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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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고린도후서 강해 (6) - 복음과 자랑의 문제

고린도후서 10:12-1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09-23

말씀내용
1. 문맥: 10~13장은 사도를 대적하는 자들을 향한 사도의 마지막 권면과 도전
바울 사도가 이 마지막 부분에서 주로 의식하고 있는 대상은 아직도 바울 사도 자신에 대하여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의 어조도 좀 강하고 담대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도가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한 복수나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든지 아직 회개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 영혼이라도 더 얻으려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는 이 편지를 쓰고 나서 곧 고린도교회를 방문할텐데, 그 때 이 문제들을 매듭짓고 여전히 회개치 않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정죄가 이루어질 것을 알기에(고후 10:6; 13:1~2), 그전에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2. 사도에 대한 비난(1~2, 9~11): “그는 앞에서는 말못하고 뒤에서 편지로 으름장을 놓는 사람이다.”
여기 또 하나의 사도에 대한 비난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울은 앞에서는 말을 못하고 뒤에서 편지로는 으름장을 놓는 사람이다”라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는 고린도를 두번째 방문했을 때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면전에서 하는 비난과 인신공격을 당하고는 쓰디쓴 마음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눈물로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는 사도가 써 보낸 후에 너무 심하게 썼다고 후회할만큼 강한 어조로 쓴 것이었습니다(2:4; 7:8). 그러니 대적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사도는 앞에서는 그냥 물러서더니 뒤에 가서 편지로는 강하게 돌변하는 이중적인 사람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최후의 권면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운을 뗍니다.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10:1).” 이 말은 그들의 비난을 의식하고서 쓴 말입니다. 사실 그들의 비난을 사도가 뒤에서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은 10절입니다. “저희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어쩌면 이것은 바울 사도의 외모가 가진 약점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지난 번에 언급한대로 <바울과 테클라 행전>에 묘사된 사도의 외모는 사람을 끄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처럼 세상적 관점에 경사된 사람들은 바울 자신을 그다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편지는 외모와는 달랐습니다. 그의 문체는 힘이 있었고 사도로서의 권위를 충분히 전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0절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비난이었을 것입니다.

‘말이 시원치 않다’는 비난은 설교를 지칭하는 것일텐데, ‘언변이 좋은’ 자라고 소개되는 아볼로에 비교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행 18:24). 고린도교회의 대적하는 자들은 그들이 본 바울 사도의 외모와 연약함의 관점에서 그의 편지와 모든 것을 판단하고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편지도 사실은 으름장에 불과한 것이지 나중에 바울이 오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식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 사도가 1절에서 쓰는 말을 읽어야 합니다. 그는 그들의 비난을 긍정합니다. 하지만 그 비난은 오히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그들을 대하였다는 증거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에 대한 오해와 인신공격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2절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을 향하여 ‘육체대로 행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제 고린도를 방문하여 만나게 될 때, 그들의 비난대로 ‘담대히’ 대하지 않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쩌면 바울 사도는 “너희가 나를 ‘세상 사람들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한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래, 내가 무엇이 세상 방식대로 하는 것인지, 무엇이 육체대로 하는 것인지 본때를 보여주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래, 너희 말대로 나는 다시 너희를 방문할 때에도 내가 너희를 대하여 ‘담대히’ 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이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담대히 대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을 심판하겠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모두가 배워야만 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기준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배워서 행하려고 한다면 바울 사도와 같은 오해를 많이 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래, 그럼 나도 세상의 방식으로 대하지, 뭐!’하는 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렇게 자신의 태도를 그들과 같은 방식?육체의 방식?으로 바꾸어 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 에서 누가 여러분에게 행한대로 갚아주는 것이,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를 따라서 행하는 원칙에 우선하지 않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많이 겪으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행하려고 함으로 인하여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마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그러면서도 바울 사도는 사도로서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나 바울은’이라고 말합니다(1절). 헬라어에서 이처럼 ‘나’라는 주어를 명기하는 것은 강조하는 용법입니다. 동사의 변화형태 속에 주어가 들어있기 때문에 이렇게 할 필요가 없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사도가 사도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강조하여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이 편지를 읽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표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3. 바울 사도의 선전 포고(3~6): 우리의 무기는,
바울 사도는 이제 ‘싸움’을 시작하노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있는 변화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까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해 왔습니다. 그의 논지와 어조는 다분히 방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이상 방어적이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공세를 취하기 시작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대적자들이 말하는대로 바울 사도는 ‘육체에 있어 행하는 자’이긴 하지만 ‘육체대로’ 싸우는 자는 결코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천사가 아닙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방식?육체?을 따라서 살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입니까? 그는 이제 고린도 사람들을 향하여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향하여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적 사고를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영적 전쟁입니다. 여기 ‘싸운다’는 표현(3절)은 실제로 군인들이 전쟁을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바울 사도가 치루는 전쟁의 무기는 영적 무기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그 무기로 어떻게 무엇을 향하여 싸울 것인지 밝혀줍니다.

