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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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고린도후서 강해 (1) - 그리스도의 포로들

고린도후서 2:14-17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08-12

말씀내용
1. 한국교회를 사로잡은 승리주의 망령
작년에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기독교 서적은 <왕의 재정>이란 책입니다. 이 책은 거룩한 부자, 성부론을 이야기합니다. 이 책이 많이 팔린 이면에는 한국교회를 사로잡고 있는 승리주의의 망령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관심이 정말 왕이신 하나님 자신께 있는지 아니면 ‘재정’ 곧 돈에 있는지 정직하게 묻고 싶습니다. 교회 안에 승리주의의 망령이 일어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했던 뱀의 말에서부터 그것은 있었으니 비단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라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의 한국교회를 돌아볼 때 승리주의 망령은 번영신학은 물론이고 ‘청부론’이나 ‘고지론’과 같은 개념이나 <형통의 원리를 상속하라>나 <긍정의 힘>과 같은 책들로 전파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십자가 복음에 대한 오해에 기인할 뿐 아니라 복음을 훼손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과 모든 악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악과 사탄을 이기시고 승리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승리주의의 문제는 성경의 논지와는 다른 차원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는 십자가의 승리의 열매에 초점을 맞추고 그 전리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이기셨으므로 우리는 이긴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가장 잘 증명하는 길은 그분이 확보해 두신 열매를 기다리면서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기꺼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승리의 결과를 보장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개선행진(2:14)
승리주의가 좋아하는 구절이 본문 14절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세상적 승리주의의 관점을 취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이 구절에서 말씀하고자 한 것이 정말 그런 것인가 본문을 살펴보지요.

A. 바울은 승리한 전사인가, 포로인가?
이 구절을 정확히 번역하면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공동번역)입니다. 바울 사도는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던 정복전쟁의 역사에서 한 장면을 빌어옵니다. 바로 정복전쟁을 승리로 마치고 로마의 황제 앞에서 개선 행진을 하는 장면입니다. 맨 앞에는 승리한 장군이 화려한 개선 마차를 타고 갑니다. 이어서 전쟁을 치른 영웅적 군사들과 그 뒤에는 정복당한 포로들과 전리품들이 뒤따릅니다. 그리고 도로변에서는 피워놓은 수많은 향들이 거리를 진동합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이 향기 진동하는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자격으로 들어왔느냐는 것이지요.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선두 마차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 옆에서 자랑스런 승리의 행진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승리한 군사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항복한 포로로서 선두 마차의 맨 뒤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10이 그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포로 대열의 뒤에 따라온 정복당한 적장들은 개선 행진의 마지막에는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여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승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역설이지요.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리고 결국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B. 약함, 고난, 그리고 죽음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온 세상에 날려보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약함과 고난 그리고 죽음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온 세상에 전하는 수단이라고 이해합니다. 이 논지는 고린도후서 전체의 논지이기도 합니다. 1:1~11에서 바울 사도가 묘사한 고난, 4:8~12에서 묘사한 자신의 상황, 그리고 6:9~10에서 쓴 말씀 모두가 그것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신 의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약함, 그리고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바로 그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에 대한 바울의 더 나아간 이해였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2:14b). 우리의 약함과 죽음으로부터 반사되어 나오는 것이 복음이요, 그 향기입니다. 성취와 성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포로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을 따라갈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멋있어야 하고,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목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삶을 통해서 이런 고백을 말과 삶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포로다. 그리스도가 나를 정복하셨다. 나는 그리스도께 항복했다. 그에게 붙잡혔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위대하고 우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는 결국 그리스도께 붙잡혔으며 그분께 항복한 존재이며 이제는 우리의 인생과 목숨과 모든 것이 그분께 달려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방식, 육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공과 부와 학식과 명예와 업적을 추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을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가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외적으로 성공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특권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든지 ‘포로로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일례로, 오늘날 교회에서 많이 행해지는 간증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간증은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성공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깔려있는 것이 승리주의 망령입니다. 이 사람은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전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간증은 실로 해롭기까지 합니다. 이런 승리주의 망령을 전파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와 같이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허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다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아닙니까? 이것들은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요일 2:16).

3. 생명과 죽음을 가져오는 향기(2:15~16)
이 냄새는 이중적인 기능을 가집니다. 이것은 사람의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입니다. 구원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향기는 어떤 이들?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어떤 이들?구원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이 냄새는 포로들이 풍기는 냄새가 아니라 포로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을 축하하는 냄새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요, 곧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사람을 죽게도 하고 살게도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포로들의 존재를 통해서 묻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포로다’라고 그들의 존재가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 향기는 그리스도의 포로가 된 사람 자신들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냄새지만, 그저 옆에서 구경을 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이 세상을 둘로 가릅니다. 그리스도께 정복당한 자와 그리스도께 정복당하지 않은 자로 가릅니다.

A. 감당할 수 없는 부르심(2:16b)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포로로의 부르심이 너무나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누가 과연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부르심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고난 당하는 포로로서 그리스도의 행렬을 따라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누가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자기의 능력을 가지고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대답을 뒤에 3:5에서 주고 있습니다. 조금 후에 그 대답을 우리는 살펴볼 것입니다.

