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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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고린도후서 강해 (5) - 은혜가 이끄는 삶

고린도후서 8:1-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09-16

말씀내용
0. 배경
본문은 사도가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본래 말하려고 했던 주제를 꺼내는 대목입니다. 1년 전쯤 사도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헌금을 부탁했었습니다(10절). 그러나 바울 사도에 대한 불신과 오해 등이 일어나면서 이 모금도 시들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볼 때 이 일은 예루살렘 교회의 형편을 위해서 마쳐야 할 일일 뿐 아니라 고린도교회가 그들 자신의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사도는 그들이 정말 회개하였다면 그 회개와 믿음의 증거를 이 일을 통해서 보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먼저 마게도냐 교회와 우리 주님의 경우를 소개하면서 고린도교회에 호소합니다.
1. 신자의 삶은 계획이나 재정상태가 이끄는 삶이 아니다.
오늘 읽은 짧은 본문에서 사도가 주목하게 하는 단어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입니다(1). 마게도냐 교회가 한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는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은혜가 아니면 그들의 행위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신자의 삶은 은혜라는 단어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은 그 계획에 의해서 자신의 삶의 자원들을 배분하거나 모아둘 수 있습니다. 그 계획이 포기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계획이라면 그 사람은 어떤 어려움을 감수하더라도 장래에 그 계획을 실현하려고 할 것이 당연합니다. 또 사람이 가진 재정상태나 형편도 그 사람을 설명해 주곤 합니다. 사람의 소비나 씀씀이는 그 사람의 경제적 상황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대부분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물론 지나친 과소비를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잘못된 소비성향이나 버릇으로도 설명될 수 있고, 지나치게 인색한 부자는 그의 구두쇠 성향으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재정상태에 맞게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마게도냐 교회는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되는 교회가 아닙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보여준 행위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계획이나 그들의 경제적 상황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런 점에서 신자와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2. 마게도냐 교회 케이스: 신자의 삶은 은혜가 이끄는 삶이다.
신자의 삶은 은혜가 이끄는 삶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서 사도가 말하는 마게도냐 교회는 복수로 쓰여져 있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에는 빌립보 교회 외에도 사도행전에서 보게 되는 베레아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사도가 여기서 이들 교회들을 언급하는 것이겠지만, 특별히 그가 고린도후서를 빌립보에서 쓰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고 빌립보 교회가 사도와 가진 특별한 관계를 생각할 때(빌 1:5; 4:15~19) 우리는 빌립보 교회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또 빌립보에도 여러 가정교회들이 존재했을 것이므로 사도가 빌립보 교회를 지칭했다고 봐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가 지금 고린도 교회에게 자랑하는 것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아니라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게도냐 교회의 탁월함이 아니라 마게도냐 교회에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탁월함이며, 주어는 마게도냐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A. 은혜의 역설: 환난의 많은 시련과 넘치는 기쁨 / 극한 가난과 풍성한 연보(2)
마게도냐 교회들의 행위는 하나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과 넘치는 슬픔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또 극심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구제를 받게 하였다고 해야 맞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극심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도무지 정상적 상황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입니다. 무엇이 이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은혜입니다. 은혜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이 마게도냐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게도냐 교회 사람들이 보여준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환난과 시련이 많았으나 기쁨이 넘쳤고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습니다. 저는 마치 한국 교회사 속에 복음이 증거되었던 초기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했고, 이 일을 위해 부지런히 헌금했던 그 가난한 한국 교회들의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기쁨이 넘쳤을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육이오동란이 끝난 지 채 2년도 지나지 않아서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던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였습니다. 아마 바울 사도가 그런 한국 교회를 알았더라면 그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고 어딘가에 쓰고 싶었을 것입니다.
B. 은혜가 한 일
마게도냐 교회들의 케이스를 통해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 싶었던 요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은혜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역사합니다. 은혜는 마음에 머무르고 힘없이 끝나지 않습니다. 은혜는 신자를 변화시킵니다. 은혜는 상황을 넘어서게 하고, 환난을 견디게 합니다. 은혜는 우리 너머의 사람, 우리 너머의 세상을 보게 하는 힘입니다. 은혜는 자기중심성과 이기주의적 성향을 넘어서게 합니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가 쓴 모든 서신서에서 ‘은혜’를 제거하면 남는 것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도 그렇습니다. 그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는 이미 고린도전서에서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은혜는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였으며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습니다. 2000년의 교회 역사를 보면 돈이 없어서 교회가 일을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없어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못한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선교를 하게 하는 것, 이 세상을 구제하고 섬기게 하는 것, 심지어 필요한 예배당을 짓는 것과 같이 돈이 들어가는 모든 일을 잘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사도는 나아가 마게도냐 성도들이 은혜에 대하여 가진 관점을 하나 특이하게 소개합니다. 4절입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마게도냐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헌금을 하는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NIV는 이 단어를 특권(privilege)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하는 일에 다른 교회들과 함께 참여하는 것은 특권이었습니다.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의 기존 관념을 뒤집는 관점입니까? 주는 자가, 베푸는 자가 그 주고 베푸는 행위를 특권이요, 은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받은 자가, 혜택을 받는 자가 그 받은 것을 은혜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입니다.