A.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괴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바울 사도의 병기는 ‘견고한 진을 파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 사도가 파괴하려고 하는 원수의 진영은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는 자들의 자기자랑에 의해서 세워진 자기 신뢰와 자기 높임의 방어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대적자들은 자기들의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중심적 주장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의 영적 무기?하나님의 능력?를 가지고 그들의 주장의 근거를 파괴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사사로이 그들의 주장 하나 하나를 일일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 그들의 메시지의 근거를 파괴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고린도후서의 나머지 네 장(10~13장)에서 보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B.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깨뜨리고 죄성에 물든 사고 패턴과 하나님께 반역하여 자기 삶을 사는 정신 구조를 파괴한다.
둘째로 바울 사도가 파괴할 것은 ‘모든 이론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입니다(5a). 진영이 무너진 후에 공격 목표는 ‘높게 세워진’ 탑일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의 대적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방식이며, 죄성에 물든 사고 패턴과 하나님께 반역하여 자기 삶을 살아가는 정신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대적자들은 자기들의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결코 바울 사도를 용납할 수 없고 곧 복음과 그리스도를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고 패턴은 죄성에 물든 것이어서 세상적 방식으로는 똑똑한 것 같아 보이고 지혜로운 것 같아도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가진 정신 구조는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로써 바울 사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면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고 구조, 하나님 없는 이론, 하나님 없는 세상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사고로 가득 차 있고 이런 방식으로만 생각을 계속 해간다면 결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그들에게 결코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런 것들로 자기의 속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너무나 옳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틀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참됨을 가늠하는 것도 그들의 이성적 판단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들을 다 파괴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절대로 그들이 가진 명석한 판단력이나 지혜 때문이 아닙니다! 복음이 그들 영혼의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교만의 탑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비로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교만의 탑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제라도 고린도교회의 바울 사도를 대적하는 자들과 같은 위치로 돌아가게 될 사람들인 것입니다.

C. 인간 존재의 지적 사고의 중심인 정신(mind)을 그리스도의 포로로 사로잡아간다.
세번째로 바울 사도는 고대 전쟁에서 진영이 무너지고, 탑이 무너졌을 때, 적진의 군사들을 사로잡아 포로로 잡아가는 것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라는 말에서 ‘생각’이 가리키는 것은 인간 존재의 지성의 중심으로서 ‘정신’(mind)입니다. 보다 전문적인 말로 하면 이것은 세계관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대적자들의 정신 곧 세계관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여 포로로 사로잡히기까지 바울 사도는 싸울 것입니다.

