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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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14) - 영적인 삶을 사는 길

갈라디아서 6: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9-23

말씀내용
1. 오해: 영적인 삶(true spirituality)은 하나님 앞에서만 사는 삶이다.
‘영적인 사람이다’ 혹은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에 대한 뿌리깊은 오해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역사에는 사막에 탑을 세우고 그 위에서 삶을 보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상대하기 보다는 하나님만을 대하면서 삶을 보내고 명상을 하면서 보내는 삶이 보다 영적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삶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성경이 승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대하고 살겠다는 것은 성경이 의도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오해입니다.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삶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삶은 함께 살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은 것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하고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영적인 삶의 실제입니다. 그래서 F.Schaeffer는 이렇게 영적인 삶, 혹은 영성을 정의했습니다.

“영성(영적인 삶)이란 우리가 어떤 몇 가지의 것들 가령 탐심이나 죄에 대하여 죽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 대하여 살아있으며 역사의 바로 이 현재의 순간에 그와 친교를 나누는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우리는 인간들을 사랑하고 인간으로서 인간들에 대하여 살아있어야 하며 역사상 바로 이 현재의 순간에 인간들과 진실한 개인적 차원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는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보다 덜한 것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을 좇아 사는 삶?영적인 삶입니다?의 실제를 이제 6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도 많이 하고 성경 읽으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 영적인 삶의 실제: ‘서로’(고백, 용서, 짐을 짐, 책망, 회복, 돌아봄, 사랑……)
무엇보다도 영적의 삶의 실제는 ‘서로’라고 하는 단어에서 두드러지게 그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본문의 2절에서 한 번 ‘서로’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단어는 의미를 드러냅니다. 이 본문을 넘어서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서로’라는 단어를 통해서 표현해주는 면이 적지 않습니다. ‘서로 고백하라’(약 5:16), ‘서로 용서하라’(골 3:13; 마 18:21~22; 고후 2:6~8; 엡 4:32), ‘서로 붙잡아주라’(행 20:35), ‘서로에게 있는 죄를 책망하라’(엡 5:11; 딤전 5:20; 갈 2:14), ‘서로 회복시켜라’(갈 6:1), ‘서로 돌아보라’(롬 14),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요 13:34) 이 외에도 서로 위로하고 권면하고 권하고 기도하고 덕을 세우고 가르치고….너무나 많은 신약성경의 권면들이 ‘서로’라는 그리스도안에서의 형제 관계 속에서의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약성경의 강조는 우리 신앙생활이 교회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교회를 떠난 신앙생활, 교회를 떠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은 본질상 불가능한 것입니다.

