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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7). 이방인에게 열린 믿음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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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7). 이방인에게 열린 믿음의 문

사도행전 14:1-28, 갈라디아서 6:17, 디모데후서 3:10-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4-28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던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기뻐했고 복음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는 엄청난 결과를 경험하게 되지만, 유대인들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박해하게 되자 바울 일행은 이고니온으로 향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14장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더베를 중심으로 한 복음 사역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지역이 다 바울 사도의 첫 편지인 갈라디아서가 전해진 갈라디아(남부) 지역이라는 것을 알고 본문을 생각하면 유익할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두 사도가 이고니온으로 향한 일을 칼빈은 이렇게 잘 말했습니다. “사탄의 대적함에 맞서 온 세상에서 사역을 수행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한 두 사도는 한 곳에서 아무리 모진 대접을 받아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가르칠 준비만이 아니라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무장을 갖추고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바로 이것을 오늘도 보게 될 것입니다.


1. 이고니온에서 (1-6a; 히 2:4; 갈 3:5; 마 10:23)
14장은 이고니온에서의 사역으로 시작합니다. 이고니온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왕의 대로인 비아 세바스테(Via Sebaste)를 따라 약 130km 를 가면 만나는 해발 1030m의 고원 도시로, 현재는 튀르키예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 코냐(Konya)이고, 당시에도 몇 개의 주요 도로가 만나는 요충지였습니다. 당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까지는 도보로 1주일 정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이고니온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평소처럼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한 메시아임을 전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 결과를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고 간단하게 기록합니다(1). 이 헬라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믿기를 거부하는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2). 이들은 마음이 열린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두 사도와 새로 믿은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했습니다. 이 말은 누구가에 대하여 나쁘게 생각하도록 마음을 오염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광야교회에서도 모세를 향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들을 통하여 수 없이 반복되었고, 현실 교회에서도 반복되는 일입니다.
이런 적대적 감정들이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도는 상당한 기간을 머무르며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3). 적대적인 위협에 굴복하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이런 태도는 단지 기질이나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3절 하반절이 보여줍니다.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3b).” 이 일을 주도하시는 분은 주님 자신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바울과 바나바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심으로써 ‘자기 은혜의 말씀’을 친히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기에 바울과 바나바는 적대적 상황에서도 상당 기간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표적과 기사는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선동을 따르지 않도록 복음의 말씀을 확증해주는 효과를 나타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썼듯이,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말씀을 확증하시는 도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브리서 2:4; 막 16:20).” 바울 사도가 후에 갈라디아서에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라디아서 3:5).”고 했을 때, 바로 이 표적과 기사들을 언급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진 결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두 사도를 따르는 자들과 두 사도를 대적하는 유대인을 따르는 자들로 분열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가지는 본래적 성격입니다. 복음이 순전하게 전파되면 어디서나 예외 없이 복음을 믿는 자와 믿기를 거부하는 자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4절은 ‘두 사도’라고 표현했는데, 비록 바나바가 열 두 사도에 포함되는 인물이 아니지만, 안디옥 교회의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사도라는 용어를 사용한 경우입니다(빌 2:25 참조). 개역개정역에서는 ‘두 사도’라는 말이 13:43과 14:1,3,5에서도 사용되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그들’이라고 되어있고, 사도행전에서 여기 4절과 14절에서만 ‘두 사도(사도들)’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결국 복음을 거부하는 이방인, 유대인, 그리고 관리들까지 합세하여 두 사도를 모욕하고 돌로 칠 계획까지 세웁니다. 두 사도를 모욕하는 정신적 공격과 돌로 치려는 물리적 위해까지 총체적 박해입니다. 이 소식을 들어 알게 된 두 사람은 급히 그 지역을 벗어나 루가오니아 지방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로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주님께서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태복음 10:23b).”고 하신 대로 입니다. 때로 어떤 이들이 순교 컴플렉스를 조장하는 경우를 보는데, 주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칼빈의 말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균형 있는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무모하게 원수들의 손 안으로 뛰어들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을 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사명을 결코 포기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에는, 두려움도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까닭에,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꼭 필요한 경우에는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진정으로 합당한 처신이다.” 6-7절은 결국 이 박해가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에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루가오니아는 당시 갈라디아 주의 동쪽 지역입니다.


