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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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고린도후서 강해 (9) - 하나님의 삶이 드러나는 삶 (2)

고린도후서 12:20 ~ 13:13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0-21

말씀내용
<소명?하나님이 드러나는 삶(2)> (고후 12:20~13:13)

우리는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마지막 태도가 성 삼위 하나님의 모습, 그 마음을 드러낸다는 것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은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도의 마음을 보려고 합니다.

1. 성자: 심판의 시간이 온다(12:20~13:4)
바울 사도는 편지를 마치면서 자신이 ‘이제 세 번째 갈 것’이란 말을 12:14과 13:1에서 합니다. 이번의 방문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두 번째 방문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있듯이 바울의 세 번째 방문은 심판의 방문이 될 것임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심판을 위하여 우리에게 오실 것을 상기시켜 줄 뿐 아니라 자신의 이 방문을 거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A. “내가 바라는 것은 심판이 아니다”(12:20~21).
그러나 바울 사도의 어버지와 같은 마음에는 심판을 위해서 그가 세 번째 방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심판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가 세 번째 방문을 하기 전에 모든 회개치 않은 자들이 다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 고린도후서를 썼고 또 이전의 편지인 중간 편지도 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재림 심판 전에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바울 사도의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20~21).” 바울 사도가 세 번째 방문을 하게 될 때 보기를 원하는 고린도 사람들의 모습은 회개하고 기쁨으로 해후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할까 봐 두렵다고 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 사도에게서 보기를 원하는 모습도 심판자로서 와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교회로부터 내쫓는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다루고 있던 그 문제만이 아니라 고린도교회가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모든 회개하지 않은 죄의 문제들을 다 다루려고 합니다. 다툼,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비방, 수군거림, 거만함, 혼란들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실까 두려워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바울 사도가 이런 회개하지 않은 죄들을 다루게 될 때 일어나게 될 어려움들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다루려고 하는 다른 목록들도 제시합니다.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않은 것들 때문에 슬퍼할 것을 우려합니다.

여러분, 문제는 죄가 아닙니다. 죄를 회개치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회개가 지속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동행하여 주시기를 기대할 수 있으며 또 구할 수 있겠습니까?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하는 경건의 습관입니다. 여러분을 돌아보십시오. 회개가 여러분의 삶에 있습니까? 항상 있습니까? 없다면 여러분이 죄를 전혀 짓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죄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죄를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죄를 인식합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는 죄를 죄로 인식할 수 없으며 따라서 회개도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세 번째 방문을 할 것입니다. 방문의 주제는 심판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대신합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가 회개하고 기쁨으로 해후하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13:1~4)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약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당신이 참 사도라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증거를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약함과 강함에 대한 세상적 기준은 바울 사도가 복음의 진리 안에서 드러내고 있는 ‘약할 때 강함’이라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게 했습니다. ‘바울은 약하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비록 자신의 마음에 원하는 것은 심판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치 않는다면 심판이 있을 것임을 13:1~2에서 밝힙니다. 사도는 그들이 한 말들을 율법대로 두 세 증인을 통하여 확정하고(신 19:15)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그들을 교회로부터 쫓아낼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무슨 권위로 그렇게 ‘강하게’ 행할 수 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권위입니다. 이것은 사도직을 가진 독특한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의 순결을 위하여 교회에게 주신 권위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책임을 언제나 바르게 수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정결케 하기 위한 책임이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을 더 엄격한 기준으로 다루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강한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약함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4).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사셨습니다. 사도는 그와 같이 자신도 약하지만 그 능력으로 강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강함을 입으신 것처럼 그렇게 세 번째 방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고린도 교회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성령: 심판을 준비하라(13:5~9)
그러므로 이제 고린도 교회의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도의 세 번째 방문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도 자신은 매우 근원적인 질문으로 그들을 도전합니다. 이것은 매우 도전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A. 고린도 교회: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라(13:5~6).
자기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인지 돌아보라고 사도는 도전합니다. 참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가짜인지를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에 대한 바나 연구소의 통계가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 미국의 성인 중,
39% 스스로를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여김
68% 때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낌
65% 예수 그리스도께 개인적 위탁을 했다고 여김
85%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김
이 통계는 얼마나 속고 사는 자가 많은지를 잘 보여줍니다. 설교자는 종종 사도가 던진 질문을 회중들에게 던져야 합니다. 이것은 참 믿음에 거하는 자들의 믿음을 허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참 믿음에 있는 자들에게는 더 큰 확신을 주고 거듭나지 않았지만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유익한 도전입니다.

i.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유일한 증거다.
어떻게 여러분의 믿음이 참 구원하는 믿음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시금석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입니다. 참 믿음은 순종을 낳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이 낳는 순종이 아닌 것도 존재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의 특성은 마지못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 하는 순종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있는 순종입니다.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있으며, 읽혀지는 모든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지 확인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한편 매우 주관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ii. 그리스도를 모신 자는 그리스도를 모신 자를 안다.
바울 사도는 나아가서 자신이 버려진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버려진 자가 아닌 사람들은 알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너희는 내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알 것이다. 하지만 너희 안에 나를 거부하는 자들은 여전히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몰라 보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그들의 판단으로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서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서로 알아보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대 앞에서 서게 될 때 부끄럽지 않게 서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십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자신의 세 번째 방문을 준비하라고 고린도 사람들에게 촉구합니다. 성령님의 은혜의 역사에 고린도 사람들을 부탁하면서 말입니다.

