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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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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16) - 그리스도인의 표지

갈라디아서 6:11-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10-07

말씀내용
이제 우리는 갈라디아서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서신을 마치기 전에, 바울 사도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인하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 사도가 전했던 내용의 핵심은 거짓 복음에서 돌이켜 참된 복음, 즉 자신이 처음에 전해주었던 복음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할례나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불분명해진 시대는 지난 어느 시대보다도 더 이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를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여러분 자신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실 수 있었습니까? 무엇이 참 그리스도인의 표지인지를 발견하셨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은혜로 인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성령의 소욕이 여러분을 끌고 가는 것을 느끼십니까? 여러분의 안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싸우고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성령을 좇아 행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십니까? 성령의 열매가 여러분 안에서 맺어지고 있는 것을 경험하십니까? 여러분은 서로 짐을 나누어지는 삶이 있습니까? 육체를 위하여 심어 썩어질 것을 거두는 삶이 아니라 성령을 위하여 심고 사십니까? 이것들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의 표지에 속하는 문제들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대답을 하셔야 합니다.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비록 실패하고 넘어지는 일이 있어도 위의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들에 예라고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한 가지 더, 아니 지금까지 언급해온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지에 속하는 것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제시하면서 서신을 맺습니다. 그는 결론부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11절입니다.
갈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그랬듯이 바울 사도도 필사자를 통해서 자신이 구술하는 편지를 쓰는 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개 마지막에 자신의 서명을 넣음으로써 그 편지에 진정성을 입증하고는 했습니다. 간혹 마지막 결론부에 첨가하는 중요한 내용을 직접 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큰 글자로 썼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학자들은 여러 방식으로 설명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안질로 인하여 눈이 나빠서 크게 썼다든지, 혹은 그가 받은 육체적 고난이 너무 심해서 글을 그렇게 크게 쓸 수 밖에 없었다든지, 혹은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효과로 그렇게 했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바울 사도는 여기서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대목을 마지막에 직접 첨가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부각하고 있는 셈입니다. ‘큰 글자’라는 말에는 바울 사도의 마음과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표지, 즉,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아닌 것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1. 육체로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아니다.
13절입니다.
갈 6: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육체로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아닙니다. 이미 바울 사도는 육체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그 육체가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확인했습니다. 육체는 세상과 같은 의미로 오늘 본문에서 또한 사용되고 있습니다.

A. 육체: 인기, 지식, 영향력, 외모, 수입, 직업적 성취, 영적 기록들, 교인 숫자, 예배 스타일, 경건의 습관, 사회적 신분, 신학적 정통성, 회심자의 숫자……
즉, 인기, 지식, 영향력, 외모, 수입, 직업적 성취, 영적 기록들, 교인 숫자, 예배 스타일, 경건의 습관, 사회적 신분, 신학적 정통성, 회심자의 숫자……등을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육체에 속한 것들입니다. 육체는 우리의 죄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속기 쉬운 것은 육체를 자랑한다는 것이 세속적인 영역들에서만 그렇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가령, 세상적 권력을 자랑한다든지, 학벌이나 지식, 재력 등을 과시하려고 하는 세속적 영역들만이 육체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위험이 동일하게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 안에도 이런 성향들이 육체의 소욕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경건 생활의 기록, 자기 교회에 대한 자랑, 교인 숫자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 자기들의 독특한 예배 스타일을 자랑하는 것, 우리 교회가 신학적으로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려고 하는 태도, 전도하면서 회심자의 숫자를 세는 것 등이 다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바울 사도는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B. 문제는 ‘십자가 플러스 할례’ 그리고 성과지향주의와 과시의 문제(13)
바로 갈라디아에 왔던 유대주의자들이 했던 것이 바로 육체로 자랑하려는 태도였다고 바울 사도는 선언합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육체의 자랑은 종교적 영역과 종교적 성격을 띤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할례를 더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십자가를 부인한 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십자가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하는 것입니다. 할례입니다. 예수 믿고 할례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주장은 이미 행 15:1에 분명히 나옵니다.
행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여러분, 이런 유혹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더하기 행위, 의무, 성령의 은사, 성례….이런 것들을 더하는 태도입니다.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서 거기에 뭔가를 더하는 것, 이것을 바울 사도는 한 마디로 육체를 자랑하려는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성공지향적 태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입니다. 세상적 기준의 성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갈라디아에서 할례를 받게 된 사람들의 숫자를 세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들의 성공을 재는 척도였으며, 그들이 자기들을 보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 때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이 가질 수 있는 유혹이 개종자의 숫자를 세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지 개종자의 수를 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뭔가를 자기에 대하여 과시하려고 하는 것은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차이점 중 하나입니다. 거짓 신앙은 언제나 외면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참 신앙은 언제나 내면을 강조하고 내면에서부터 일어나는 변화를 참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드린 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주신 일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자신 안에 얼마나 이런 욕구가 많이 있습니까?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답답해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틈만 나면 설명하려고 하는 성향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 여러분이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C. 핍박을 피하려는 생각(12).
유대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동기는 두려움이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갈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그들은 핍박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 핍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찾아오는 핍박입니다. 초대교회가 받았던 핍박은 로마로부터 시작되기 전에 이미 유대인들로부터 왔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의 쟁점은 바로 할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핍박을 면하는 길은 십자가에 할례를 더하는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직 십자가만을 전하려 한다면 오히려 교회 안에서부터 어려움을 겪게 될지 모릅니다. 밖에서 오는 핍박 보다는 안에서 나오는 핍박이 먼저 오게 됩니다. 적당히 한다면, 그리고 십자가와 교양, 십자가와 보편성을 같이 가지고 가려 한다면 핍박과 어려움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만을 전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움을 야기하곤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미 쓴대로 자신이 할례를 전했다면 핍박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갈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여러분, 복음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대충 믿을 수 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매우 철저한(radical) 것입니다. 십자가와 무엇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지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입니다. 아니,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입니다. 14절입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먼저 우리가 ‘자랑한다’는 말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자랑한다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자랑한다’는 단어는 “신뢰하다, 기뻐하다, 열중하다, 마음껏 즐기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 자랑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쏠리게 하며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다 사로잡는 것입니다. 아마 가장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사로잡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사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보통 사람들이 자랑하고 싶어하는 외적인 조건들을 다 거절하였습니다. 그가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이 입에도 올리기를 꺼려하던 십자가 였습니다. 십자가는 자랑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십자가를 자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바울 사도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실만큼 사랑하셨다는 메시지이며 그 증거이기 때문에 그가 자랑할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위해 모든 값이 다 치루어졌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얻고 의로운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이 단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에 못박힌 삶을 사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14절의 메시지입니다.

