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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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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고린도후서 강해 (7) - 복음의 역설

고린도후서 12:1-13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0-07

말씀내용
본문은 고린도후서의 절정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중심 메시지가 이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놀라운 역설입니다. 우리가 이 비밀을 제대로 깨닫기까지는 결코 복음을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11:1에서 시작한 바보 연설은 오늘 본문인 12:13에서 끝납니다. 사도는 어리석은 자랑을 계속하는데 그가 이제 자랑하는 것은 자신의 지극히 큰 계시 체험입니다.

1. 바울 사도가 환상과 계시 체험을 자랑하다(1~6).
바울 사도는 머뭇 머뭇하면서 굉장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환상과 계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A. 체험을 자랑하기를 주저함: 삼인칭 사용…
많은 성경 독자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표현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마치 자신이 아닌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삼인칭을 사용하여,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안다’고 말합니다(2절). 이제 ‘그’의 체험을 말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가 바울 사도 자신임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고 또 거의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왜 3인칭을 써서 표현을 했을까요? 이것은 바울 사도가 지금 이 체험에 대한 자랑(?)을 주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1절에서도 ‘부득불’ 자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결코 유익을 주는 것이 없을텐데 해야만 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이 주로 자랑했던 것이 입신이나 무아경 같은 신앙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자랑으로 자신들을 드러냈고 사도됨을 확증하고 싶어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그런 그들에 대하여 자신의 사도됨을 변증하는 과정에서 이 일을 굳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가 자기 사도됨의 증거로서 이런 체험을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체험은 14년 전의 일이이라고 하므로, 아마 그가 고향인 다소에 있거나 아니면 전도여행을 시작하기 전 안디옥에 있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전에는 한 번도 이 체험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하는데, 이것은 당시 히브리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우주관을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하늘을 삼층 구조로 이해하여 첫째 하늘은 대기권이고, 둘째 하늘은 별들의 장소 그리고 세째이자 마지막 하늘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도는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이곳은 ‘낙원’이라고 4절에서 표현되었습니다. 또 그는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2,3). 말하자면, 에녹이나 엘리야가 하늘로 올려간 것 처럼 육체를 가지고 올라간 것인지 아니면 영혼만 올려간 것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체험이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체험을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유일한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쓰라고 했기에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지만, 바울 사도의 경우 이 엄청난 체험을 표현할 수도 없고 또 말하도록 허락받지 않은 것들을 들은 것입니다(4). 이런 체험을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주신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였지 그로 하여금 자랑함으로써 자신의 경건을 증명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도 여행을 하면서 겪는 수많은 환난과 핍박을 내다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도록 그런 체험을 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체험을 그저 개인적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B. 체험은 판단의 기준인 가르침과 행위(삶)를 대신할 수 없다(6절).
바울 사도는 거짓 사도들이 하는 것처럼 자랑을 하고자 했으면 이 체험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사도됨을 증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게 주려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사도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르지 않은 틀을 사용하게 된다면 고린도 교회는 언제라도 다시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즉, 그가 참 사도냐 거짓 사도냐 하는 것, 혹 그가 참된 영적 지도자냐, 거짓 영적 지도자냐 하는 것을 분별하는 기준으로 ‘체험’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6절에서 말합니다.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즉, 너희가 나를 보는 것과 나로부터 듣는 것으로 나를 판단하여야지, 나의 체험으로 나를 판단하는 것은 바른 잣대가 아니고 바른 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체험이 진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진위를 결정하는 기준은 바울 사도가 11장 전체를 통하여 강조하였던 바, 가르침과 삶입니다. 오늘날에도 자기가 가진 체험을 통해서 자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종종 있고 또 무분별한 사람들은 그 체험으로 지도자들의 경건을 판단합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심각한 무지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인 것입니다. 체험(담)은 가르침과 삶(행위)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2. 바울 사도가 육체의 가시를 자랑하다(7)
사도가 이런 엄청난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실 그것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체험담을 통해서 거짓 사도들을 단번에 쓰러뜨리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그렇게 할 의도였다면 바울 사도 자신이 위에 언급한 원칙과 잣대를 파괴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는 이미 복음의 역설이 아닌 세상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일테니 말입니다. 그는 자기가 경험한 계시가 엄청났던 만큼이나 그와는 너무나도 대조가 되는 한 가지?자기의 육신의 가시를 충격적으로 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계시 체험을 말하는 1~6절에서는 3인칭을 씀으로써 자신을 조금이라도 숨기려고 했던 바울 사도는 이제 육체의 가시를 말하는 7절부터는 1인칭으로 화법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자랑합니다.