B.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2:17).
바울 사도는 2:17에서 특별히 당시 고린도교회에 와있던 거짓 사도들을 지칭하여 말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할 때 그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거짓 사도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포도주에 물을 타서 팔아 수익을 더하던 부도덕한 포도주 상인들과 같다고 바울 사도는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장삿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그렇게 물을 타지 않는다고 항변합니다. 바울 사도의 태도는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하는 내용과 태도에서 자신을 거짓 사도들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동일합니다. 사도 시대에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이 많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도 거짓 교사에 해당하는 거짓 목사는 많이 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과 그것을 전하는 태도로부터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볼 때 우리 역시 그런 분별력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바울의 확신(3:4~5)
바울의 확신이 여기 표현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3:4). 그의 확신의 내용은 2:16에서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던졌던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되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가는 곳마다 나타내는 부르심을 누가 과연 능력이 있어서 감당하겠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A. 나의 자격과 능력과 만족은 내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났느니라(3:5).” 사도의 자격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문제를 그는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우리의 ‘만족’이란 단어는 사실 ‘능력’ 또는 ‘자격’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사도로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격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자기 힘, 자기 육신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포로로 살아갈 능력, 새언약의 직분을 행할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은혜가 필요합니다.

B. 우리의 부적격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장애물이 아니라 필요불가결한 부분이다.
옛언약을 체결했던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자신의 부적격성을 계속 언급했습니다(출 4:10~17). 그러나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간 보여준 탁월한 지도력은 결국 모세의 부적격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능력 있게 만드셨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사사 기드온도(삿 6:15이하), 이사야 선지자도(사 6:5이하), 예레미야 선지자도(렘 1:6), 에스겔 선지자도(겔 1:1~3:11)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적격함, 자격없음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셨다면 아무도 자기의 부적격성이나 자격없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논쟁하거나 변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Scott Hafemann은 고린도후서 주석에서 말합니다. “모세의 소명은 바로 그 장애물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입증하며 선지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자격의 원천이었음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여러분의 삶이 이것을 보여주는 삶이 되게 하셔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부적격성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장애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필요불가결의 조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로의 정체성을 가지고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는 사도와 그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나타난 능력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C. 새 언약의 직분은 글자가 아니라 영으로 한 것이다(내적 변화).
이것이 바로 3:6에서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적합하게 만드셨다, 자격이 있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해줍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설명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나 잘났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새 언약의 일군으로 세우신 방식은 율법 조문(율법 조문(의문), 글자)으로 하지 않고 오직 영으로 한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율법 조문(율법 조문(의문))은 단순히 글자를 말합니다. 돌판에 기록한 율법 곧 옛언약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마음판에 새겨진 것은 새언약입니다. 율법 조문(의문)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다라고 할 때 율법 조문(의문)은 율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로마서에서 율법을 가리켜,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 조문(의문)은 돌비에 기록한 글자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새언약을 주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판에 성령으로 율법을 새겨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순종하여 살고 싶은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내적 변화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거듭난 성도는 반드시 내적인 변화의 과정을 경험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더 거룩하기를 원하고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하고 비록 더딜지라도 우리는 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며 살아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새언약의 직분은 내적 변화를 만드는 직분입니다. 바울의 부적격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서 나타나 가는 곳마다 내적 변화를 성도들의 삶 속에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의 증거요, 살아있는 추천장이요, 새언약의 직분이 가지는 능력인 것입니다.

5. 교회는 포로 공동체, 포로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자격을 갖춘 자를 찾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부적격하다고 느낄 때 하나님은 그를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개선 행진의 선두 마차에 타고 있다고 느낄 때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어 행진의 맨 뒤에서 끌려가고 있는 존재임을 인식할 때,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을 이기셨고 포로로 잡으셨다고 철저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각처에서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포로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포로 수용소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레몬서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 바울은”(몬 1:1). 여기에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다는 뜻만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포로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항복한 나를 보라’가 아니라 ‘저 앞에 나를 정복하신 그리스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받은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의 패배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저 위대한 장수를 보라! 한 때 저가 천하를 호령하더니 이제는 포로가 되었구나”라고 하면서 그를 정복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내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 재물, 학식, 경험, 자녀 모든 것이 다 정복자이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의 선두 마차에 타려 한다면, 여러분은 원치 않게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포로로 만들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요, 우리의 포로됨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개선행진의 끝은 바울 사도에게는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들을 정복하신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을 따르는 포로의 삶을 증거하였고 그로써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낸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나의 고난은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의 포로된 증거이다”라고 말입니다. 고난이 그리스도인을 피해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고난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포로된 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어떤 고난도 복음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드러내는 삶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포로들입니다. 값싼 은혜를 드러낼 뿐인 승리주의의 환상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포로답게 행동하고 포로답게 처신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포로답게 말하십시오. 포로다운 삶을 사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도록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아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살아가는 삶 자체가 영광스럽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우리가 당하는 어떤 고난도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르심을 감소시키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포로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그 사실을 인하여 감사하고 그 영광을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만일 여러분 중에 자신은 아직 그리스도의 포로가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이렇게 구하십시오. “나를 정복하옵소서. 내 고집, 내 아집, 내 야망, 내 모든 것을 이기시옵소서. 그리고 나를 당신의 포로로 삼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 벧샬롬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포로들의 공동체로 온전케 하사,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빛고을 광주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드러내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