2. 루스드라에서 (6b-19; 행 3:1-10; 롬 1:19-21; 고후 11:25; 갈 6:17; 요 19:6)
바울과 바나바가 먼저 향한 곳은 이고니온에서 남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루스드라였습니다. 루스드라는 주전 6년에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식민지로 삼아 갈라디아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요새로 만든 도시였습니다. 주민 대다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산악 거주자들로 촌스러운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있기는 했지만 영향력이 없었고 심지어 회당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고대 루스드라에 대한 일반적 평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고, 대신 길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 상황은 사도행전 3장의 성전 미문 앞에 앉아있던 그 사람을 생각하게 합니다(행 3:1-10). 이 사람은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청중 가운데 있었고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심을,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공용어인 헬라어로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를 주목하던 바울은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이 그에게 이런 믿음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성령님의 특별한 계시 때문인지(칼빈) 아니면 보통 설교자들이 청중 가운데 이런 사람을 분별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는지는(켄트 휴즈)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명하자, 그 사람은 일어나 걸었습니다(10).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바울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일어선 것입니다. 눈 앞에서 일어난 치유의 표적을 본 무리는 놀라서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소리치며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루스드라 사람들이 이렇게 열광을 한 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그 지역의 전설 중에, 오래전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브루기아의 산지를 방문했는데, 사람들이 그들을 환영하지 않고 배척하는 바람에 신들이 노하여서 그곳을 멸망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치유를 행하는 능력을 가진 바울과 바나바를 헤르메스와 제우스라고 여겼고, 이들을 홀대하여 신들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 보다 나이가 많았거나 또는 위엄 있는 외모 때문에 하늘의 신이고 가장 높은 신인 제우스라고 여겼고, 주로 말씀을 선포한 바울은 제우스의 아들이자 메신저인 헤르메스라고 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 외곽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은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와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지내려고까지 했습니다. 이때 두 사도는 옷을 찢고 크게 소리 지르며 무리 속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깊은 애도나 신성모독의 상황에서 보이는 격렬한 반응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분노다. 하나님의 영광이 짓밟히는 것,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사람을 향하게 될 때 일어나는 거룩한 질투의 감정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15-17절인데,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에게 행한 최초의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아닌 자연계시에 근거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우리는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둘째, 우리는 복음을 전하러 왔다. 셋째, 복음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헛된 일은 우상 숭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넷째, 지난 시대에는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행동을 참아주셨다. 이 방임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다. 다섯째, 그러나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롬 1:19-21). 민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물에 계시하신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유일하신 창조주를 염두에 두고 모든 창조 질서를 바르게 읽는 일에 실패한 자신들의 부적절함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서 실패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된다(롬 1:18-3:20)는 함축까지를 포함합니다.
이 설교는 제사를 막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해서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게 됩니다.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는 130km 나 되는데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기 위해 그 먼 거리를 온 것입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사탄의 열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이 사탄의 열심은 2천년 교회 역사에서 쉰 적이 없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바울이 세상을 혼란하게 하며 또 다른 왕인 예수님에 관해 선포함으로써 로마 황제의 칙령에 반대하는 일을 한다고 설득했거나(행 17:6-7), 바울이 율법에 반하는 신을 예배하라고 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행 18:13). 자신을 숭배하려고 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돌변하여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 돌들이 자신의 머리를 깨뜨렸을 때, 바울은 스데반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한참 동안 바울을 돌로 친 사람들은 바울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성밖으로 피투성이의 시신을 끌어 내칩니다. 바울 사도가 훗날 고린도후서에서 ‘한 번 돌로 맞고’라고 썼는데(고후 11:25) 이 사건을 기록했다고 봅니다. 또 갈라디아서에서도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라디아서 6:17).”고 했을 때, 갈라디아 사람들이 직접 보았거나 들은 이 사건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병을 고친 기적에 대한 열광은 순식간에 돌을 들어 치는 격앙으로 변했는데, 이것은 에루살렘에 들어오시던 주님께 열광하던 사람들이 변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친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요 19:6).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바나바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의 시신을 둘러싸고 아마 기도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을 살리셨는데, 누가는 바울이 살아나는 이적이 일어났다고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살아난 바울은 다시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3. 더베에서의 사역과 귀환 (20-28; 행 20:4; 13:1-3)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남동쪽으로 90km 정도 떨어진 도시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에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고 짧게 한 절로 묘사되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많은 신자가 결실하기까지 상당 기간을 더베에 머물며 복음을 전한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제자들 중에는 나중에 바울의 동역자가 된 ‘더베 사람 가이오’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행 20:4).
