자유인의 삶?을 무너뜨리는 존재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마라톤 경주에 비교할 때, 경주를 잘 하고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와서 거짓 복음을 가르치기 전까지만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누군가가 들어와서,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막은 것입니다. 그들의 잘 달리는 경주에 장애물을 두어서 넘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A. 믿음이 무너지면 은혜가 무너지고 은혜가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진다.
여러분, 부도덕한 행위보다 더 무섭게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바로 거짓된 가르침,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말씀드려왔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그 거짓 가르침의 핵심은 언제나 ‘오직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신칭의에 다른 것을 섞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무너지면, 은혜도 설 자리가 없음은 자명합니다. 은혜는 본질상 믿음에 상응하는 개념이지, 율법의 행위와는 함께 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은혜는 자격없는 죄인이 믿음 하나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게 된 의롭다하심을 얻은 죄사함의 축복이고, 자녀됨의 권세이며, 영원토록 주와 함께 왕노릇할 보장을 받은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을 분명히 붙잡으셔야 합니다. ‘믿사오니’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거저 주시는 은혜의 복음의 내용을 분명히 알고 깨닫고 경험해야 합니다. 여기에 은혜가 찾아옵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교회는 다 무너집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마치 적은 누룩이 온 밀가루 덩이에 퍼지는 것처럼 무섭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5:6에서 9절과 동일한 말씀을 했는데, 거기서는 죄악된 행위를 가리켜 말했습니다마는, 여기서는 잘못된 가르침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교회를 무너뜨리는 악한 영향력을 누룩이라고 비유할 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마 출 12:15의 유월절 기사였을 것입니다.
출 12:15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 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 날부터 칠 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누룩을 유월절과 무교절 기간에 없게 해야 하고 누구든지 누룩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진다는 말은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누룩 없는 떡과 같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거짓 가르침과 교리들은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그 전염력은 너무나 빠릅니다. 교회를 무너뜨리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지 않는 교회를 상상해보십시오. 그 교회는 빠른 속도로 타락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빈 자리를 다른 가르침이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B.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10),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12)
교회를 이렇게 무너뜨리도록 만든 것이 잘못된 가르침이라면, 결코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일 수 없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자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요동케 하고(10절) 어지럽게 하는 자들입니다(12절). 여기 ‘어지럽게 한다’는 단어는 국가를 전복시킨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교회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다는 매우 심한 표현입니다. 무엇이요? 잘못된 가르침이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주 예수님의 날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10절). 그리고 바울 사도의 바램은 몸에서 살을 베어내는 할례를 그토록 강조하는 그들이 오히려 교회로부터 베어냄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2절).

6. 할례의 복음이냐, 십자가의 복음이냐?(11)
결국 우리는 이런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할례의 복음을 말하고 들을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들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할례의 복음은 교양과 도덕, 올바른 삶, 보다 나은 삶을 강조하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존심을 결코 건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세워주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 할례의 복음은 어디서나 회개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죄인들에게 환영을 받곤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언제나 인간의 자존심에 도전하고 결코 아첨하지 않기에 사람들에게 싫어함을 받고 심지어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인간이 죄인이며 소망이 없으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핍박을 받는 이유입니다.

바울 사도는 11절에서 자기가 만일 할례를 전했다면 핍박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할례의 복음을 전했다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거치는 것(scandal)입니다. 거치는 것이란 말은 헬라어로 skandalon인데 여기서 영어 단어 scandal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Scandal 은 결코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1,2세기에는 십자가라는 단어 자체가 로마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혐오감을 주는 단어였기에 사용을 피하곤 하였습니다. 그런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죽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복음은 거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으셨습니까? 교회 봉사, 직분, 분명한 결신, 세례, 교회의 멤버…만일 우리가, 우리가 하는 어떤 것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우리는 은혜 아래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경주, 특별히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이 긴 구간을 달음질할 때 많은 변수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깨닫고 느끼시면서 사십시오. 우리의 미래의 구원은 보장되었기에 우리는 소망 중에 그 날을 기다리면서, 그 은혜 아래서 사랑으로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