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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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고린도후서 강해 (2) -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고린도후서 6: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08-19

말씀내용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은 농담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를 향해서 심각하게 던져지는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사도는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고린도교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1. 바울 사도가 말하는 은혜의 증거
고린도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고 말할 때, 참된 은혜를 받은 참된 증거는 과연 무엇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A. 바울이 참된 사도인가? 그의 외모는 별볼일 없지 않은가? (고후 5:12)
먼저 바울 사도는 어떤 점 때문에 고린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를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들은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해주었고 복음으로 그들을 양육하였던 바울 사도를 향해서 “당신이 참된 사도가 맞는가?”라고 의심 어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바울의 외모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2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여기서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은 고린도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력서를 내세웠고, 자기들의 학벌, 인맥, 언변, 기타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고린도교회에 왔습니다. 반면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말하지 않았고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물론 내세우자면 바울은 당대의 어떤 사람에 밀리지 않는 학벌과 인맥과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음에도 말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외모로 판단한 것입니다. 외모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바울의 외모는 별 볼일 없어 보였습니다. 실제로 <바울과 테클라행전>이라는 1세기나 2세기에 쓰여진 고대 문서는 바울의 외모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중키에 머리카락은 별로 없고 다리는 약간 절뚝거리는 안짱다리이며 눈은 컸으며 그의 눈썹은 양쪽이 서로 붙어있고 코는 꽤 높았다.” 사도는 고린도후서 10:7에서 다시 한 번 고린도 사람들의 태도를 지적합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점에서 자유로우십니까?
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 한인교회의 청빙광고입니다. 이것은 미주에 있는 기독교신문에 나온 것을 제가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 ***한인교회 담임목사 청빙광고
*** 한인교회는 " 세계에게 가장 모범된 교회가 되게 하소서 " 란 표어를 가지고 세계 선교와 전도에 힘쓰며 아름답게 성장해온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13 에이커 대지에 아름다운 자체성전을 가지고 있으며, 256에이커 ( 35만평 ) 대지에 기도원을 세웠으며, Youth Vision Center ( 체육관/교육관 ) 건축을 준비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본 교회 당회장 *** 목사님께서 정년이 되셔서 원로목사님으로 추대됨에 따라 말씀, 능력, 성령 충만하신 담임목사님을 다음과 같이 청빙합니다.

1. 기도에 영적 능력이 있으신 분
2. 설교에 은사가 있으시며 성경에 깊은 이해가 있으신 분
3. *** 한인교회가 지향하는 복음적이고 보수적인 정통 신앙을
가지고 계시는 분
4. 영력, 인격, 지력, 체력을 갖추시고 도덕적이며 교회의 영적질서
를 지키시는 분
5. 큰 Scale의 Vision을 갖으시고 포용력이 있으신 분
6. 담당 교회를 부흥 성장 시키셨던 분
7. 미주지역 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5년이상 목회 경험이 있으신 분
8. 보수 신학 교육을 받으시고 박사학위를 소지 하신 분
9.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소유하신 분
10. 가정이 성경적으로 모범이 되시는 분

