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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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13) - 거룩한 습관: 죽임과 살림

갈라디아서 5:19-2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9-16

말씀내용
그리스도인은 갈등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그 갈등을 한 방향으로 이겨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영혼을 죽이고 살리는 전쟁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그리스도인이 육체의 소욕들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살림으로써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완전한 성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입니다. 혹시 여러분 안에 이런 갈등, 이런 전쟁이 느껴지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의심하셔야 할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계신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두 가지 성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입니다. 육체의 일의 목록을 죽 나열하고 이어서 성령의 열매를 소개합니다. 육체의 일은 육체의 소욕의 결과이고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소욕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은 한편으로는 죽이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살리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살리는 것입니다. 성도의 매일의 삶 속에서 이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1. 육체의 일들(19~21)
먼저 육체의 일들을 나열합니다. 이것은 육체의 ‘행위’들입니다. 선한 행위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물며 이 육체의 행위 즉, 악한 행위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육체의 일들의 목록을 존 스토트 목사님은 잘 분류를 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네 가지 범주, 성적, 종교적, 사회적 그리고 음주의 범주로 나누었습니다.

A. 성적 범주(음행?성적 부도덕, 더러운 것(생각), 호색?주색에 빠짐)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입니다. ‘음행’은 보통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떠난 모든 성적 관계를 일컫는 말인데, 혼전 관계 등을 포함하여 음행, 간음이라고 번역이 됩니다. 오늘날 이런 관계들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적지 않게 발생하고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적인 것들이 노골적으로 범람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온갖 음행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행위만이 아니라 생각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더러운 것’은 생각에 속한 모든 음란한 것들을 포함합니다. 지나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 들리는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더러운 것들을 상상하도록 자극합니다. 이것은 모든 성적인 농담들을 포함합니다. ‘호색’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자기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전혀 의식하지 못할 만큼 거침없이 죄에 빠져있는 상태라고 윌리암 바클리는 설명했습니다. 매우 적극적이고 무절제하게 치닫는 상태입니다.

B. 종교적 범주(우상 숭배와 술수)
종교적 범주에는 우상 숭배와 술수가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숭배하는 것이라면, 술수는 악한 것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idolatry)는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만족과 기쁨과 안식을 다른데서 구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술수’(witchcraft)는 점을 치거나 보는 것 등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단순히 종교적 범주라고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로 개종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우리 안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숭배한다고 말할 만큼 사랑하고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C. 인간 관계의 범주(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존 스토트는 이것을 사회적 범주로 나누었으나 말하자면 인간관계의 범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맺는 것’(hatred)이 그 대표적인 태도입니다. 미워하는 것입니다. ‘분쟁’(discord)은 모든 불화와 불일치를 의미합니다. ‘시기’(jealousy)는 구약 성경에서 좋은 뜻으로 하나님께 적용이 되었는데, 여기서는 삐뚤어진 열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모든 시기의 뿌리에는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마음이 놓여있습니다. 나와 남이 가진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이 하면 나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을 비방하거나 어렵게 할 수 있으며 자신도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분냄’(fits of rage)은 너무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는 분노가 너무나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여건만 되면 튀어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쏟아지며, 결국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분노를 낳게 만듭니다. 분노는 미련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분노를 설명했다고 합니다. 개가 문을 두드리면 친구인지 아닌지 알아보기도 전에 짖기부터 먼저하는 것 말입니다. 상황을 분간하기도 전에 분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윗자리에 처하게 될 때 더 쉽게 볼 수 있는 태도입니다. ‘당짓는 것’(selfish ambition)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리나 직분을 차지하려고 하는 태도이고 유세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가 분명히 정치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당짓는 행위들이 자행되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이것을 육체의 일이라고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분리함’(dissensions)은 바로 앞 16절에서 언급한 ‘서로 물고 먹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서로 헐뜯고 뒤에서 비방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단’(factions)은 여기서 교리적 이단을 가리키기 보다는 교회 안에서 합당하지 않게 너무나 많이 일어나는,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지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직분을 차지하려는 욕구나 시기와 질투로 인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투기’(envy)는 시기와 비슷한 것인데, 위의 시기가 단수로 쓰여진 반면 여기서 투기는 복수로 쓰인 것으로 보아 투기는 온갖 잡다한 시기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표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투기를 설명하기를 ‘친구의 성공에 의해서 고통받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친구의 성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내 생각에 나보다 못한 사람이 무언가를 잘 하면 이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때 조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D. 음주의 범주(술취함, 방탕함?주연, 비밀주신제)
육체의 일들의 목록 중 마지막 범주인 음주의 범주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무절제의 문제입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성경은 술을 완전히 금하지 않지만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분명한 어조로 ‘술취함’(drunkenness)에 대해서는 정죄를 합니다. 당대에 그와 같은 의인이 없었다고 했던 노아 마저도 술취함에 떨어졌다면 과연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을 잘 지킬 수 있을까요? 술취함과 ‘방탕함’(orgy)은 함께 갈 수 있는 짝입니다. 방탕함은 주신제에서 많은 사람이 술파티를 벌이고 광란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다시 예전의 그런 자리에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에게는 이런 문화적 판단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하지 말아야 하고 가지 말아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정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양심이 나를 판단함으로써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 육체의 일들의 결과(21b):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여러분, 이런 일들은 모두가 다 우리 안에 있는 성향들이요, 그 성향이 행위로 나올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여러분께서 ‘아,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죄다 어떤 악한 사람들의 이야기지, 나에게는 없어’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판단이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이런 죄있는 본성이 우리 안에 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그 본성?육체?은 여전히 그리스도인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조금의 타협도 없이 경고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여기서 이런 일을 ‘한다’고 하는 헬라어 동사는 이 행위가 일시적으로 행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습관적 행동을 가리키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여러분, 이런 일들을 아무 것도 아닌 양 계속해서 여러분의 삶 속에 허용하고 이기게 두신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한 큰 범죄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현저한 육체의 일들을 삶 속에서 늘 허용하고 살아가며 그것이 습관적인 행동이 되도록 내버려둘 때 그것은 심각하게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2. 성령의 열매(22~23)?이를 금지할 법이 없다(23b).
바울 사도는 육체의 일들에 이어 성령의 열매를 소개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육체의 일들을 소개할 때 모두 ‘아, 이런 것들이 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다’라고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A. 목록: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사랑’은 다른 모든 특징들이 나올 수 있는 근원이고 가장 근본적인 성령님의 성향입니다. 사랑은 위에 언급한 모든 인간관계의 범주에 속한 육체의 일들에 반대될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육체의 일들에 반대되는 특징입니다. 신자의 믿음은 사랑으로써 밖으로 표현된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을 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이 사랑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희락’(joy)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복음으로부터 참된 기쁨을 얻는 능력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묵상하는 일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일이, 그리고 복음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화평’(peace)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이 된 후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화평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만들어내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종종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거짓된 평화를 깨뜨리지만 말입니다.

