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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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고린도후서 강해 (4) - 거룩함을 온전히 이룹시다

고린도후서 6:3~7: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09-02

말씀내용
고린도후서는 바울 사도의 서신들 중에서 그의 개인적인 심정을 가장 깊이 표현하는 서신입니다. 적지않은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이 사도에 대한 의심을 풀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거짓 교사들에 이끌려 사도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참된 신앙으로 서도록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1. 바울 사도의 자천(6:3~10)
사도는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이제 내 삶을 봐라. 그리고 나를판단해라(6:4).” 여기서 사도가 자신을 하나님의 참 일군이라고 추천하는 근거는 그들 앞에 드러난 그의 삶 자체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삶과 유리된, 삶과 분리된 신앙이 아닙니다.

A. 삶과 신앙, 삶과 교리는 같이 갑니다.
삶과 신앙, 삶과 교리는 언제나 같이 갑니다. 제가 왜 삶과 신앙이라고만 하지 않고 삶과 교리라고 언급하는지 아십니까? 신앙과 교리 역시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내용이 깊어져야 하고 분명해져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이 우리 안에 믿음의 내용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교리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심지어 교리는 기독교의 영혼이라고 까지 표현됩니다. 교리 없는 기독교는 영혼 없는 육체와 같습니다. 신앙과 교리는 삶에서 그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삶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자신이 어떻게 자기가 전한 복음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B.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6:3): 복음 사역자의 태도
바울 사도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받은 복음의 직분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는 사역이요, 직분이었습니다. 그는 이 직책이 그 무엇으로도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사도는 자신에 대한 용납이 없이는 고린도교인들이 자기가 전한 복음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저를 포함하여 모든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두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목사가 싫으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목사인 저 자신으로 인하여 복음의 사역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복음이 나로 인하여 가리워지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우리로 인하여 복음이 막히지 않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C. ‘많이 견딤’의 목록들
사도는 먼저 자기가 ‘많이 견딘 것’들의 목록을 소개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견뎌야 했던 삶의 목록들입니다. 복음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이 목록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네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목록들의 주제는 4절에 소개된 ‘많이 견디는 것’(great endurance)입니다.

i. 많은 어려움들(6:4b~5): 복수(plural).
첫째는 어려움들의 목록입니다. 4절 하반절과 5절에 환난, 궁핍, 고난, 매 맞음, 갇힘, 요란한 것, 수고로움, 자지 못함, 그리고 먹지 못함은 모두 복수 형태로 사용되었습니다. 1)환난, 궁핍, 고난은 일반적인 어려움들을 말하고, 2)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박해를 가리키며 3)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은 그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한 자발적 헌신의 증거들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것들을 견딘 것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였습니다.

ii. 은혜의 목록들(6:6~7a): 단수(singular)
이어서 사도는 은혜의 목록을 소개합니다(6,7a). 이것들은 모두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 그리고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함?동기의 순수함?을 지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행동했으며 오래 참았고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 거짓이 없는 사랑을 견지했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자기를 붙들어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은혜의 목록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iii. 변하는 상황들(7b~8a): ‘말미암으며’(with, through)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란 말로 시작하는 세번째 목록은 변하는 상황들입니다. 이 목록은 모두 헬라어 전치사 ‘dia’로 시작하는데 ‘말미암으며’(through)라는 의미입니다. 영광과 욕됨,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사도는 의를 자기의 무기로 사용하여 모든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했습니다. 영광과 욕됨은 사도 자신을 향해서 직접적으로 고린도교회가 취했던 태도입니다. 그는 사역을 통해서 영광과 모욕을 다 경험하였습니다.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이란 사도에 대한 좋은 소문과 나쁜 소문을 말합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숱한 상황 변화들을 경험하면서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섰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과 평가에 매달리지 않고 하나님의 평가에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iv. 하나님의 역전시키시는 능력(8b~10): ‘같으나’
마지막으로 사도가 제시하는 목록은 상황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1)‘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2)‘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3)‘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4)‘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5)‘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6)‘가난한 자 같으나 항상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7)‘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은 복음의 역설입니다. 복음은 이것을 삶 속에서 경험하게 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아도 사실 그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항상 누리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은 상황이 빼앗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야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어떤 경제적 상황에 처하든지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와 같이 대단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는 경험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경험입니다.

D.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놀랍게 나타나는 것은 고난이 없고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라 역경을 믿음으로 견딜 때이다.
사도가 자기 삶의 고백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도는 자기가 당하고 있는 모든 환난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거되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의 삶은 겉보기에는 그대로 였습니다. 여전히 그는 고생을 하고 있었고, 일부 고린도교인들에 의해서는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너희들이 보기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은 나의 삶 속에서 놀랍게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역경 속에서 믿음으로 견디는데서 가장 놀랍게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는 ‘많이 견디는 것’(great endurance)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엄청난 기적 같은 일이 있어야 간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견뎌내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잘 간증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나눔이 풍성하길 바랍니다.

