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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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고린도후서 강해 (8) - 소명-하나님을 드러내는 삶

고린도후서 12:14-1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0-14

말씀내용
<소명?하나님이 드러나는 삶(1)> 고후 12:14~19

1. 성부: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태도(12:14~19)
이제 고린도후서라는 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자신의 마지막 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사도는 놀랍게도 자신의 마음과 태도 전반을 통하여 성삼위 하나님의 모습을 온전하게 드러냅니다. 우리는 한 인간이었던 바울을 보면서 그의 삶 속에 부인할 수 없도록 깊이 각인되고 심겨져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성삼위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참 경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제일 먼저 사도의 마음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사도는 여러 곳에서 이미 자신이 고린도 사람들의 아비와 같은 마음과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 바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 사람들을 아비의 심정으로 대해왔음을 다시 한 번 밝혀줍니다.

2. 바울 사도가 구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그들 자신(12:14; 고전 3:1)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지 않음으로써 거짓 사도들에게 빌미를 제공하였고 고린도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시험을 받아 바울 사도를 향하여 의심을 품고 심지어 일부는 그를 대적하게 까지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13절부터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어린아이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미 고린도전서 3:1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신령한 자들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부모가 어린 아이에게는 도움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식들에게 전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마음이었습니다. 마게도냐와 같은 교회들로부터 사도는 사례를 받았고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로부터는 아무런 사례도 요구하지 않았고 받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렸기 때문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헌금이나 돈의 문제로 시험에 듭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믿음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일괄적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하거나 요구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헌금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만큼 그리고 성경의 원리에 입각해서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종 교회가 재정을 채우기 위해서 무리하게 요구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 가난하셔서 돈이 필요하신데 교인들이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식의 인상을 주면서 접근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일 뿐 아니라, 돈을 모금하는 것은 성공할지 몰라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또 한 예로, 교인들에게 이런 저런 심리적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헌금을 하게 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헌금을 할 때에는 무조건 처음 드는 생각이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고, 그 다음에는 사람의 생각, 그 다음이 마귀가 주는 생각이라고 말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매우 잘못된 것이지요.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는 그런 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번째 드는 생각으로 헌금을 드렸는데 나중에 집에 가서 생각해보니까 아깝더라 하면 이것은 그가 마귀의 생각을 저버리고 성령님의 생각대로 순종한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충동적으로 헌금을 드린 것이 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충동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하고 믿음은 우리의 생각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 사람들이 아직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이므로 그들로부터 아무런 사례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사도가 그들에게서 사례를 받았다면 이것은 그들의 믿음에 더 큰 문제를 가져오는 시험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녀 앞에 넘어질 시험거리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 사도의 마음이었습니다.

3. 영혼을 위하여 재물과 자신을 허비하는 기쁨(12:15; 렘 32:40~41)
15절에 이어지는 사도의 진술은 놀랍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거짓 사도들과 달리, 바울 사도는 언제나 고린도 사람들의 돈주머니가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생각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토록 고생하고 환난을 당하면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토록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도 편지를 쓰고 또 방문하면서 그들을 향한 수고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영혼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들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나 자신을 허비한다고 말합니다. 왜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비하는 것입니다. 허비한다는 단어는 말 그대로 좀 사치스럽게 낭비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합니다. 바닥이 나도록 다 써버렸다는 말입니다. 소진하도록 자신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사도가 빌립보서와 디모데후서에서 자신의 삶을 ‘전제와 같이 부어진 삶’이라고 말한 것이 그것입니다(빌 2:17; 딤후 4:6). 전제는 포도주를 하나님의 제단에 붓는 제사의식이었습니다. 포도주는 피를 상징하고, 그 피는 물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남김없이 흘리신 보혈을 가리킵니다. 사도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피흘리듯 남김없이 순교의 제물로 드릴 것을 내다보고 한 말입니다. 죽음 만이 아니라 삶 전체가 다 쏟아부어진 삶이었습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가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재물을 허비하고 자기 자신을 허비하는 것이 크게 기쁘다고 말하는 것을 주목해보십시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아닙니다. 타락하여 죄성을 지닌 인간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반역하는 인간들, 그 은혜에 응답할 줄 모르는 인간들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주기 위해 그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렘 32:40~41). 나를 경외함을 그들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주체할 수 없을만큼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라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지르지 않을 수 없도록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견디지 못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주는 것은 참으로 나의 기쁨이다.” 나는 선을 베풀어주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사도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 가슴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성하고 줄 것이 많고(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로와 질 수 있을까요? 그렇게 늙어갈수 있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의 자녀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너희는 나를 덜 사랑하겠는냐?” 이 말에는 인간적인 비애가 녹아있습니다. 사도는 자녀들을 너무도 사랑해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오히려 그들을 압박했고 그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울 사도를 배척했고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에게는 순종했습니다. 아이러니지요. 인간의 죄성이 이런 것입니다. 잘 대해주면 은혜를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더 쉽게 생각하고 이용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도 이런 말씀들을 하십니다. 아이들이 커도 꼬박꼬박 용돈을 가져오라고 하면 아이들이 부모에게 잘 하는데, 그냥 무조건 잘 해주면 부모를 절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는 ‘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이런 것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렇게 했을까요? 고린도 교인들이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인 사도의 교육이 잘못 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오히려 사도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이해했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지켜나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주는 분이십니다. 언제까지요. 알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아무런 금전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거짓 사도들조차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말하기를, 이것도 사실은 자기의 이미지를 위해서 고도로 계산된 행동일 것이라고 비난하였을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보냈던 자 디도나 또는 그와 함께 간 형제가 나와 달리 혹 나를 대신하여 너희로부터 취한 것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들은 다 바울 사도와 똑같은 보조를 취했습니다. 이렇게 거짓 교사들의 주장이 설 자리가 없게 함으로써 사도는 돈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변론을 마칩니다.