‘오래 참음’(patience)은 힘든 상황과 힘든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게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를 뿐 아니라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오래 참음으로 기다려주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 죄인의 회개치 않음을 기다려주신 것과 같습니다.

‘자비’(kindness)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돌보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주려는 마음입니다. 섬기는 마음입니다.

‘양선’(goodness)’은 베풀기를 기뻐하는 태도요, 성품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것은 관대하고 후합니다. 인색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색하게 행하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쌍한 자들이겠습니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열매이기에 이것은 우리의 개성과 인격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충성’(faithfulness)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부터 나오는 태도이자 성품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가득한 상태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자신감을 표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책임지실 것을 알기에 그는 사적인 이익 앞에서 꾀를 낼 필요가 없고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gentleness)는 진정한 겸손이고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오늘날 너무나 약함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단어가 되어 버렸는데,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는 절제된 힘을 말합니다. 무절제한 힘인 폭력과는 다른 절제된 힘입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되는 힘입니다. 온유는 또한 ‘다가갈 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겸손하기에 사람들이 다가가도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게 하는 성질입니다. 바로 성자 하나님이 그것을 나타내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절제’(self-control)는 모든 관능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참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방종으로 가지 않도록 만드는 힘입니다. 절제는 잘못된 열정에 이끌려 유혹에 항복하지 않게 하는 저항력입니다. 이 역시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 가진 천부적 본성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B. 열매들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열매이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특별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앞에서 육체의 일들이라고 복수형태를 사용했다면 여기 성령의 열매는 단수형태를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아래 목록이 가령, 복숭아, 포도, 사과, 멜론, 맹고 하는 식으로 여러 열매들이 아니라 한 열매의 여러 특성들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포도 한 송이에 달린 포도알들 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각각의 특별한 특징들을 형성한다기 보다는 성령이 내주하는 그리스도인이 드러내는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 열매가 하나인데, 그 열매의 크기나 단 맛 정도는 그리스도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C. 행위가 아니고 열매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앞에서 육체의 일들(행위들)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성령의 일들이라고 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목록들은 성령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맺어지게 되는 열매들, 결과들이다라는 강조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이 그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에게서는 불가피하게 이런 열매들이 맺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행위로 나타나는 것들이지만 그보다 먼저 내면의 태도들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죄가 자연스러운 것이듯이, 영적으로 살아난 사람에게 거룩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 가지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 있는 성령의 열매의 목록들은 결코 우리 사람 가운데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일어날 수 있는 그런 타고난 자연적 성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초자연적인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열매입니다.

