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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15) - 심은대로 거두는 삶

갈라디아서 6:7-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9-30

말씀내용
짐을 서로 지라는 명령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었을는지 모릅니다. 21세기의 우리들에게는 더욱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말이야 좋지만, 짐을 서로 진다는 것은 짐의 무게보다도 그 짐을 지기 위해서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더 무겁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관계를 힘들어 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 편한 길은 없을까”라고 질문하거나, “이 일을 언제까지 계속해야만 할까”하면서 고민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질문들을 이 본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삶: 전투 ? 농사
그리스도인의 삶을 5장에서 바울 사도는 전투에 묘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밖에 있는 형제나 자매 혹은 이웃과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내부의 적과 싸워야 하는 전투였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간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습관을 들여서 일관성있고, 꾸준하게, 그리고 끝까지 거룩한 습관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또 다른 그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농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농부와 같습니다.

2. 첫번째 유혹(7~8): 편한 길을 없을까? ? 심은대로 거둔다.
편하게 농사지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농부가 많은 생각을 해서 농기계를 만들며 편한 길을 선택한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심어야 거둔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면 ‘심은만큼 거두고, 심은 것을 거둡니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둡니다. 그리고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둡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방주에서 내어보내시면서 말씀하신 후로 이제까지 변함이 없는 사실입니다.
창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현재의 행동이 미래의 조건을 결정합니다. 영어에 이런 말이 있는데, 다분히 이것은 성경의 진리에 기초한 것입니다.
생각을 심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어 성품을 거두고,
성품을 심어 운명을 거둔다.

A. 두 종류의 농부: 영적인 사람 vs. 육적인 농부
청교도 목사였던 윌리암 퍼킨스는 말하기를, 두 종류의 농부, 두 종류의 씨, 두 종류의 땅, 두 종류의 추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 종류의 농부는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이며, 두 종류의 씨는 악(한 행실)과 선(한 행실)이고 두 종류의 땅은 육체와 성령이고, 두 종류의 추수는 멸망과 생명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이 이 둘 중의 하나에 속하게 된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영적인 농부입니까, 육적인 농부입니까? 선을 심으셨습니까, 악을 심으셨습니까? 육체에 심으셨습니까, 성령에 심으셨습니까? 이것에 따라서 여러분은 마지막 추수의 날에 멸망을 거두거나 생명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7b)

바울 사도는 부연하기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고 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다’ 또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B. ‘육체를 위하여 심는다’는 말의 의미
먼저 육체를 위하여 심는다는 말을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것은 매우 적절하고도 실제적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육체를 만족시키고 애정으로 길러가고 애무하며 그것에 아첨하는 것이다. 우리가 심는 씨앗은 넓게 말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다. 우리가 마음에 원한이나 불평을 품거나 불손하고 음란한 환상을 탐하거나 자기연민에 탐닉하는 때에는 육체를 위하여 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악한 자들과 어울려 그 좋지 못한 물에서 헤어날 수 없음을 느끼게 되었을 때는, 일어나 기도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침상에 누워 있을 때는, 외설 잡지 등을 읽고 있을 때는, 절제를 잃고 발끈 혈기를 낼 때는 우리는 어김없이 육체를 위해 심고 있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매일 육체를 위해 심으면서 자신은 왜 거룩함을 결실치 못하는가 하고 궁금해한다. 거룩함은 수확물(harvest)이다. 우리가 그것을 결실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거의 전적으로 우리가 어디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렇게 육체를 위해 심으면서도 그 농부가 기대하는 것은 좋은 수확물이라는 모순을 바울 사도는 지적합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만홀히 여긴다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는 ‘경멸하듯이 코끝을 돌린다’는 의미인데,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콧방귀를 뀐다’거나 ‘비웃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끝이 있으며 언젠가 우리가 인생을 통해서 심은 것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심은대로 거둡니다. 이것은 인생에서도 그렇고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C.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말의 의미
그러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어떻게 살면 우리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5장에서 설명한 말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성령을 따라 사는 것’,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 그리고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부터 나오는 씨를 심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그리고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마지막으로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에 육체의 소욕이 가득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있는 곳에 없던 사랑과 없던 기쁨, 없던 평화가 생겨나게 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심어가지고는 그런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심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로부터 나오는 씨를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의 수단’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정해두신 수단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 하면 좋다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두신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성만찬 그리고 성도의 교제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은혜의 수단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이 힘써야 할 의무와 같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들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상태에 거하는 것보다 더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코이노니아 그룹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직장에서 성령을 위하여 심을 수 있는 길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에 빠지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위해 심는 삶입니다.