이제 6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 싸움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될 자들이 다 복종하게 되면, 고린도를 방문하여 남은 자들?여전히 바울 사도와 복음을 반대하고 거짓 사도들의 편에 서 있는 자들?을 벌하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이어서 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이 문장은 번역이 여러 가지로 가능합니다. 여기 개역성경과 같이 직설법으로 가능하고, 또 의문문이나 명령문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만일 KJV처럼 의문문으로 번역하면, Do ye look on things after the outward appearance?(너희는 모든 것을 외모로만 보느냐?)가 됩니다. 그리고 RSV나 ESV처럼 명령문으로 번역하면, Look at what is before your eyes(네 눈 앞에 있는 것을 보아라)가 됩니다. 최근의 연구를 통해서 점차 명령문으로 보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뜻이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가 아니라 ‘너희 눈 앞에 있는 명백한 실상을 좀 보아라’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바울 사도 자신도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을 믿을 것입니다. 그들이 참 신자라면 그들은 결국 바울 자신이 참 사도라는 것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뒤집어서 보면, 그들이 끝내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판단으로써 자신들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4. 바울 사도의 싸움
우리는 바울 사도의 싸움의 본질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 싸움의 성격에 대하여 10장의 후반부 특별히 12~18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A. 싸움의 핵심은 복음이며, 복음은 모든 교만과 자랑을 깨뜨린다(12).
바울 사도가 이 싸움에서 다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증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랑의 문제였습니다. 세상적인 자랑, 인간적인 자랑을 고린도 교회의 대적자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10: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여기서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이것은 복수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는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화자찬하는 자들입니다. 11:5에서 말하는 ‘지극히 큰 사도들(super-apostles)’을 일컫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특징을 너무나 정확하게 바울 사도가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기를 칭찬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자랑의 문제를 꺼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뿌리깊은 죄성인 교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교만함과 자랑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복음으로써 바울 사도가 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무엇이 과연 우리의 뿌리깊은 죄성인 교만을, 그리고 자기자랑의 뿌리를 다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 외에는 이 교만과 자랑을 뿌리뽑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싸우고 있는 싸움의 핵심은 바로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복음이 여러분의 교만과 자랑의 문제를 건드리고, 그것에 도전하며 마침내 그것을 깨뜨리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 복음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의 자만과 교만을 건드립니다. 복음은 여러분의 자랑과 자존심을 거슬립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뿌리를 제거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i. 어리석은 자랑(12):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기준이다.
거짓 사도들은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을 자화자찬하는 내용을 보면 그들이 가진 기준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됨은 누군가와 비교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12절에서 그들은 ‘지혜가 없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제일 똑똑하고 잘난 줄 알지만 실로 어리석은 자들이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증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자기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말 것입니다. 둘 다 복음으로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B. 싸움의 목적은 고린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8).
바울 사도가 이 싸움을 하는 목적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거나 오해를 풀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숭고한 목적은 바로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복종하기를 그는 원하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주신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한 권위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을 다시 세우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자기의 사도직을 아무리 심하게 자랑한다고 할지라도(거짓 사도들이 자기를 자랑하듯이) 결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사도직을 주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5. 자랑이 합당할 때(13~17)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문제삼고 있으며 복음으로써 깨뜨리겠다고 말하는 것은 자랑 그 자체가 아님을 주목하십시오. 왜냐하면 합당한 자랑이 있으며, 바울 사도 자신도 그렇게 자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 사도가 문제삼는 자랑, 곧 고린도교회의 대적자들과 거짓 사도들이 가진 자랑인데,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비교함으로써 얻어지는 자기 자랑들이었습니다.