D.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은사들이 아니다.
여기 언급된 성령의 열매는 결코 성령의 은사들과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다양한 것으로 신자는 몇 가지의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서 그것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각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여기 성령의 열매는 각 사람에게 다양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의 열매이기 때문에, 성령이 내주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안에서부터 이 모든 한 열매의 성향들이 맺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변화입니다. 이것은 하루 밤 사이에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주어질 수도 있지만, 성령의 열매는 성도의 평생에 걸쳐서 점점 더 커지고 익어가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는 말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은사와는 다른 것입니다.

3. 영적 성장과 성화: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의 협력 없이 열매를 맺지 않으신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의 협력 없이 열매를 맺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기서 우리의 협력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삶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로 요약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설교 제목인 죽임과 살림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육체의 일들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시킴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과 나아가서 오늘 우리들에게 권면하려고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바로 본문의 24절과 25절에서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A. 죽임(mortification): 매일 십자가에 못박아라(24).
24절은 죽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리스도인 안에서 영적 전쟁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죽이고 살리는 전쟁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육체를 죽이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냥 아무런 죽임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죽임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죄받은 죄인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처형장소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대로 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바로 그 자리로 가서 자기의 육체?죄있는 본성?와 정과 욕심?즉 이것들은 육체의 소욕에 속한 것들?을 다 함께 십자가 위에 올려 못을 박아 죽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의 육체와 정과 욕심이 다 그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이라면 우리의 이 싸움도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죄를 죽이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단번에 죽는 죽음이라기 보다는 점진적으로 생명이 소진하여 죽는 죽음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의 육체를 못박아 죽이는 것 역시 한번에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평생 매달려서 죽어가는 것이기에 우리의 성화 과정은 결코 단번에, 혹은 하룻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길고 천천히 진행되는 과정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처형은 최종적인 것입니다. 그 과정이 길어도 결국에는 죽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의 육체는 치명적인 일격을 맞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의 육체는 거기에 못박혀 달렸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우리 자신의 육체의 죽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갈 2:20에서 말한 ‘십자가에 못박힘’과 5:24에서 말하는 ‘십자가에 못박았다’의 차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2:20에서는 수동태입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능동태, 즉 내가 내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그리스인인 내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주체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게 될 때,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신 곳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연합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육체를 못박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육체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일들의 범주 중에서 가장 많은 목록을 가진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목록이었습니다.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해서라기 보다는 그만큼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가장 많이 걸려넘어지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가지 한 가지를 보면서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안에서 이런 요소가 일어나려고 할 때 이렇게 말하십시오. ‘이것은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육체의 소욕이다. 너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힌 놈이다. 내가 너를 다시 그 십자가에 못박노라. 너는 다시는 그 십자가에서 기어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일을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힘차게 못을 깊이 박으십시오.

B. 살림(vivification): 성령과 보조를 맞추어 살라(25).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동시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되고 살아납니다. 육체를 죽이는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갈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여기서 ‘행한다’는 말은 군사적 용어입니다. 행진을 할 때나 혹은 서있을 때 군인들이 정렬을 하고 행하거나 서있거나 해야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줄과 열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님과 줄을 맞추어서 행하거나 서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과(16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18절)입니다.

참된 영적 성장은 우리의 특별한 성령체험이나 은사체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거룩한 습관이 될 때까지 매일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데서 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오래 교회를 다니셔도 여러분 개인의 삶에서 이런 영적 훈련을 가지지 않는다면 결코 영적 성장은 일어나지 않고 10년, 20년, 심지어 50년을 교회를 다니셔도 아무런 영적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런 상태에서도 여러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성도라는 확신을 과연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성령님과 동행하는 매일의 삶이 없이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경건한 사람이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수단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데, 성경의 진리, 기도, 교제, 예배와 같은 객관적인 수단들과 더불어 생각하고 듣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생각을 나누는 것과 같은 주관적인 은혜의 도구들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 삶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습관적인 기질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패커는 지적했습니다. 거룩한 습관은 잘 길들여져야만 하는 그리스도인의 기질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자제하고 올바른 행동을 계속할 때 나타납니다. 습관을 형성하게 하시는 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성령과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삶 속에 그 거룩한 습관을 만들어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C. 성화의 삶의 위험: 영적 교만이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26).
바울 사도는 마지막으로 성화의 삶에 놓여있는 위험 요소 한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헛된 영광이란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종교적이고 위선적인 영광을 말합니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칭호를 얻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시 거기에도 서로 격동하고 투기함이, 그리고 모든 싸움이 날 것입니다. 영적 교만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영적 삶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 요소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육체를 날마다 십자가에 가지고 가서 다시 한 번 못박아 죽이는 일을 얼마나 잘 하고 사셨습니까? 과연 이런 삶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성령의 열매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거룩한 습관으로 자리를 잡도록 어떻게 성령님을 따라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어 살아오셨습니까? 거룩한 습관을 만드십시오. 날마다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어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살아온 오랜 세월 동안 보이지 않던 성령의 열매가 여러분의 삶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