D. 인생의 시간은 씨뿌리는 시간이다. ‘심은대로 거둔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인생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게 그 시간을 주셨는데, 우리는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생에게 가장 적절한 기회를 인생에서 허락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공평한 것에 대한 우리의 기준이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시고, 하나님이 정의의 기준이 되십니다. 인생의 시간은 씨뿌리는 시간이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인생이 어느날 마쳐지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씨를 뿌릴 수 없습니다. 그 이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의 인생의 시간 중에 심은 것을 거두게 되는 일입니다. 심은 것을 거둘 것이고, 심은 만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던 중 알았던 이 말, ‘심은대로 거둔다’는 말은 아마 우리가 추수하게 될 그 날처럼 실감나게 느껴질 날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심은대로 거둡니다.

E. 하나님을 비웃지 말라.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편한 길을 없습니다. 조금 편하고 불편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심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거두는 법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에게 처럼 이 말이 분명할 수 없습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좋은 대학에 진학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비웃고 하나님께 코웃음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했던 자들의 그런 비웃음을 마지막 추수의 날에 다루실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대로 거두게 됩니다.

3. 두번째 유혹(9~10): 계속해야만 할까? ? 계속 선을 행하라. 그날은 온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우면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계속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선을 행하되 한 두 번 행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하고 한 두 달 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했으면 1~2년 읽다 마는 것이 아니라 평생 읽어야 합니다. 교회 봉사를 시작했으면 그저 대충 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보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 두번 확 일어나서 신앙을 달구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신앙의 패턴에 익숙해있으시다면 고치셔야만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방법이 아닙니다. 신앙은 매일, 매 순간 하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의 이 수고가 끝이 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짐을 서로 지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 내가 짐을 져주어야 할 사람들이 끊이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내가 도와주고 사랑해야 할 이웃들이 조금도 줄어드는 것 같지 않습니다. 회복시켜주어야 할 범죄하는 영혼들이 언제나 많습니다. 누가 이 많은 필요를 감당할 시간과 힘이 있겠습니까? 이런 일들이 우리를 얼마든지 지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A. 그리스도인이 선한 일을 할 때 지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혹은 선을 행하다가 지치게 되는 일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면 ‘아, 내가 무슨 문제가 있구나’라고 판단할 것이 아니고 ‘내가 정상이구나’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리고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지치지 않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할 일이 없고 피곤해 지칠 일이 없다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바울 사도 자신이 전도 여행과 기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낙심할 뻔 했고 피곤해서 지치기도 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많이 지칩니다. 그런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도 하지 못하신 분들이야말로 사실 ‘회개할’(?) 문제입니다.

B. 지치는 이유
지치는 이유가 있습니다. 소위 burn out 된다고 말하지요. 탈진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i. 반대와 거절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심을 때, 가장 힘들고 지치게 하는 것은 아마 반대와 거절일 것입니다. 특별히 사람 농사를 지을 때 이것은 심각한 어려움이 되곤 합니다. 나는 선을 베풀려고 하는데 상대방에게서 나오는 반응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될 때 우리는 지칩니다. 이런 문제가 교회 안과 밖에서 다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런 저항에 한 번 부딪히게 되면 ‘그만 두지, 뭐’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도 하라고 말씀합니다.