그리고 나서 바울과 바나바는 귀환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더베에서 동쪽으로 220km 만 가면 바울의 고향 다소에 이를 수 있었고 거기서 그들을 파송한 수리아의 안디옥까지 쉽게 갈 수 있었지만, 그들은 더베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만 해도 330km 나 되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타우루스 산맥을 지나는 험로를 포함하는 160km를 걸어 버가로 이동하여 배로 수리아 안디옥까지 480km을 이동하는 행로를 택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고 걸어온 여정을 거의 역순으로 방문하며 지나는 먼 여정을 선택했습니다. 고생한 걸 생각하면, 두 번 다시 쳐다보기도 싫은 지역들이었겠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막 주님을 믿고 제자가 된 사람들과 어린 교회들을 돌아봐야 한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베를 지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어린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믿음에 머물러 있기를 권면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해줍니다(22). 환난은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서 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도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습니다(23). 어린 교회들을 떠나기 전에 리더십을 세우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장로를 세우는 일은 경영이나 관리 행위가 아니라 기도와 금식을 동반한 영적 행위였습니다.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운 뒤에 바울과 바나바는 세워진 장로들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 교회를 맡겼습니다. 교회는 탁월한 리더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두 사도는 버가로 내려가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고 항구인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 교회로 귀환하게 됩니다(25-26).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이방 선교—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며 금식하여 기도했던 바로 그 교회입니다(행 13:1-3).
안디옥 교회로 돌아온 두 사도가 한 일은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27). 이 말을 주목해보면, 누가는 이방 선교는 바울과 바나바의 행위이기 전에,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행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칼빈의 말입니다. “누가가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이 열렸다고 말한 것은 단지 그들에게 사람의 외적인 음성을 통해서 복음이 선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유효하게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복음이 외적으로 선포될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열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손을 뻗어 잡아 주시는 사람 외에는 누구도 그리로 들어갈 수 없고, 내면에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거기에 가끼이 갈 수 없다.” 두 사도는 구브로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지에서 복음을 전한 일들, 나타난 표적과 기사들, 그리고 믿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 그리고 박해와 고난, 특별히 돌에 맞아 거의 죽었던 사건도 보고를 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은 선교의 새로운 차원,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이 열린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도는 거기서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라는 말씀으로 14장은 마치고(28), 소위 바울 사도의 제일차 전도여행도 마치게 됩니다.


4. 교훈과 적용 (딤후 3:10-12; 요 15:18-19; 마 5:11-12; 눅 6:26)
이제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교훈을 적용적으로 생각해 보지요.
제일 먼저, 복음 사역은 반대와 박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신다는 말은 이 일에 위험과 고난과 어려움이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은 언제나 반대를 가져옵니다. 복음이 죄인의 자아를 건드리고 공격하기 때문이고, 마귀가 복음의 선포를 극렬하게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이방 선교사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강단에서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바울은 루스드라 출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습니다(행 16:1).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디모데후서 3:10–12).”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한복음 15:18-19).”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고난과 박해는 결코 복음의 장애물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박해를 당하면 그것은 다른 지역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복음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로, 루스드라에서 더베로 전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곤경과 환난을 사용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이점에서 “고난은 하나님의 선교 전략이다”라고 말한 선교학자도 있습니다. 이방인을 향한 믿음의 문은 바울의 고난을 통해서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반대와 시련은 적들이 이긴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궁극적 승리는 보장되어 있으며, 그런 고난과 반대와 시련은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가고 있다는 확증입니다.
둘째도 비슷한데, 신자의 삶에는 환난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권면했습니다(22). 이 말씀은 오늘날 수많은 강단에서, 지금도 울려 퍼지는 번영 신학에 기초한 거짓 복음과 얼마나 다릅니까? 주님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1-12).”고 하셨고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누가복음 6:26).”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쓸데 없고 무의미한 환난이나 고난은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끝으로, 모든 영광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만 돌리십시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려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태도에서 거룩한 분노를 느꼈기에 그들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사람을 향하게 될 때 그것이 자신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짓밟힌다고 여겨 거룩한 질투의 감정을 느꼈던 것입니다. 설교자는 주님께서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도구일 뿐이므로, 영광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교회가 되기를,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간구합시다.