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간추린 고린도후서 강해 (3) - 영원을 갈망하는 믿음

고린도후서 4:16~5:10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08-26

말씀내용
<영원을 갈망하는 믿음> 고후 4:16~5:10

1. 위기: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고 있다.
제가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몇몇 유명한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의 본질이 보편적으로 훼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기독교 신앙의 초점이 현저하게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의 탈선: 영원 vs. 지금 당장
제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이 훼손된다는 것을 좀 더 설명드리겠습니다. 성경적 신앙은 영원의 관점을 견지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의 가르침이 현재, 지금 당장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제 강조점은 이 ‘주로’라는 말에 있습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일상의 삶에서(그것도 신앙생활입니다) 어디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사십니까? 지금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고 거기에 초점을 두고 사십니까? 이것은 아주 큰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현실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성경도 현실을 도외시하고 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문제는 주로 이 현실의 문제가 우리의 인식과 삶의 자세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탈선입니다.
3.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초점
A. 지금이 아니라 영원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초점은 지금이 아니라 영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것을 얼마나 자주 들어보셨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지금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이 명제를 반대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명확하게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B. 영원은 지금을 포함한 전체이다.
신앙이 영원을 주목한다고 말할 때, 그 영원은 지금 현재의 삶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즉, 영원이냐, 지금이냐의 문제는 미래냐 지금이냐의 문제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미래는 현재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를 다 담고 있는 시간에 대한 최고치의 표현입니다. 영원이라는 개념은 이미 현재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영원을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을 현재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그것은 신앙 생활에 심각한 오류를 야기하게 됩니다. 즉 현재를 무시하고 소위 미래의 천국에만 매달려서 살아가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 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영원은 지금을 포함한 전체라는 것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은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4. 낙심의 상황: 현실, 눈에 보이는 것(고후 4:18; 5:7)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이 신앙의 본질적 관점을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면서 고린도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들의 신앙에 적용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모든 현실은 사도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습니다.
A. 그리스도의 포로(고후 2:14; 고전 4:9), 질그릇(고후 4:7~15)
이미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끌려가는 포로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고후 2:14). 그리고 그 끝이 죽음이라는 것은 자명했습니다(고전 4:9). 이뿐 아닙니다. 사도는 자신을 질그릇에 비유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질그릇입니다. 이 질그릇이 당하는 상황은 사방으로 욱여 싸이고 답답한 일을 당하는 것이며 박해를 받고 거꾸러 뜨림을 받는 일들이었습니다(고후 4:8~9). 연약한 질그릇 같은 사도는 날마다 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은 삶의 연속이었습니다(고후 4:10~12). 이것은 사도가 직면하고 살아가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는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고후 4:8,16).
B. 겉사람(고후 4:16); 환난(고후 4:17)
이것뿐이 아닙니다. 사도는 자기의 겉사람이 낡아진다고 말합니다(고후 4:16).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렀을 사도의 육신은 결코 이전과는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과 달리,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는 또 환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자신 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예외없이 다 환난을 당한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건강이 약화되는 것 못지 않게, 환난은 우리를 주눅들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C.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1)
또 보십시오. 5장 1절에서 사도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이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세속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천막이 일시적인 용도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저 장막집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이 세상이 전부라면 우리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를 낙심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실존입니다.
5. 낙심의 상황을 살아가는 신자의 믿음의 본질
이런 실존을 살아가는 인생에서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일을 합니까?
A. 믿음은 기다림이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강조하고 싶어하는 믿음의 본질은 기다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미래적 요소를 강조합니다. 믿음은 장래에 하나님께서 하실 것에 대한 기대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근거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자,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이 기다림은 무엇이었는지를 보겠습니다.
i. 긍정적인 탄식(고후 5:2,4)
사도는 본문 2절과 4절에서 두 번 탄식이라는 말을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그리고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 탄식은 사도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하는 탄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는 탄식입니다. 이것은 장래에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탄식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경험할 수 없는 탄식입니다. 특별히 이 탄식의 내용으로 보아, 우리는 바울 사도가 죽음을 보지 않고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것을 바라보았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덧입고자’ 또는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함이라”는 것이 그런 의미를 전달합니다. 사도의 탄식은 장래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라보는 기다림이었습니다.
