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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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12) - 사랑으로 표현되는 자유

갈라디아서 5:13-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9-09

말씀내용
첫번째 키워드?은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사망과 마귀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자유의 삶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아래서 살아가며 누리는 삶입니다. 은혜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의 너무나 중요한 핵심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여러분이 행하는 많은 것은 놀랍게도 힘을 잃고 맙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너무나 자유한 존재입니다. 아무도 그리고 무엇으로도 그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키워드?사랑
바울 사도는 이미 5:6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칭의를 얻게 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사랑이라는 너무나도 실제적인 주제로 옮겨갑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믿음에 대한 교리에 기초하여 갈라디아 사람들이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랑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함께 간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는 점에서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 곧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 서로간에도 사랑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친절과 좋은 분위기 같은 것과는 엄연히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1. 사랑의 법(13~15)
바울 사도는 13절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로 방종의 유혹입니다.

A. 자유로의 부르심과 방종의 유혹: 율법주의와 방종의 사이
교회 안에는 보통 두 가지의 극단적 신앙 양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이고, 또 다른 편에는 방종(무제한의 자유)이 있습니다. 지금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이 두 가지 문제 모두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유대주의자들이 가르쳤던 것은 율법주의였고 바울 사도는 지금까지 그 잘못을 교리적으로 지적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반대편의 극단 즉 방종으로 치달아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 편지를 계속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3절입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B. 사랑의 종노릇(섬김): 무한 책임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 ‘자, 이제는 먹고 마시자. 율법도 그 무엇도 나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위는 없다’고 말하게 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바울 사도는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도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는 이들이 있어왔습니다. 율법주의가 자유 없는 책임을 강조했다면 방종은 책임없는 자유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 자유는 본질적으로 죄로부터의 자유이지 죄를 지을 자유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그 자유를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종노릇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노예가 되다’ 또는 ‘예속되다’는 단어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유라고 선언하고 나서 다시 슬그머니 ‘사실은 그게 아니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유와 종노릇은 상호 모순이 되는 단어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어떤 의도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조금 더 읽어보면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자유에 대하여 부연하면서, 온 율법을 한 마디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한 마디로 율법은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막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즉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조항들은 사실상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다양한 표현방식들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말하지 않고 단지 이웃 사랑만을 이야기합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보다 이웃 사랑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이웃 사랑은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이런 사랑의 종노릇함의 개념을 어디서 배웠겠습니까? 바로 성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었습니다.

i. 그리스도의 사랑의 섬김: 십자가
주님은 십자가에서 사랑의 종노릇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자유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아무 것, 어느 피조물도 그분의 전능하신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어떤 권위도 그분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위는 없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은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는 분이셨습니다(요 10:18).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권면할 때 바울 사도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고 있던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토록 그리고 완전히 자유하셨으나 십자가에 자신을 주심으로써 사랑으로 종이 되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자유하게 된 사람들이 살아야 할 자유인의 모습이요,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자유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먼저 본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은 언제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자신을 보는데서 가능한 것입니다.

ii. 성부 하나님의 사랑의 섬김: 아들을 보내심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의 섬김(종노릇)을 다시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의 섬김은 독생자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 죽도록 허락하셨다는데서 나타났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 또한 완전한 의미에서 자유하신 창조주시요,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아니하시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이 정말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사실상 서로에 대한 무한 책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과 영원, 그리고 육신과 영혼에 대하여 무한 책임을 감당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의 섬김이며, 하나님이심에도 스스로 낮추고 복종하사 십자가에 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섬김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죄인들을 향하신 사랑이 무한한 것이라면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도 이만하면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사랑을 감정으로 제한해버리고 사랑에 따라오는 책임(commitment)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말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한 마디 더 붙이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갈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자유를 방종으로 바꾸어버리게 된다면 교회는 결코 사랑의 섬김(종노릇)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는 서로 물고 뜯는 현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경고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싸움과 다툼은 영적 자살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우리 안의 영적 전쟁(16~18)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의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입니다.

A. 육체 대(對) 성령
본문은 우리 안에 육체의 소욕이 있고 성령의 소욕이 있다고 합니다. 그 둘은 서로를 거스린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내면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비정상이 아닙니다. 육체와 성령의 전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최고의 영적 전쟁입니다.

i. 육체(flesh, the sinful nature)
여기서 바울 사도가 사용하는 육체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너무나 분명한데, NIV가 잘 번역한 대로, ‘sinful nature’입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 내 안에 있는 성질이며,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 자신이 죄로 기울어지도록 만드는 영적이지 않은 생명을 육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외에 자기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나 자신이 바로 육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는 이미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우리 속에 있던 본성인 육체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시고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서로 다른 두 방향으로 우리 자신을 끌고 가려는 힘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이 둘은 서로 대적하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B.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 너무 강하거나 성숙해서 성령의 권고를 들을 필요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고, 너무 약해서 성령의 능력으로도 육체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리스도인도 없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인데, 바울 사도는 16절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Live by the Spirit)고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서 우리는 육체의 소욕,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지도, 여러분의 결심도 결코 이 영역에 있어서 여러분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없습니다.

너무 강하거나 성숙해서 성령의 권고를 들을 필요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고, 너무 허약해서 성령의 능력으로도 육체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리스도인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성령님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이들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갈 3:1~5)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신자들에게 누리게 하시는 자유의 삶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적어도 우리에게 세 가지 영역에서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제일 먼저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16절은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모든 거듭난 신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이유입니다.

둘째는 사랑으로 종노릇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섬김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언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수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질 때입니다. 성령님께서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십니다.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C. 성령 안에서 율법의 위치 변화
세번째는 율법을 이룰(성취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된다는 말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즉,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율법 아래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전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즉, 율법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면 우리와의 관계에서 그 위치가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상관없이, 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살면 우리는 율법 아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을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신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라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를 율법 아래서 율법 위로 올려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온 율법이 이웃 사랑의 한 말씀에 요약된다면, 그리고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사랑의 법인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신자에게 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스펄전 목사님의 설명을 빌면, 율법은 막대기와 같아서 죄인들 위에 존재했는데, 죄인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 막대기는 죄인들의 머리 위에 있다가 죄인들을 내려쳤습니다. 이것이 죄인이 율법 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신자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아래에 놓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더 이상 죄인을 내려치는 막대기가 아니라 신자가 길을 행할 때에 하나님의 길과 기준을 안내해주는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지팡이를 가지고 하나님의 길로 행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율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노릇함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3. 교훈과 적용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A. 전쟁의 대상을 분별하라.
먼저 전쟁의 대상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것입니다. 은혜가 없을 때, 우리가 성령을 따라 걸어가지 않을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는 죄의 종들이 되는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성령을 따라서,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 전쟁이 있습니다. 놓치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 있는 어떤 형제가 전쟁의 대상이 아니라 전쟁의 대상은 우리 모두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 싸움을 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B. 성령을 따라서 사랑하라.
그 싸움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을 따라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이 비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비밀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주신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함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룰 수 있는 자유함입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안에 있는 선한 결심으로 서로에게 사랑의 종노릇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령님을 좇아 살아야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 때 비로서 우리는 사랑하게 되고, 사랑으로 종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