B. 바울 사도: 고린도 교회를 위한 간구(13:7~9):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9)
사도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영적인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의 초점은 고린도 사람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악한 일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세 번째 방문을 하게 될 때 다루겠다고 말한 일들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바울은 구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들이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13:9). 온전하게 된다는 단어는 ‘고쳐서 완전하게 하는 것’ 혹은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비록 인생에서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안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한 일이 마쳐지기를 바라는 성화의 완성을 위한 사도의 간구인 것입니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의 태도와 삶의 모습이 그의 서신서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는 편지를 쓰다가도 멈추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주야로 기도를 했습니다. 늘 기도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만났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탄식함으로 우리와 더불어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바울 사도는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어 살아갑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가기를 원하사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처럼, 사도 역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3. 마지막 명령과 축복(13:11~13)
이제 정말 마지막에 왔습니다. 사도는 11절에서 다섯 가지 간단한 명령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다섯 가지 명령은 1)기뻐하라, 2)온전케 되라, 3)위로를 받아라, 4)마음을 같이 하라, 5)평안하라 입니다. 사실, 이 한 구절만 가지고도 몇 차례의 설교를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전체의 흐름 속에서 간단하게 이 구절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이 제일 먼저 오는 것은 고린도 교회가 소수의 강퍅한 자들의 회개를 통해서 하나됨의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사도의 기대와 신뢰를 보여줍니다. 두번째, 온전케 되라는 명령은 바울 사도의 기도이기도 했습니다(13:9). 그들은 찢어진 그물을 깁는 것처럼 그들의 공동체의 잘못들을 바로잡고 고쳐야 했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번째로 위로를 받으라는 명령은 고린도 교회의 사건들이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의 옳은 자들이나 잘못된 자들이나 모두 상처를 입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렇습니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은 해결되어도 마음에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사도는 그것을 인정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라고 말합니다. 네번째로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은 조화를 위한 조화가 아니라 사도적 진리의 하나됨을 위한 조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평안할찌어다 라는 명령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 전체를 보면서 생각하라는 명령입니다. 평강 가운데서 살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다섯 개의 명령을 조화롭게 연결하면서 마지막 권면을 주는 것입니다.

A. 거짓 복음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와 치료약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을 아는 넘치고도 깊은 즐거움이다.
다섯 가지 명령 뒤에 사도는 약속을 줍니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압니다. 거짓 복음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와 치료약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을 아는 넘치고도 깊은 즐거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이것이 얼마나 넘치고도 깊은 즐거움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과 부를 약속하는 거짓 복음 따위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거짓 복음?건강과 부를 약속해주는?따위에 미혹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호세아 선지자는 선언했습니다(호 4:6).

하나님은 오늘도 교회에게 명하십니다. 1)기뻐하라, 2)온전케 되라, 3)위로를 받아라, 4)마음을 같이 하라, 5)평안하라 고 말입니다. 그러면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을 깊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것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얼마나 공허하고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교회로 지켜주사,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을 아는 넘치고도 깊은 즐거움을 맛보게 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모든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지켜 주시옵소서. 아멘.

B. 교회의 소망은 새로운 프로그램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너무나 익숙한 구절입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 축도로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사도가 그토록 애정어린 관계를 유지했던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사도를 가장 힘들게 했고 배척했던 고린도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것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할만 합니다. 이토록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퍼부었습니다’. 저주나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 자기의 영적 자녀와도 같은 고린도 교회에 퍼부은 것은 축복,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특별히 이 축복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교회의 소망은 다양하고 유익한 프로그램들에 있지 않고 바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성자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그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교회가 되게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사도의 삶 속에 성삼위 하나님께서 오셔서 거하시고 그의 삶에서 당신을 드러내셨던 것과 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도록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시기를 구합니다. 이것이 성도요, 이것이 교회입니다. 벧샬롬교회를 통하여 성 삼위 하나님께서 당신을 한껏 드러내시는 것,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비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온 세상 앞에 보여주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4. 교훈과 적용
오늘 말씀 그리고 고린도후서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두 가지만 정리겠습니다.

A. 그리스도인의 강함은 십자가의 약함 안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강함은 십자가의 약함 안에서 드러납니다. 강한 사람, 센 사람, 억척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우리는 그렇게 변해갑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말입니다. 똑똑함과 잘남과 세상에서 알아주는 것과 자랑거리들을 내려놓게 되고 우리는 약함 안에서 주님의 능력이 온전하여 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내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는 자가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자입니다.

B.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
사도가 끝까지 고린도교회를 축복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사도가 고린도 사람들을 향한 소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사도가 믿었던 것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믿었던 것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 그들을 교만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로 부르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요, 신뢰였습니다. 성화는 하룻밤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의 성장이 더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기에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화의 시간표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 시간표는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있습니다. 신비에 속한 영역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바울 사도와 같이 사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사람을 믿어서 사람에게 투자하면 실망하게 되고 다시는 안 한다는 식으로 이끌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아셨기에 사람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아셨기에 사람에게 자신을 다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약함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따라가는 약한 자들이어야 합니다. 강할 수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강하며,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온전하여 지는 것이 바라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손양원 목사님의 기도시를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손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기를 얼마나 원하며 사셨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도시입니다.

예수 중독
나는 예수의 중독자가 되어야 하겠다.
술 중독자는 술로만 살다가 술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고,
아편 중독자는 아편으로 살다가 아편으로 인해 죽게 되나니
우리도 예수로 살다가 예수로 인해서 죽자.
우리의 전생활과 생명을 주님을 위해 살면
주같이 부활된다.
주의 종이니 주만 위해 일하는 자 되고
내 일 되게 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이 드러나는 삶을 살도록 소명을 받은 자들임을 잊지 마십시다. 우리 교회는 성삼위 하나님이 드러나시기 위해서 세우셨다는 이 영광스러운 소명을 어느 한 순간이라도 저버리지 마십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영광스러운 소명입니다. 오직 성삼위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