A. 지극히 큰 계시에 따라왔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육체의 가시는 지극히 큰 계시와 함께 왔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육체의 가시는 그 계시 때문에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계시의 체험이 육체의 가시의 원인이고, 육체의 가시는 계시 체험의 결과인 셈입니다. 말하자면 그 ‘계시와 가시’는 하나의 패키지로 주어진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바울 사도에게 주어진 것은 그 엄청난 계시 체험으로 인하여 바울 사도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란 말입니다.

B. 사탄의 사자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셨다.
또 이 육체의 가시를 설명하면서 바울 사도는 사탄의 사자(messenger)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가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사탄이 바울 사도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낙심케 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보낸 가시지만, 그것을 바울에게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 사도에게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당장 내 삶에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고 나쁜 것은 사탄이 주는 것이다라는 인식처럼 나이브한 것이 없습니다. 욥이 이해하였던 것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라는 것이 성경적 신앙의 내용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아래서 열심히 욥을 넘어뜨리려고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내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 좋은 일만이 아니라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은 신자의 큰 위로입니다. 일부는 하나님의 손에, 일부는 마귀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안에 떨면서 살겠습니까? 성경은 그런 사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C. 육체의 가시의 정체: ‘바울을 낮추고 교만할 수 없게 만드는 힘’
그러면 바울 사도가 말하는 육체의 가시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분명치 않습니다. 학자마다 다양한 의견들을 개진하였습니다. 혹자는 고린도교회의 대적들이 바로 육체의 가시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육체의 가시를 사탄의 사자, 메신저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11:15에서 그 대적들을 ‘사탄의 일군’이라고 표현한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입니다. 또 혹자는 더 넓게 해석해서 바울 사도를 계속 쫓아다니며 핍박했던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킨다고도 봅니다. 또 다른 이들은 그의 ‘육체의’라는 표현에 주목하여 그가 가지고 있던 육체적 연약함이나 질병의 차원에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고생했다고 알려진 ‘안질’이거나 혹은 ‘간질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식으로 추측을 합니다. 바울 사도 자신이 여기서 은유적으로 표현을 했기에 우리가 그것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언급하는 육체의 가시는 ‘바울 자신을 낮추고 교만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결코 교만해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지극히 큰 계시를 체험한 사도에게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습니다. 이 점에서 바울 사도에게 육체의 가시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지 않는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엄청난 계시의 체험이 주어진 것이 사실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논지는 건강과 부의 복음을 전하고 질병과 가난은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증거라고 가르치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뒤집는 말인 것입니다.

3. 바울 사도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8~9절)
A. 바울 사도는 육체의 가시를 즐거워하지 않았다!(8절)
바울 사도는 결코 육체의 가시를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이 떠나기를’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메조키스트(masochist)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는 ‘인내’의 미덕을 통하여 수양을 쌓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고난 자체를 절대로 미화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난을 주세요. 나는 그것이 좋습니다’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없애달라고 구했습니다. 바울의 이 기도는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세 번을 기도하셨고 그 원하시는 바가 응낙하심을 얻지 못한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 잔을 피하시기를 일차적으로 원하셨다는 점에서만 그렇습니다.

B. 하나님의 거절에 대한 설명: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이다.’(9절)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의 이 기도에 대하여 ‘no’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그냥 들어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설명의 형태로 주어졌습니다. 9절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의 간구에 대하여 주신 이 응답의 말씀이 바로 고린도후서 전체의 절정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약했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 때문에 괴로움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삶에는 환난이 그치지를 않았습니다(1:6~9; 4:8~11; 7:5; 11:30; 12:5). 그는 성품적으로도 약한 사람이어서 비난을 많이 받아야 했습니다(10:1,10; 11:6). 육체적 시련도 많았습니다(4:7,16; 5:1; 11:24~27; 6:4~5, 8~10). 몸은 맞아서 약해졌고 명성은 갈가리 찢겼으며 메시지는 거부되었습니다. 그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끼여있는 포로로 자신을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 건강을 얻고 행복한 가정을 누리고 물질적인 부요함을 가질 수 있다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이 실감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오히려 복음의 역설은 그 반대편에 있습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말미암아 건강을 잃었는데, 남들이 말하는 행복한 가정도 이루지 못했는데, 물질과 소유의 면에서도 가진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고난을 당하는 자는 겸손한 자다라거나 반대로 겸손한 자는 다 고난을 당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할만큼 인생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되지 않는 상태 또 ‘내 삶에서 이것만 없으면 되겠는데’ 라고 생각하는 그런 상태에 있을 그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서 우리는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있어서’가 아니라 ‘없어도’ 그리고 ‘없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깊이 뼈저리게 경험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이 말씀은 정말 무의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지극히 큰 계시 체험이 아니라 그 계시 체험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육체의 가시입니다. 그것이 나를 떠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족하고 족하고 족하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능력이 내가 약한데서 비로서 온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약함은 더 이상 핸디캡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고 그 능력을 온전하게 드러내시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4. 바울 사도가 약함을 자랑하다(9b~10).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근심하지 않고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말입니다(9b절).