이들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고린도교회가 보여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고, 모든 교회가 이와 똑같지는 않을지라도 대다수가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볼 때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참된 증거가 없는 것입니다.
B. 참된 은혜를 받은 참된 증거는 무엇인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고전 15:10).”
그렇다면 참된 은혜를 받은 참된 증거는 무엇입니까? 사도는 고린도전서 15:10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게 은혜 받은 증거입니다. 그 은혜가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하면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이 수고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은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C. 은혜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여러분, 저는 벧샬롬교회에서 아직 10번도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전하는 설교에 귀를 기울인 여러분은 오직 은혜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제가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눈치를 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은혜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증거는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그 사람의 변화로 말입니다. 사도가 지금 고린도 교회에 도전하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2. 자랑의 문제와 인생
그것을 사도 바울은 지금 외모를 보는 태도와 관련지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 혹은 지도자에 대한 판단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외모로 자신들을 판단하고 남들을 평가했습니다.
A. 피해갈 수 없는 본성, 자랑
결국 이것이 무엇입니까? 자랑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인간은 자랑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무엇인가를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커서도 그 버릇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늙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자랑하는 내용이나 태도가 조금씩 변할 뿐입니다.
B. 자랑하는 노년 vs. 자랑할게 없는 인생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노년을 생각하십니까? 자식, 학벌, 성공, 재물...이런 것들로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 인생이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여기고 그런 노년을 얻고 싶으십니까? 그런 자랑이 가득하면 그 인생은 정말 성공한 인생입니까? 성경의 판단이 그러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기실까요? 여러분이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오셨다면 여기에 “Yes”라는 대답을 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자식이든, 학벌이든, 성공이든 아니면 재물이든 자랑하고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노년을 보내는 사람은 실패한 인생이 확실합니까? 만일 이런 논리라면 여기에 신앙은 무엇이고 은혜의 증거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저 우리의 본성을 따라서 살다가 죽는 인생이라면 거기 신앙과 은혜의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C.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세상의 자랑거리,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이 여전히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은혜 받은 증거를 드러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자랑하는 본성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은혜의 신비입니다.
3. 경건한 어른의 비전: 교회 안에 가득한 경건한 어른들
이 점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적인 어른 즉 경건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저의 표현입니다만, 성경은 그것을 성숙함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앙은 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라는가 하면 은혜를 받고 자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수단으로 말씀과 성례, 그리고 기도와 성도의 교제와 같은 것들을 주셨습니다. 은혜 받은 증거는 자람이고 성숙함이며 경건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A. 그리스도와 복음을 자랑하는 인생
경건한 어른은 자기에게 사로잡혀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에 베푸신 은혜를 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지난 수요일에 설교한 본문인 고린도후서 2:14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포로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포로는 자신을 이기고 포로로 만드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4:7에서 바울 사도는 그것을 질그릇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질그릇은 깨어지기 쉽고 깨어져도 별로 아깝지 않은 보통의 흔하디 흔한 싸구려 그릇에 불과합니다. 고려청자나 이조백자와 같은 도자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질그릇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 안에 보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 보배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빛,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복음이며, 또한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인생이 가치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 때문이며, 복음과 그리스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랑하는 것은 질그릇인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요, 복음의 진리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함과 같습니다(렘 9:23~24). 경건한 어른은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목회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딛 2:10).”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 삶, 성도는 이것으로 부름을 받았고 경건한 어른은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은혜받은 증거입니다.
B.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디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 살아야 하겠습니까? 살아야 하는 삶을 우리의 종교적 봉사나 행위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지적해야겠습니다. 기도, 말씀공부, 봉사, 기타 헌신하는 모든 일과 사역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고와 가치관이 한국교회에 많은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교회에 와서 보낸 많은 시간이 우리가 직면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교회생활로 축소시킨 결과,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교회에는 이런 일들이 많았고, 지금 그 열매를 거두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일보다 존재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교회에 봉사를 등한히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같이 갑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모든 일에서 우리 자신의 영혼이 은혜를 받고 성장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영적 성숙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경건한 어른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4.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어떻게 인생의 자랑거리(혹은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
이 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의 본성인 자랑에서 해방되고 자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짚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복음,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인생이 될 거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도 요한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자기 자랑의 수준에 머물러 그 재미에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자신을 자유하게 하는 진리를 알지 못한 것이며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인간의 실존에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 자랑거리들이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사랑이 이 모든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영광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세상의 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자랑하게 될 것이고, 그 안에서 만족함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그것을 알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 1:9~10).” 역시 알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가치를 알면 그것을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을 자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5. 실패해도 괜찮은 삶, 성공이 자랑이 되지 않는 삶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 지난 세월, 여러분의 신앙 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은 사람은 비록 흔들릴 때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세상의 가치 기준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습니다. 즉, 세상적으로 실패한 삶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세상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와 성공이 그 사람의 자랑거리가 되거나 수치거리가 되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존재는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인생은 궁극적으로 승리이고 성공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서 심지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성공해도 그 성공이 그의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공해봐야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자족이라고 말합니다. 자족이 없으면 경건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딤전 6:6). 그가 하는 열심 어린 기도와 성경공부와 모든 봉사가 아무 유익이 없을 수 있습니다. 자족함이 없다면 말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기준에 휘둘린다면 말입니다.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들이 나의 자랑거리가 된다면 말입니다. 실패해도 괜찮은 삶, 성공이 자랑이 되지 않는 삶은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우리를 얼마나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까? 성도는 이렇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삶에 자신을 온전하게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은 증거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이렇게 바꾸어냅니다. 우리가 이런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기뻐하십시다. 그리고 감사하십시다. 영원한 영광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세상의 영광 따위에 마음 상하지 말고 사십시오. 그리고 그것에 괜히 우쭐하지도 마십시오. 이런 경건한 어른들이 가득한 벧샬롬교회를 꿈꿔봅니다. 얼마나 복될까요? 영적 청년들에게, 아이들에게 얼마나 복된 선물이 될까요? 이것이 교회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자산인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 벧샬롬 공동체에 허락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