2. 거룩한 교회가 되라(6:11~7:1)
이렇게 사도는 아비의 심정으로 자식에게 하듯이 내가 마음을 넓혔으니 너희도 마음을 넓혀서 나를 용납하라고 권합니다(11~13). 그런데 14절에서 갑자기 화제가 바뀌는 인상을 받습니다. 사도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합니다. 왜 사도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A. 구별과 분리(6:14b~16a): 의와 불법 / 빛과 어두움 / 그리스도와 벨리알 /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 /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
14~16절에는 5개의 구별과 분리의 개념이 나옵니다. 의와 불법,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입니다. 이것들은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는 개념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4절에 ‘믿지 않는 자’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불신자와의 결혼, 불신자와의 동업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불신자가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가 결정됩니다. 단순히 결혼이나 동업 문제를 금하는 것이라면 그런 문제가 이 문맥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여기서 ‘믿지 않는 자’는 여전히 사도 자신을 배척하고 거짓 사도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들이 자신을 용납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이미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고 복음을 바르게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과 멍에를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사도의 메시지(고후 5:20)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권면(고후 6:2)을 거절한다면 그들은 결국 불신자와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형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여기 사도가 소개하는 다섯 가지 대립과 불일치의 개념과 동일한 것입니다. 절대로 양자는 양립할 수 없으며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이들과 함께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사도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의 가장 큰 위험은 언제나 교회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교회 안으로부터 일어난 문제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짓 가르침이었고, 다른 복음의 문제였습니다. 믿지 않는 목사, 믿지 않는 장로, 믿지 않는 신학자, 믿지 않는 교인(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깊고 신중한 영적 분별력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사도가 생각한 것은 교회의 순결과 거룩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인용하는 구약성경의 구절들을 볼 때 명백합니다. 16~18절에 있는 구약의 인용들은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5개의 대립 개념들의 절정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데 성전인 교회는 절대로 우상과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B. 구약 인용
사도는 구약의 한 구절이 아니라 구약의 여러 구절을 한데 섞어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16절 하반절에서 18절은 모두 구약의 인용입니다.

i. ‘내가 저희 가운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16절; 레 26:11~12; 겔 37:27).
첫째로 16절 하반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 가운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 말씀은 레 26:11~12과 겔 37:27을 합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것은 출애굽과 관련된 그 직후에 주어진 약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고린도교인들은 새언약의 백성이 된 자들이며 참으로 하나님은 저희 안에 계시고 저희 하나님이 되시며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ii.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17~18절; 겔 20:34; 삼하 7:14; 사 43:6; 52:11)
또 17~18절은 겔 20:34와 삼하 7:14 그리고 사 43:6과 52:11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일부는 제사장들에게 해당되는 정결규례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부정한 것과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의 인용이 출애굽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이 인용은 구약의 또 한 번의 중요한 구원 사건인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과 관련된 약속입니다.

사도가 장황하게 구약 성경을 인용하는 이유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논지, 즉 불신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 두 구약 예언의 중심에는 17절의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가 있는 것입니다. 이 분리와 구별의 명령이 바울 사도의 강조점입니다.

C. 명령과 권면
i. 너희는 불신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6:14a).
이제 14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은 본래 불신자와의 결혼이나 동업을 금하는 명령으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하는 명령으로 볼 수는 있겠지만 불신자와의 동업 자체를 금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살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멍에를 같이 한다’는 말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할 어떤 연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그룹에 속한다거나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그것이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자신을 대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을 불신자로 규정하면서 그들과 함께 교회, 곧 하나님의 성전을 이루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흔드는 문제라는 것이지요.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을 거룩함에서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ii.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7:1).
사도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하면서 권면을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은 바울 사도가 흔히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에게 이것은 익숙한 표현이지만 바울 사도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향한 마지막 권면을 애타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는 ‘우리가......깨끗하게 하자’고 말합니다. 명령이 아니라 권유입니다. 고린도교회와 바울 사도 자신이 가지는 연대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고린도 교회의 지체인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관심은 고린도 교회가 깨끗한 교회, 순결한 교회, 거룩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르침과 삶의 영역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 근거와 동기를 두 가지로 사도는 제시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약속을 가진 자들이란 사실입니다.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한 것이 바로 그 약속들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자답게 그들은 정결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에 대한 약속과 그에 대한 소망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삶의 순종에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거룩함을 이루어갈 근거와 동기로 제시하는 첫번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바울 사도가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다 그 분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은 마땅히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야 할 거룩한 감각입니다. 이 감각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어가게 하는 근거와 동기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물질 축복, 예수님과 사역의 성공, 예수님과 내가 지금 소유하고 있지 못한 어떤 것을 함께 얻어야 내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여기는 한, 예수 믿는 것을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만드는 셈이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의 쾌락을 얻는데 초점을 맞추는 세상의 삶의 방식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오늘날 온갖 우상들로 둘러쌓여있으며, 이미 우상들이 다양한 모습들로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은 일치될 수 없는데 말입니다.

탐욕이 우상숭배의 핵심입니다. 이것들이 모든 비진리와 관계있는 것들입니다. 교회가 우상으로부터의 자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세상을 향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서 선교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가장 창조적인 전략은 바로 교회 자체입니다. 세상에 가득한 우상으로부터 자유한 교회의 존재야말로 세상을 향한 최고의 복음 증거가 될 것입니다.

사도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는 것은 고립을 위한 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선교를 위한, 복음 증거를 위한 분리이며 순결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 세상 속에서 선교사로, 이 세상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과 나그네로 여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함을 이루는 길은 우상을 이겨보려는 우리의 의지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의 만족이 되시며,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를 채워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경험하며 그런 고백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도록 만들어주는 유일한 힘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