A. 약함을 기뻐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10절).
바울 사도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여전히 그를 괴롭히지만, 그는 기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합니다. 여기 있는 약함의 목록들은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에 걸리는 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드러나고 나타나도록 사용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에게서 더 이상 계시 체험을 꺼낼 때처럼 주저주저하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는 어떤 주저함이나 망설임없이 자기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B.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하여(9b절)
그가 그렇게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자기의 약함을 제대로 인식했기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한 존재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 언제나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자기의 능력을 믿거나 그것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약했기에 늘 그리스도의 능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여기 사용된 단어, ‘머물게’란 말은 하나님께서 장막(성막)을 치고 거기 거하신다는 의미를 전달해주는 용어입니다(요 1:14; 계 7:15; 21:3). ‘그리스도의 능력이 언제나 내게 머물게’라는 말은 자기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가지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의 약함 속에서 온전하게 드러나게 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C. 내가 약함이 곧 강함이기 때문에(10절).
바울 사도가 자기의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이유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경험하셨습니까? 깨달으셨습니까?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깨닫고 경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복음을 제대로 깨달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알려진 유명한 목사나 전도자나 선교사와 함께 하시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명의 그리고 고난받는, 가난하고 병약한 하지만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에게 오셔서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함께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니라!

5. 약함이 곧 사도됨의 증거이다(11~13)
바울 사도는 자신이 소위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고 11~13절에서 말하면서 ‘바보연설’을 마칩니다. 자신이 거짓사도들인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은 것은 그가 경험한 지극히 큰 계시 체험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나게 만드는 그의 약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기가 그들이 주장하는 강함의 관점에서 그들과 비교하고 키재기를 하지 않습니다. 사도는 여전히 약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 약함이야말로 그가 그리스도의 참 사도임을 증명하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바울 사도가 제시하는 원칙과 기준 대신 세상이 주는 원칙과 기준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유명하거나 성공한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유형이라면 여러분은 절대로 바울 사도를 좇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가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도 좇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목사 청빙 광고(그것은 사실 청빙이 아니라 고빙입니다)에 제시하는 조건들을 보면 바울도 예수님도 다 작은 교회의 목사 선발에서도 떨어졌을 것이 자명합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가 성경적 분별력을 상실하고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그 말씀을 여러분의 현재의 상태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강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 자신의 잘남과 못남 때문에 자랑스럽고 한탄스럽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여러분의 잘남을 채워주고 못남을 개선시켜주는 것입니까? 여러분을 낮추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인 것을 아십니까?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위축된다면 여러분은 사탄의 놀음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약함 때문에 여러분은 자만하지 못하고, 그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냅니까? 복음,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로 그런 자리에 서도록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인생을 뒤집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야, 안목, 시각을 뒤집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위축되지도, 자기 연민의 희생물이 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약함이, 제발 없어졌으면 하던 그 약함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기에 기뻐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멸시도 천대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한 인격 안에 가져오는 엄청난 힘입니다.
노력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우리가 의존하고 살아가는 것이 된다면 그것은 우상이고, 그것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떼어놓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고난, 우리의 부적당함, 우리의 무능함, 우리의 실패, 우리의 두려움 말입니다. 이 약함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전시관이 되는데 장애가 아니라 조건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1등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 1등이냐 꼴등이냐를 넘어 내가 무엇을 의지하여 살며, 무엇을 자랑하고 싶어하는가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가, 세상의 사람이 되는가를 가늠하는 분깃점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13:4)”

여러분의 인생관과 가치관과 기준은 십자가에 달리신 약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냅니까, 아니면 세상의 성공과 강함과 잘남을 대변합니까?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숫자의 자손을 가진 족장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불임의 사라와 그 남편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강성한 이집트 민족을 부르시지 않고 노예들인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잘 알려진 학식있는 자들을 부르시지 않고 무명의 무학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선교사로 이방인을 부르시지 않고 극단적 민족주의자인 유대인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지는 조건이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머물게 하는 발판이며, 약할 그때에 하나님의 강함을 알게 하는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주셔서 여러분과 저와 그리고 우리 교회 가운데 이 복음의 역설, 약한 것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은혜를 알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에게 족합니다. 과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