A. 서로 바로잡으라(1): 형제가 범죄한 일이 드러날 때
첫번째로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1절에서 ‘서로 바로잡으라’는 것인데 이것은 ‘형제 중 누군가가 범죄한 일이 드러났을 경우’에 주는 권면입니다. 교회 생활 중에서 누구라도 이런 범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고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영적인 삶이고, 성령님을 좇아서 사는 것인가 하면 그를 바로잡아 주는 것, 그를 회복시켜주는 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i. 무엇을 하는가: 바로잡으라.
‘바로잡고’라는 말의 본래 뜻은 뼈가 골절되거나 탈골되었을 때 그 뼈를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인가 결함이 생겼을 때 그 결함을 고쳐서 원래 상태로 돌리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넘어졌을 때,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난하고 그를 벌주는 것이 할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잡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잡기 위해서 먼저 해야할 참으로 어려운 일은 그 범죄를 정면으로 대면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누구라도 싫어하는 일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5~17을 보면 예수님께서 권면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런 경우에 먼저 해야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일 자체를 다루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뼈가 어긋났는데, 어긋난 부분을 그냥 놔두고서 살에다가 연고를 발라주는 것으로 고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소위 ‘권징’(discipline)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종교개혁의 전통 속에서 어떤 교회들은 권징은 교회의 본질적 특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권징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된 것은 ‘벌주는 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권징의 본질을 언제나 벌주는 것이 아니라 고치는 것, 바로잡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만, 바로잡기 위해서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은 인간적 견지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령을 좇아 사는 영적인 삶의 부분이라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ii. 누가 하는가: 신령한 그리스도인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바로잡는 일을 할 사람을 ‘신령한 너희’라고 못박습니다. 즉,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그냥 ‘너희’라고 말하지않고 ‘신령한’이라고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하고 있던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성령을 받은 자입니까? 그래서 누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사는 자들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거듭남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인도하십니다. 물론 육체의 소욕이 남아있어서 범죄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 약간의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너희가 신령한 그리스도인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영적인 삶을 산다고 한다면’이라는 풍자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즉, ‘너희가 정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너희는 범죄한 형제를 바로잡아주어야 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그리스도인은 모두 이렇게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으로 나누어서 성숙한 일부의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이렇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미성숙해서 이 일을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는 반대로 형제의 범죄한 것이 드러날 때 이것을 바로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제를 비난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면 이로써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사람?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iii. 어떻게 하는가: 온유한 심령과 겸손함으로.
바울 사도는 바로 잡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바로잡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의 한 특성인 온유함입니다. 지난 주일에 설명드렸던 온유에 대한 정의입니다. 온유는 ‘진정한 겸손이고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입니다. 이것은 절제된 힘입니다.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온유함으로 하지 않으면 듣기 싫고 인정하기 싫은 법입니다. 정죄하는 마음으로가 아니라 ‘온유한 심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그 사람만이 아니라 나도 넘어질 수 있는 존재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겸손함으로 이 과정에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사람을 심판하는 재판관이 되라고 하지 않고 그의 ‘형제’로서 그를 ‘바로잡으라’고 말씀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제의 잘못을 다룰 때 그 사람을 얕잡아 보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B. 서로 짐을 지라(2~5)
영적인 삶의 실제, 두번째로 말씀하는 것은 ‘서로 짐을 지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두번째라기 보다는 ‘서로 짐을 지는 삶’에 포함된 한 가지 예가 바로 1절에서 말씀한 ‘범죄한 형제를 바로잡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일반적인 많은 경우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은 그리스도인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이런 인생의 모든 짐들로부터 면제된다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은 슬픔과 염려와 실패와 가난과 실직과 외로움과 육체적 정신적 질병과 가정적 위기, 침체 등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많은 어려움과 난제들을 의미합니다. 참 놀라운 것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이런 모든 인생의 짐들을 주님께 맡기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바울 사도는 이런 말씀들을 몰라서가 아니라 지금 그가 진리 안에서 가르치는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짐을 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짐 그것도 가장 무거운 짐이고 도무지 자기 힘으로는 벗을 수 없는 죄의 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벗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문제를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형제들을 통하여 그 짐을 나누어 지게 하심으로써 가볍게 해주시는 방법도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부담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짐도 지고 가기가 어렵고, 우리의 개인주의적 생각은 남이 내 짐을 져주는 것도 부담스럽고 느끼고, 또 남의 짐을 져주는 것도 괜히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대하려 하면 얼른 이런 말이 우리 생각을 죽이고 맙니다. ‘It’s none of your business.’ 우리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를 쓰던 당시에도 헬라 철학 중에 스토아 학파의 영향이 많았는데, 그들이 가르친 것은 ‘인내하고 견디고 참으라’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훌륭한 덕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 도덕적 철학적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생각이 어떨지 몰라도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느낌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지는 짐들은 육체적이기도 하고 정신적인 것도 있으며 또는 영적인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의 짐을 져주는 것은 어떤 때는 기도로,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으로, 위로와 동정의 말 한 마디로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습니다. 또는 보다 구체적으로 나의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그 집에 찾아가서 청소를 해주거나, 아이를 봐주거나, 밥을 해주거나 음식을 가져다 주거나 하는 방식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서로를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영적인 삶을 사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옆에 있는 어려운 형제를 떠나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의 말씀입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러므로 여러분, 은혜 안에서 강해지셔야만 형제의 짐을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든든한 어깨와 강한 골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러분,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짐을 져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계십니까?