ii.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두려워하는 삶(고후 5:10)
우리가 살펴야 할 또 하나의 구절은 5장 10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주신 구원을 마지막에는 행위로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논지는 언제나 일관됩니다. 우리 구원의 도리는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이라고 한 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말씀한 것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은 언제나 행위를 낳는 믿음이고, 행위로써 그 참됨을 드러내는 믿음이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심판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참된 행위를 낳습니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두려워하며 사는 자는 마지막 날에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참으로 그 심판을 견디지 못할 자들은 결코 그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의식하고 두려워하며 살게 합니다.
B. 믿음은 영원을 보는 눈이다.
두 번째로 본문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은 믿음은 영원을 보는 눈이라는 것입니다. 영원을 본다는 것은 본문에서 몇 가지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i. 속사람을 보라(고후 4:16).
먼저 속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날로 후패해갑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속사람을 보게 합니다. 영원의 관점이 없는 사람에게 속사람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사람에게는 오직 겉사람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을 가진 성도에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점점 더 선명하게 하나님을 알고 보게 됩니다. 이것을 보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겉사람을 보지 말고, 속사람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속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날로 새로와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속사람은 은혜를 받아서 더 은혜로와지고 있습니까?
ii.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주목하라(고후 4:17): 현재의 환난이 영원한 영광을 성취한다.
두번째로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두 가지를 대조시킵니다. 환난은 ‘잠시 받는’ 것이며 ‘경한 것’이지만, 영광은 영원하며 중하다고 말합니다. 환난이 가벼워서 가볍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영광의 무게에 비하면 가볍다는 것입니다. 영원에 대한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잠시 받는 환난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룹니다. 여기서 ‘이룬다’는 말은 말 그대로 성취하는 것입니다. 환난은 성도에게 영원한 영광을 이루어줍니다. 이 점에서 성도가 당하는 환난은 말할 수 없을만큼 긍정적입니다. 성도들은 인생을 살면서 바울 사도가 말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배워갑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현재의 환난이 영원한 영광을 성취합니다.
iii.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라(고후 5:1).
마지막으로 믿음이 보게 하는 것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고 주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것입니다.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는 말은 임시 거처인 장막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집입니다. 그것은 무너지지도 멸망하지도 않을 영원한 집입니다. 믿음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것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되었다는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6.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유지된다(고후 5:5).
놀라운 것은 이제 믿음이 있으니 너희는 날마다 새로와지는 속사람을 보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고 살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이 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 순간에 너희에게 주신 성령님께서 너희 안에서 그 믿음을 통해서 너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볼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믿음을 내 능력으로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은혜입니다. 믿음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이것이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에 기도의 중요함이 있습니다. 믿음을 구해야 하고, 믿음이 내 생활 속에서 매 결단의 순간마다 역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7. 신자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한다(고후 5:7).
여러분,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은 오늘 살아가는 현실을 전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실이 망해도 신자는 망하지 않으며, 망했다고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는 것이 신자의 특권이고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영원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영원을 보는 눈으로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목숨을 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이 말하는 것처럼, 의인은 어떤 환경에서도 사자처럼 담대할 수 있습니다(잠 28:1). 그는 어제와 오늘이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7).” 이것은 신자의 선언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삶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사도는 9절에 이렇게 또 고백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죽든지 살든지’라는 말입니다.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는 주를 기쁘시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환경에 따라서 좌우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신자 안에서 행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여러분 안에서 그 일을 하고 있습니까? 믿는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주신 성령님을 의지하여 믿음이 역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오직 믿음을 사는 삶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삶은 눈에 보이는 것, 현실의 환경에 의해서 결정하고 걸어가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의 관점을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이 악조건도, 이 환난도 하나님께서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이루게 하시려고 주시는 선한 도구라는 사실을 아는 삶입니다.
영원의 관점, 오, 주께서 이 믿음을 우리에게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사 이 땅의 모든 환난을 능히 감당하게 하시고 그 속에서도 사자같이 담대하게 서며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