ii. 즉각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또 하나,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선한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다 기대가 있습니다. 언제쯤이면 이런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농사는 심고 나서 몇 달이면 된다고 하는 예측을 할 수 있지만, 사람 농사는 다른 차원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사람 사람 마다 다 있는 것입니다. 임신하고 나서 9개월이면 출산한다는 식의 계산을 불허하는 영역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지치지 않고 계속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iii. 육체적 피곤함
육체적 피곤함은 무시할 수 없는 적입니다. 제가 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육체적 피곤함을 좋은 친구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신앙의 영역에서 우리가 피곤을 무릅쓰고 육체적 피곤함을 무시해가면서까지 하는 것을 ‘성령을 위해 심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것을 ‘육체를 죽이는 것’이라고 또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지치거나 범죄의 유혹에 직면하게 되는 때는 일반적으로 그가 육체적으로 지쳐있을 때라는 무시할 수 없는 통계가 있습니다. 육체적 피곤함은 거의 항상 영적 실패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피곤함을 조장하는 가르침이 교회 안에 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헌신의 경쟁을 부추기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쉼없이 일하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막 6:31)라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얼마든지 지나칠 수 있는 말씀을 마가가 기록해 둔 것은 분명히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원하시는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ㅏ

iv. 외부 환경
이외에도 우리를 지치게 할 수 있는 것은 외부 환경입니다. 농부에게 비가 와야 할 때 비가 오지 않는다든지, 비가 적당히 와야 하는데 너무 많이 온다든지 하는 것은 참으로 그의 수고를 지치게 만들고 맙니다. 영적 수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는데 예기치 않게 집안에서 일이 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업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곧바로 자기연민의 수렁 속으로 들어가 숨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고작 이런 식으로 갚아주시는거야’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으로 감당할 문제이지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여유가 되고, 시간이 많고, 물질이 많고, 건강이 넘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성령을 위하여 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C. 지친 사람은 쉬어라.
이렇게 선을 행하다가 지치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통 교회에서 어떻게 하곤 합니까? 아주 상식적인 판단이 여기 있습니다. 쉬어야 합니다. 힘드니까, 지치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라고 하는 것보다 더 불신앙적이고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지치면 격려를 해서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갈멜산의 격전을 치룬 엘리야 선지자는 영육이 다 소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일과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왕상 19:5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지치면 쉬어야 합니다. 어떻게 쉽니까? 하나님 안에서 쉬어야 합니다. 이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하던 일을 계속 하기 위해서, 계속 잘 하기 위해서 쉬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안에서 쉬는 자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다시 새 힘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바라는 자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 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D. ‘선을 행함’의 의미(마 25:34~36)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제까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 사도가 그 가르침의 결과로 적용을 하고 교훈을 주는 대목에서 선한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가 오직 믿음 sola fide 이라는 교리를 오해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여기서 선한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날?오늘 본문의 관점에서 보면 그날은 심판날이 아니라 추수날이 될 것입니다?에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라고 가르치셨습니까?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믿음은 반드시 삶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삶에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에 바울 사도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선행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선행입니다. 그 선행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라면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을 마시우고, 나그네에게 손대접을 하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돌보아 주고, 옥에 갇힌 자에게 온정을 베푸는 것’입니다.