i.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2): 도덕법, 서로 사랑하라는 법(요 13:34; 15:12)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하게 되는 일은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고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새계명을 의미합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어떻게 우리가 서로 사랑합니까? 서로 짐을 져줌으로써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참 율법의 의도를 성취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ii. 남의 짐을 지지 못하는 이유(3): 교만과 비교, 하나님의 관점이 없음.
그런데 우리가 남의 짐을 져주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이고 남과 비교하는 태도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갈 6: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데, 뭔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교만인데, 이런 사람은 남의 짐을 져주기 위해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이는 것을 낮아지는 것이며 마치 그의 종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남의 짐을 절대로 져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강한 표현이기는 합니다마는, 우리가 남을 짐을 서로 져주는 것을 하지 않는데에는 바로 이런 착각?자기 속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무 것도 아니면서 뭔가 된 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보다 나으므로 네 짐을 져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속임의 태도는 결국 모든 관계의 실패를 가져오고 맙니다. 진정한 관계, 깊이 결속하는 관계를 누구와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남의 짐을 져주는 것도, 남이 내 짐을 져주는 것도 여기서는 불가능해집니다.

우리가 뭔가 됐다고 생각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바라보시는 관점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관점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영적으로 나은 사람을 보게 되면 내가 덜 영적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범죄하여 넘어지는 사람을 보면 내가 그보다는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비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남의 짐을 져주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남과 비교합니다. 둘 만 있어도 자기와 남을 비교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를 믿고서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비교의식으로부터 비로서 벗어나기 시작하게 됩니다.

iii. 영적인 삶의 필수적인 부분: 자기살핌(self-examination)(4)
누가 우리에게 당신이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은 쉽지 않고 그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쩌면 부부사이에서도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자기를 살피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영적인 삶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자기를 살피지 않고서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확한 평가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종종 우리의 미성숙함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주관적인 판단에 빠져서 자기연민이나 자기자랑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명령합니다.

여러분의 사랑과 인내가 그리고 기쁨과 평강이 지난 해에 비해서 더 풍성해지고 자라났습니까? 여러분의 온유와 절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측정해보고 돌아볼 수 있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남과 비교하지 않고서도 이런 진보를 인하여 충분히 기뻐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iv. 두 가지 짐(2,5): 혼자서 지기는 너무나 무거운 짐(2)과 배낭(5)
우리가 5절을 언뜻 보면 2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는 말씀과 상충되는 것처럼 읽혀지는 본문을 만납니다.
갈 6: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사실 이 두 구절에서 말씀하는 것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충적인 말씀입니다. 2절에서 쓰여진 ‘짐’과 5절의 ‘짐’은 헬라어에서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2절의 ‘짐’은 혼자서 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수하물 같은 짐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5절에서는 혼자서 질 수 있는 배낭 혹은 군인이 뒤에 메는 배낭 같은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헬라어로 이 서신을 읽는 갈라디아 사람들에 이 말씀은 조금의 혼란도 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혼자서 질 수 없는 짐들이 분명히 우리 인생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나누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하나님의 의도가 배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지고 가야 하는 배낭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몫입니다. 성경은 이런 짐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상의 말씀이 바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갈 5:13).

C. 서로 나누라(6)
마지막으로 영적인 삶의 실제로 바울 사도가 언급하는 것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의미로 볼 때 이 구절은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과 같은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가지는 관계에 대한 언급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는 것일까요?
초대 교회의 전통은 말씀을 가르치던 사도들로부터 시작해서 사도들로부터 세움을 입은 속사도라 불리우는 이들이나 이후의 모든 말씀을 전적으로 가르치는 자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을 당연한 교회의 의무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마 10:10; 눅 10:7). 이런 관점에서 이 구절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의 생계를 책임지라는 말씀입니다.