A. 삼중의 십자가 죽음: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믿음을 살아내는 것(14)
이 구절에는 삼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삼중적인 십자가 죽임이 있습니다. 즉,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박힌 세상,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i.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를 믿을 때 우리는 그와 연합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 연합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죽음은 바로 우리의 죽음인 것입니다. 이미 바울 사도는 갈 2:20에서 이것을 언급하였습니다.

ii. 십자가에 못박힌 세상: ‘세상’은 불경건한 세상의 가치들, 현세의 소망없는 쾌락들, 구속받지 않아서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모든 것, 자기 욕구를 추구하는 자아의 마인드셋.
두번째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세상입니다. ‘세상’은 불경건한 세상의 가치들, 현세의 소망없는 쾌락들, 구속받지 않아서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모든 것, 자기 욕구를 추구하는 자아의 마인드셋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치명적 일격을 가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생각하고 세상이 말하고 세상이 일하는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 말은 5:24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세상의 존재는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존재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여러분을 달콤하게 유혹하는 세상적 가치는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살아있는가 하면 십자가에 못박힌 채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있다기 보다는 죽어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은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을 때까지 거기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iii.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인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 자신도 십자가에 못박힌 존재입니다.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해서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못박히다’라는 동사의 시제는 헬라어로 완료시제입니다. 완료시제가 의미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우리의 죄성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오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육체가 우리에게 대하여 그 영향력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을 육체를 자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모든 자랑을 내려놓게 되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그런 것을 경험하셨습니까?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이보다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B. 새로운 피조물(15): ‘Made by God’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갈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여기서 바울 사도는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것은 고후 5:17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과 정확하게 같은 표현입니다. 강조는 내적 변화를 통해서 죄인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시는 성령님의 역할에 있습니다. 새롭게 지어진다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안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새롭게 하셨는가가 중요하지,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내적인 변화를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내적 변화는 중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변화시키시는 역사의 시작일 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표현은 회심의 전체 과정을 다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성령님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은 회개와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하게 되고, 매일 매일의 성화의 과정?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살리는?이 있으며,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짐으로 그를 닮게 하고 거룩함 안에서 성장하게 하는 지속적인 과정이 내적 변화인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됨의 중요한 표지는 이 변화가 여러분 안에서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이십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셔서, 여러분 안에 내적 변화 즉 중생과 회개와 믿음 그리고 매일의 성화의 과정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까? 늘 언제나 그렇게 승리하고 살아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런 변화에 대해서 알고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이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도무지 여러분이 알지 못하신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참된 증거 즉 내적인 변화를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구하며 나아가셔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C. 예수의 흔적(18): “내가 교회의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보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겠다.”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바울 사도는 마지막으로 더 이상 할례의 문제와 같은 것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당부합니다. 자신은 이미 할례의 문제로 인하여 많은 핍박을 받았고, 아니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함으로 핍박을 받아서 자신의 몸에 생긴 흔적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은 핍박과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언제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것이 바로 그런 경험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대충 예수 믿고 사는 것으로 자신을 치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성경은 어디서도 대충 믿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영원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충 믿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의 흔적을 불가피하게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흔적’이란 단어는 본래 노예의 표시로 몸에 새겨넣는 문신도장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확실하게 예수님께 속한 자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흔적은 예수님을 위해서 받은 그의 고난이기도 하였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살다가 받은 핍박이요, 상처요, 손해요, 눌림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는 것의 표지입니다. 도마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소식을 들은 도마는 믿지 않으면서 말했습니다.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똑같이 말합니다. “내가 교회의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보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겠다.” 오늘 교회가, 아니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증거, 그리스도인의 표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상처,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세상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보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축복(16,18)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를 축복하면서 서신을 마칩니다. 그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을 받을 자들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이 규례를 행하는 자’입니다. 이 규례가 무엇입니까? 규례는 기준과 척도를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미 기준과 척도를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육체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냥 이스라엘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그는 유대인인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이방인이 대다수였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바로 참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들을 가리켜 ‘형제들’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 심령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여전히 육체를 자랑하는 것에 사로잡혀서 살아가시지 않습니까? 깨어진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사시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그 모든 수단을 거절할 때, 비로서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자랑거리를 신뢰하기를 그만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인간의 노력을 다 거절합니다.

결국 우리는 둘 중 하나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자기를 자랑하든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자랑하고 십자가도 자랑할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자랑한다면 결코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자랑하는 것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세상이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작 왓츠(Isaac Watts)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찬송가 147장입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못박힌 손발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받은 나 몸으로제물 삼겠네 아멘

인간의 자랑거리인 할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들,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든 형제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