A. 하나님이 주신 기준으로 자랑하라(13~16)
바울 사도는 여기서 자기의 자랑을 그들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자랑합니다(13절). 여기서 ‘분량’이란 단어와 ‘한계’라는 단어를 통해서 바울 사도가 정확하게 의미하려고 한 것이 무엇인가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마는, 그것이 지리적 경계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가능한 해석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미 베드로를 비롯하여 다른 사도들과 그들의 부르심의 대상에 있어서 선을 그은 적이 있습니다. 갈 2:9입니다.
갈 2: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이 결과로 인하여 그는 이방인들의 지역인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고(행 18) 거기서 열매를 얻어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정해주신 기준의 한도 내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기준의 한도 내에서 자랑합니다. 그 기준의 한도 내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이루신 일들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 사도들처럼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주어지는 자랑이 결코 아닙니다. 거짓 사도들은 계속 자신들을 참 사도인 바울과 비교했습니다. 무아경과 같은 체험으로써, 영적 능력으로써, 설교의 웅변적 솜씨로써, 자신들이 받는 사례비의 크기로써….비교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사도라면 자신들은 더욱 더 사도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거짓 사도들은 바울 사도가 건축해 놓은 터 위에서, 다른 사람의 영역에서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10: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 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그들은 바울 사도가 건축해놓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하면서도 자기들의 사역 때문에 이 교회의 생명력이 유지된다고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의 영광을 훔친 자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다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함으로써, 자신의 사역의 한계?이방인의 사도로서?안에서 그 영향력이 점점 더 커져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만일 고린도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참 믿음 안에서 자라간다면, 그들은 바울 사도의 이방인 전도의 사역을 힘껏 지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 사도의 바램은 고린도를 선교의 베이스로 삼아 로마와 스페인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고자 하는 것임도 밝혀줍니다(16절).
10:16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의 자랑의 기준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계 내에서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와 비교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영역과 한계 안에서 자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와 부르심과 사역 안에서 자랑하십시오. 다른 사람과 여러분을 비교함으로써, 또는 다른 사람이 이루어놓은 기초 위에서 자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여러분이 얼마나 신실하게 열심으로 살아왔는지로 말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B. 주 안에서 자랑하라(17) ?렘 9:23~24
드디어 바울 사도는 적극적으로 합당한 자랑의 원칙을 17절에서 말합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약성경에 능한 바울 사도는 예레미야 9:23~24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렘 9:23~2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삶에서 성취하신 것 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자기 영적 상태나 힘 또는 은사가 자기 자신의 지혜와 능력에서 온 것처럼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나 힘있는 자 그리고 부자는 그들이 남이 가지지 않은 지혜와 남이 가지지 않은 힘, 그리고 남이 가지지 않은 부를 가졌기 때문에 비판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지혜와 힘과 부가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온 것처럼 행세할 때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해야 하는 것은 지혜와 힘과 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자랑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은혜로 그렇게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합당한 자랑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랑을 그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합당한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고린도교회의 거짓 사도들과 바울 사도를 대적하는 자들이 자랑하는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부적절할 뿐 아니라 악한 것들뿐이었습니다. 이것들은 다 복음으로써 깨뜨려져야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들을 다 깨뜨리겠노라고, 그것들을 깨뜨리는 전쟁을 하겠노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이 자랑하는 사람이 되라(18).
결국,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마지막 심판날에 옳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옳다고 인정받는 자는 오로지 주께서 칭찬하는 자입니다. 이 지혜를 얻으십시오. 주께서 칭찬하는 자, 주께서 자랑하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욥을 마귀 앞에서 자랑하셨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이 자랑하는 사람,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자랑하고 칭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와 비교해서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처럼 헛되고, 그것처럼 복음에 반하는 태도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들이 속한 교회를 자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말합시다. 그분의 긍휼을 자랑합시다. 죠이선교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하십시다. 그리고 죠이선교교회를 하나님이 칭찬하는 교회로 세워가십시다.

7. 교훈/적용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정리하면서 두 가지를 기억했으면 합니다.

A. 능력은 사람의 비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능력은 사람의 비범함?다른 사람과 비교하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싸우는 병기(무기)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복음은 우리의 교만을 꺾습니다. 우리의 자랑을 뿌리뽑아 내고야 맙니다. 참된 복음의 진리는 죄성에 물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말씀한 바와 같이 ‘세우려 함’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끝까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교회가 되고 복음의 진리 안에서 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사는 동안 그리고 특별히 벧샬롬교회를 섬기는 동안 끊임없이 계속해서 복음의 진리를 전함으로써 바울 사도가 싸우는 동일한 싸움을 싸울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가 우리 안의 모든 교만과 자랑을 깨뜨리시고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가시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비범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B. 신앙(성숙)의 증거는 자랑의 기준이 변하는 것이다. 교만이 깨지는 것이다.
두번째로 신앙이 성숙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아니 그 전에 신앙이 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자랑의 기준이 변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에게는 여러분 안에 자랑할 것이 남아 있습니까? 신앙이 없는 만큼 내 안에 자랑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들어오면 그런 자랑을 몰아냅니다. 신앙이 가득해지면 질수록 자랑이 설 자리는 없어집니다. 억지로 겸손한 척을 하라고 성경은 어디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자랑의 기준과 그 내용을 바꾸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의 예수믿는 것은 여기까지 가서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을 포함한 전존재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여 포로로 사로잡혀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전존재를 생각할 때 아직도 그리스도에게 복종되지 못하는 정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죄성에 물든 세상적 기준과 사고 방식 그리고 하나님 없는 정신 구조를 여전히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리스도의 온전한 포로가 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음의 진리로써 우리 안의 모든 교만과 자랑을 깨뜨려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하는 역사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