i. 목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실, 여기까지는 쉽지만, 많은 교회는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인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원리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리를 깨려고 하면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원리를 전해줍니다. 목사의 생계를 교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목사가 하는 일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바로 이 구절이 말하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일을 다른 많은 행정적인 일들과 병행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은 바로 사도 자신들이었습니다(행 6:2).
행 6: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供饋)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그래서 사도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 그리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행정적인 일들을 위해서 집사들을 세우고는 자신들은 본연의 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목사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은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르침을 받는 교회가 목사 자신의 집안의 생계를 유지하는 일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 9: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인하여 그 복음을 듣는 자들의 공궤를 받아서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니까, 목사가 밥을 먹지 않고 성경을 먹고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ii. ‘코이노니아’(함께 하라)의 참 뜻: 동업자/배우자/친구/함께 나누는 사람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할 때 ‘함께 하라’는 말은 헬라어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에서 나온 동사입니다. 그 의미는 동업자나 배우자 혹은 친구,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자원함으로 나눈다’는 말이 가장 적합한 번역이 될 것입니다. 월급(salary package)을 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고용 계약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매우 성경으로부터 벗어난 개념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 중 하나는 목사를 고용한다(hire)는 개념이며, 목사를 피고용인(employee)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런 용어들을 쓰는 것은 피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목사님에게 드리는 생활비를 전통적으로 ‘사례’(honorarium)라고 표현해왔습니다. 사례는 감사한 마음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고 honorarium은 ‘법적으로 보수가 요구되지 않지만, 봉사에 대하여 자원해서 지불하는 것’(Voluntary payment made for services where no fee is legally required.)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는 교인들의 자원하는 선물에 의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목적은 목사가 세상적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나서 말씀을 사역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서 보게 되는 것은 많은 부작용입니다. 이것은 이 성경의 원리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먼저는 목사가 탐욕을 가짐으로써 이 특권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자원함이 아니라 목사 자신이 요구함으로써 생활비를 더 받게 되지만 결국 이것은 본래의 목사직과 소명을 부인하고 그가 피고용인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양이 아니라 양털에 관심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성경은 무섭게 경고합니다. 반면에 교회가 목사를 재정으로써 조종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의 지도자들은 목사가 가난한 상태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목사를 성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두 가지 형태의 성경적 원리의 남용은 결코 영적인 삶에서 나오는 영적인 생각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저는 “목회는 사랑어린 섬김이요, 관계”라고 목회서신에 썼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 구절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 나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제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사랑의 섬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목회를 1년여 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깨닫는 것 하나는 목사가 사람이기에 이런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사랑어린 섬김을 가장 잘 할 수 있게 하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월급을 잘 주라가 아니라 ‘모든 좋은 것을 나누라’고 말입니다. 이런 교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3. 교훈과 적용
오늘 우리가 정리할 교훈과 적용이 있습니다.
A. 외톨이 그리스도인은 없다.
예수를 믿으면서 혼자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영성, 참된 영적인 삶은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혼자서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부족하고 모자라는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고 한 가족이 되게 하십니다. 특별히 성경이 교회를 가족이라고 표현하는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마는, 오늘 특별히 이 말씀을 근거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짐을 서로 져야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힘든 것을 자식들이 크면서 위로해주기 시작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격려합니다.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것들까지도 공동운명체로 살아갑니다.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그 가정안에서 소위 ‘왕따’같은 것이 있을 수 없고, 외톨이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보고 예수 믿겠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나는 깊은 관계는 맺지 않고 그냥 조용히 예수 믿겠다는 생각도 버리십시오. 사람 보면 시험드니까 하나님만 보고 신앙생활하겠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외톨이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나의 영적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의 좌우에 계신 형제자매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B. 교회가 삶의 중심이 되게 하라.
이런 면에서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교회가 되게 하셔야 합니다. 오래된 개혁 교회의 문구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여기에 다 집약이 됩니다. 세번째 항목 교회중심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면 그리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중심으로 산다면 여러분은 또한 교회를 중심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삶의 많은 영역 중 하나로서 존재하는 한 여러분의 신앙은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중심이 되게 하십시오. 살 집을 찾는 것, 아이들을 기르는 일, 직장 선택, 여러분이 가지는 인간 관계들…이 모든 면에서 교회가 중심에 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임을 잊지 마십시다. 내가 짐을 져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찾아 보십시오. 코이노니아를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를 발견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면, 그래서 여러분이 영적인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남의 짐을 질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