4.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너희들을 세워주기 위함이다”(12:19; 13:10).
사도는 여기서(19절) 이제 독자들인 고린도 교인들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 변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현대의 독자들인 우리도 처음부터 여기 마지막 부분까지 오면서 바울 사도가 이 서신서를 통해서 하고 있는 것은 자기 변명이다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내가 나의 사도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변호를 하는 것은 나를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명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없다는 자세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다시 한 번 이 모든 것은 바로 너희 영혼을 위해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도됨을 부인하는 고린도 사람들, 그리고 거짓 사도를 참 사도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이들은 결국 바울의 메시지를 거부하였고 이것은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집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사도권 변호는 사실상 고린도 교인들의 영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여기 ‘세운다’는 표현은 건축을 할 때 집을 짓는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것을 보통 성경에서 ‘덕을 세운다’고 번역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건축자와 같이 그들의 영혼을 잘 세워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한 가지를 더 설명하자면, ‘변명’이란 단어입니다. 이것은 본래 법정 용어입니다. 변호사가 혹 피고가 자신을 판사 앞에서 혹은 배심원 앞에서 변론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조금도 그리고 한 번도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의 재판관이 되거나 배심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재판관은 오직 하늘에 계신 분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그 앞에서는 모든 숨겨진 것들이 벌거벗은 것과 같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재판관이나 배심원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변호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거기에 우리의 인생의 힘을 많이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우리 죄인들의 삶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과 같이 오해를 많이 만들면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재판관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오해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알았기에 시편 기자는 자신의 모든 원통한 것을 가지고 사람 앞에 나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재판관이나 배심원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을 자녀와 같이 여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토록 끈질기게 자신의 사도됨을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5. 소명?하나님의 선하심을 반영하라는 소명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사도의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지신 마음이 그런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은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거기에는 긍휼이 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할 형벌을 유예하시고 퍼붓지 않으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로우십니다.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인 우리에게 과분하고도 넘치는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거부당하시고, 멸시를 받으시며, 조롱과 비웃음과 배신을 당하시지만 그것을 끝까지 당하십니다. 아니 견디십니다. 오래 참으심과 긍휼과 은혜를 거두지 않으시고 견디십니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 사람들은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자신의 성품을 통해서 드러내고 반영합니다. 서서히 그렇게 되어갑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고 맛보고 알아가고 느낄수록 은혜로운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의 시간이 그런 시간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구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당하고 거절받고 비난과 조롱을 받으나 여전히 그들을 향하여 오래 참고 긍휼과 은혜를 품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열심을 낼 수 있는 자리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된 자들의 소명입니다. 소명!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허락하신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 소명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함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찾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같은 보잘 것 없는 질그릇 같은 인생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로 우리를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고 반영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