E. 선을 행할 때의 원칙
바울 사도는 선을 행하는 일이 지치게 마련이고, 낙심하게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몇 가지 구체적인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i. ‘기회있는대로’: 씨뿌릴 시간이 얼마 없다.
첫째는 ‘기회있는대로’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요즘 표현대로, ‘짬이 나면’이란 말이 아닙니다. ‘시간이 될 때’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회가 있을 때’ 하라는 말입니다. 여기 기회라는 단어는 ‘카이로스’라는 헬라어로 시계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 인생을 오라고 부르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기회가 항상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씨뿌릴 시간이 내일도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물론 내 인생에 내일이 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살지만, 그렇게 믿고 침대에 누웠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 내일은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기회있는대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오늘 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한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성경은 ‘기회있는대로’라는 원칙을 주고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씨뿌릴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ii. ‘모든 이에게……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교회의 교회됨을 증명하라.
두번째로 주는 원칙은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종종 ‘모든 이에게’라는 말을 지나쳐 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교인들끼리만 착한 일을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명령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강조가 뒤에 있습니다. ‘믿음의 가정들’에게는 특별하게 더 잘 하라는 것입니다. 최고로 잘 하라는 말입니다. 집안 식구는 소홀하게 여기고 밖에 나가서 잘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집안 식구들에게 최고로 잘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배타성과 이기성을 드러내는 말씀일까요?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성도들이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의 가정들, 믿음의 식구들에게 최고로 잘 하고 더 잘 해야 하는 목적은 교회가 세상 앞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우리를 주목하여 보고 있는 세상 앞에서 교회됨을 증거하는 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새계명을 기억하시지요?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는 서로 특별하게 사랑함으로써만이 교회의 교회됨, 우리의 그리스도 제자됨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4. 추수날은 온다!!!
씨를 심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로다
씨를 뿌리는 것은 눈물을 흘리는 일이고 우는 일일지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기쁨으로 추수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씨를 뿌리면 때가 되면 거둘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을 행하다가 지치셨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만 두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보상이 이 세상에서 주어질 수도 있지만, 만일 이 세상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면 오는 세상에서 주어질 것입니다. 다가올 추수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선택은 씨를 뿌리는 것일 뿐입니다. 계속해서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의 교리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일단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히 구원받듯이, 일단 구원받은 성도는 계속해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어느날 추수가 있을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때가 이르매’ 거둘 것이라고 했습니다(9). 여기 때는 그 다음 절에 있는 ‘기회’와 같은 단어인 카이로스 즉, 하나님의 결정적인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곧 다시 오십니다. 그날이 추수의 날이요, 보상의 날입니다.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날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뿌려야 합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암 캐리는 인도에 가서 7년 동안 한 사람의 영혼도 추수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씨를 뿌렸습니다. 많은 낙심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끝까지 그는 씨를 뿌렸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도에서 7년이 되던 1800년이 되서야 첫 거듭난 영혼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것은 큰 추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감동적인 예가 있습니다. Luke Short는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걸쳐 106세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유명한 청교도 목사인 John Flavel의 복음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Short는 그의 나이 103세가 되던 해 회심을 했고 3년을 더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가 회심한 것은 무려 85년 전에 들은 설교를 기억함으로써였습니다! 그러므로 즉각적인 결과에 의해서 사역을 평가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다음 주일 10월 첫 주일이면 William Shin 목사님이 영어권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 목사님의 사역에 대해서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좋은 열매가 맺어지려면 시간이 걸리는 법입니다. 긴 시간이 걸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입니다. 빨리 열리는 나쁜 열매 보다는 오래 걸려도 피땀어린 좋은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즉각적으로 나타났다가 시들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늦게 열려도 확실하게 열리는 열매를 보기를 원하고 추수의 날에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두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 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너무나 고단한 인생을 살면서 어느 날 이런 시를 썼습니다.

누가 안식을 말했던가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것을
아버지의 일을 하는 나에게
땅위에 그 무슨 안식 있으리

이 땅에 나를 보내시고
이 땅에서 그 날을 기다리게 하시며
그 때까지 당신의 일을 맡겨주신 그분
그 분은 내게 은혜 또한 후히 주시리

일할 수 있는 은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은혜
그러나 안식의 은혜는 아직 아니리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사랑하는 여러분, 지쳤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조금 쉬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쉬면서 여러분의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 안에서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고 그분 만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제가 더욱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제가 성령을 위하여 심을 수 있도록 제게 더욱 은혜를 풍성하게 허락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선한 일을 열심을 내어 하십시오. 계속해서 하고 더욱 열심을 내십시오.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추수날에 버림을 당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위하여 심으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을 언제 오라고 하실지 모르기에 오늘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가정들에게 더욱 선한 일을 하십시오. 추수의 날에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없이 기쁨의 눈물로 추수하게 되는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