자본주의의 논리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본성은 주는 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게 하고 채권자와 같은 권세를 부리게 만듭니다. 소위 ‘갑’이 되고 ‘갑’으로 행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이런 세상과 본성의 원리를 뒤집는 힘입니다. 은혜로 하지 아니하고 본성으로 하는 ‘주는 행위’는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가져다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받는 자들에게도 영적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교회 안에 마게도냐 교회가 가지고 있던 은혜가 보이지 않는 것을 슬퍼합니다. 그러나 종종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경험한 분들 안에 나타나는 은혜와 은혜의 관점들을 볼 때보다 기쁠 때가 없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이 주는 것을 은혜로 여겼기에, 그들은 사도에게 간절히 매달렸습니다(4). 자기들의 헌금을 받아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간절히 구하니’란 표현은 NASB나 RSV 또는 NLT가 번역한대로 ‘빌다, 구걸했다’(beg)는 말입니다. 주는 자가 매달렸습니다. 사도는 마게도냐 교회들이 가난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에 그들이 참여할 것이란 기대를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의 기대를 깨뜨렸습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이 헌금을 했기에 3절과 같은 태도가 가능합니다. 그들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만일 그들이 힘대로 했다면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다’(2절)고까지는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보는 넘치도록 풍성한 연보였습니다. 왜냐하면 ‘힘에 지난’(beyond their ability)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5절에 보면, 그들은 사도 일행이 바라던 것, 이것은 얼마간의 돈이었는데 그들은 그 이상을 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 그들이 드린 것은 단지 돈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으며 사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은 헌금이 아니라 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나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였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눈을 밝혀 줍니다. 은혜는 분별력을 줍니다. 무분별이 은혜의 증거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똑똑히 분별했고 똑똑히 대상을 보고 드렸습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9)
바울 사도는 마게도냐 교회들의 케이스에 이어서 두 번째로 구주께서 보이신 모범을 소개합니다. 사도는 9절에서도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나님이신 주님 자신의 이야기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질적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가난의 저주가 끝났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설명한 말입니다.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통하여 우리는 이 땅의 저주를 면하고 하늘 보좌에 올라갈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죄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시는 사랑 안에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서 하신 일을 이제 고린도 성도들은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4. 은혜를 성취하게 하라(6)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 교회들에 비하면 부유한 교회들이었습니다. 이제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보여줄 것을 권합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가 일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는 디도 편에 중간편지를 보냈을 때, 그가 이 모금의 일도 잘 성취하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것이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는 말의 의미입니다(6). 사도가 이 일을 ‘은혜’라고 칭한 것은 바로 앞에 마게도냐 교회의 은혜와 통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이 ‘헌금’을 ‘내가 한다’는 의식이 아니라 ‘은혜에 참여한다’는 마음으로 하기를 바라는 목자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야만 이 일이 그들에게도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은혜는 7절에 사도가 열거한대로 믿음의 은사, 말의 은사, 지식의 은사, 그리고 이제 그들이 회개함으로써 바울 사도에게 보인 간절한 마음(7:11)과 사랑의 진실함으로만 표현되지 않습니다. ‘풍성하다’는 단어는 본래 ‘뛰어나다’(excel)는 뜻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영적 은사들과 회개의 은혜가 정말 놀라운 것들이라면, 이제 너희는 ‘돈과 관련된’ 이 은혜에서도 그 뛰어남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것을 말이 아니라 돈으로 보이라는 말입니다. 은혜는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사도는 이것이 은혜와 사랑의 증명으로서의 자원하는 헌금이 되게 하려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8).
5. 교훈과 적용
A. 돈으로 은혜를 증명하라.
존 웨슬리는 “주머니가 회개하기 까지 나는 그 사람의 회심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1/3은 돈과 관련된 것이다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돈 이야기를 하면 신앙생활에 은혜가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은혜는 돈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증명해줍니다. 받은 은혜는 얼마나 은혜롭게 말을 잘 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자신의 경제생활에서 가진 것을 사용하는가로 나타납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은혜 받은 증거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연보를 넘치게 했습니다. 그들의 많은 환난과 극심한 가난을 생각하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비난 받을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은혜’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구제하고 선교를 하는 것은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OOO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여러분 개인의 혹은 가정의 경제 생활은 어떻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혜를 보여줍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누리는 은혜의 풍성함이 없으면 우리는 본성대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작고 사소한 섬김을 남 몰래 감당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 보고 아십니다. 그런 조용하고 은밀한 섬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본문은 돈으로 은혜를 증명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B. ‘을’로 살아가는 것
사랑은 받아본 사람이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한 번도 제대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자기 인생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은혜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닮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은 베푸시고 또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베풂의 기쁨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베푸심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우리에게 소위 ‘갑의 행세’를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은혜의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은혜는 갑질을 하지 않게 합니다. 주고 베푸는 것을 은혜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이 땅에서 ‘을’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갑’으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은혜에서 멀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가졌으나 겸손하고, 베풀지만 행세하지 않게 하는 것이 은혜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는 이런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이런 소원, 이런 기도의 제목을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 하나님께서 벧샬롬 공동체에 베푸신 은혜를 풍성하게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가 이끄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